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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열대야처럼 늘어진다
게시물ID : lovestory_934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8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7/16 15:47:44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백상웅, 오래된 테이프




지난 사랑은 비디오나 카세트처럼 미세한 모터 소리를 낸다

지루할 때는 앞이나 뒤로 재빠르게 넘긴다


우리는 테이프를 꺼내 녹화를 뜬다

우리의 과거는 10센티미터만큼의 미래에 둥글게 말리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골목에서 갑자기 과거의 사랑이 재생되더라도 놀라면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먹먹해지면 되니까


과거와 미래는 뒤바뀐 기억이다

지금 사랑하면서 우리가 예전에 지나온 어느 골목을 떠올리는 건 죄다


우리는 한 곡만 반복해서 들었고, 한 장면만 반복해서 보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열대야처럼 늘어진다


사랑이 저기 있는데,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 누워서 우리가 겨우 할 수 있는 건

꾸벅꾸벅 조는 일뿐이다


목소리는 변하고 얼굴은 일그러진다

필름을 뽑아내기까지, 우리는 적당히 늙어간다

 

 

 

 

 

 

2.jpg

 

나희덕, 산책은 길어지고



그의 왼손이 그녀의 오른손과 스치고

그녀의 그림자가 그의 그림자와 겹쳐질 때

그들은 서로에게

낯선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산책은 길어지고

둘 사이에 끼어든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란히 걷는 것은

아주 섬세한 행위랍니다

너무 앞서지도 너무 뒤서지도 않게

거리와 보폭을 조절해야 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걸음은 어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흰 실과 검은 실을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이 오면

그때야 서로를 알아보게 될까

산책은 길어지고

흩어진 발자국들은 말을 아끼고

어둠은 남은 발자국들을 다 지우지는 못하고

 

 

 

 

 

 

3.jpg

 

서덕준, 작가의 말




제목이 적히지 않은 시집을 펼쳤다 가만히 덮습니다

작가의 소개말에 나는 형체가 없는 몽타주

나는 잉크 바깥에서

구절과 단어의 바깥에서 줄곧 서성입니다

시에는 온통 당신이 있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을 빛내는 데에 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쓸 뿐

이 내 시집의 제목도

곧 당신이 될 것입니다

 

 

 

 

 

 

4.jpg

 

최현우, 불행은 편지였다




불행은 편지였다

언젠가는 도착하기로 되어있고

언제 올지는 몰랐으므로


양말 속에 어떻게 들어갔을까

나의 바닥을 어떻게


길가에 앉아 구두끈을 푼다

상처의 방향으로 몸이 쏟아진다


모두 집어 던졌었지

그때 깨진 컵은 내 살을 기다리며

서랍 속에서 분리되었던가

젖은 신발 벗고

피 묻은 사금파리를 꺼내는 일

아픔은 꺼낼 수 없는 일


나의 바깥에서 떠도는 조각들을 기다려야 할까

발바닥 찌르는 날

하나도 남김없이 빼내서

다시 붙일 수 있다면

두 손으로 다시 쥐어볼 수 있다면


그대가 오면 컵이 나를 집어던질 수 있도록

팔목을 내밀어 줄까

어둠 속에 앉아있는 내 안부가

뾰족하게 자라도록

 

 

 

 

 

 

5.jpg

 

엄지용, 다음부터




이번까지만 이렇게 하고

다음부턴 이러지 말아야지


라며 버려버린 시간들이

언젠간 한데 모여

우린 뭐 네 인생 아니었냐고 따져 물어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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