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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난 내 우울을 펼쳐 놀고 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4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5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2/07/14 14:51:3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서덕준, 유실물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분실한다

유실물 보관소에도 네게 입혀주던 문장 하나 남아있지 않다

물안개가 창백한 수초처럼 일렁이고 오후는 사선으로 저문다

그때마다 네 눈매의 능선이 그리웠다


이팝나무 꽃이 유언처럼 촘촘한 골목골목이

내게는 모두 무덤이다

너는 지금 어디쯤 서성이고 있을까


나는 늘 잘 잃어버리는 것들을 사랑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찾는 일은 없었다

 

 

 

 

 

 

2.jpg

 

신철규, 해변의 진혼곡




어떤 기대도 없이 여기에 왔다

해면을 은빛으로 물들였던 태양은

수평선에 가까워지면서 굵고 붉은 동아줄을 늘어뜨린다

구름의 조문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다


우리는 엉망으로 취했고 흐트러지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다른 별에서 환생하기 위해서는 이 별에서 죽어야 한다


새파란 입술과 붉은 입술이 만난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말이 있고 또 무덤이 있다

검은 입술이 될 때까지 입을 꾹 다문다

너의 무덤에 혀를 밀어넣는다

심장과 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주먹을 쥐고 달려오던 파도가 해변에서 손가락을 쫙, 편다

바다에게는 사막이 오아시스다

바다는 사막을 마시고 싶어서 계속 해안으로 밀려온다

내가 얼마나 메말랐기에 너는 그처럼 밀려오는가

사막 한가운데의 붉은 우체통에는 모래가 그득하다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주었던 날개를 벗는다

나비는 날개부터 부패하기 시작한다 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바다는 뭍에서 흘러온 폐품들을 계속 밀어낸다


가난한 사람은 주머니가 많다

주머니가 많아서 손을 잃어버리는 때도 있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의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

관 속의 시신도 주머니가 필요없다

죽은 자에게는 어떤 기대도, 어떤 망설임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로의 심장을 만지작거린다

어둠의 손목이 옆구리를 휘어감는다

 

 

 

 

 

 

3.jpg

 

안미옥, 밤과 낮




북쪽 숲을 지나왔어 태어날 때의 형상은

한쪽이 길어지면 한쪽은 짧아진다 가려움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우린 모두 연결되어 왔어

그럴 때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어 그런 날이 자주 왔어


트랙을 돌고 있다 이곳엔 울타리가 많아

농담들이 사는 곳 어떤 이름도

자주 뒤집히는 곳


새로운 색이 떠돌고 있어 어떤 색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고

허리는 누구에게 가 있는 것일까


거기서 나와

돌고 있은 지 한참이 지났어


떠오른다고 생각하면

다리가 길어지는 기분이 든다 어깨가 물렁해진다

웃음이 많은 사람은 어딘가 외로워 보여

곁이 너무 환해서 점점 더 어두워지는 오후


토마토가 끓고 있는 냄새로 뒤덮였어 뜨거워

그렇게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때


떨어지기 직전의 열매를 만난다

뿌리와 잎이 가장 멀어졌을 때, 어제와 내일이 가장 멀어졌을 때



신기해

오늘이 오는 시간

 

 

 

 

 

 

4.jpg

 

이승희, 여름의 우울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처럼, 바람 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말들에 속아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밤

난 내 우울을 펼쳐 놀고 있다

아주 나쁘지만 오직 나쁜 것만은 세상에 없다고 편지를 쓴다

 

 

 

 

 

 

5.jpg

 

황인찬, 소실




해변에 가득한 여름과 거리에 가득한 여름과

현관에 가득한 여름과 숲 속에 가득한 여름과

교정에 가득한 여름

물 위에 앉은 여름과 테이블 맞은편의 여름과

나무에 매달린 여름과 손 내밀어 잡히는 여름

잡히지 않는 여름


눈을 뜨니

여름이 다 지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선풍기는 돌아간다

등이 젖은 남자애들이 내 옆을 지나가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을 뽑는 이가 있다

창가에 걸어놓은 교복은 빠르게 말라가고


또 보다 많은 것들이 수쳇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도록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 손을 언제 놓아야 할까

그 생각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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