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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그것을 봄과 혼동하기로 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7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27 00:00:5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김선태, 조숙




어릴 적 우리 집 뒤란에 핀 찔레꽃처럼

보면 하냥 마음이 외지고 막막해지는 계집아이가 우리 반에 있었는데


마주치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갤 숙이며 지레 먼 논둑길을 도망치다

자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곤 했는데


그런 날은 아니 그다음 날은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아예 학교도 작파한 채 산에 숨어 놀다

저녁 무렵 기신기신 집으로 기어들곤 했는데


열 살쯤이던가

촛불을 들고 칠흑 같은 벽장 속에 들어가

종일토록 연필에 침을 묻혀 쓴 편지로나

간신히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인데


무슨 세상에나 가장 어려운 말이라도 적혀 있었던지

졸업가를 부르는 순간까지도 건네지 못하고

결국 손때만 잔뜩 묻은 걸 도로 벽장 깊숙이 감춰버렸던 것인데


사십 년쯤 지났을까

지금도 그걸 생각하면 찔레꽃처럼 마음이 환해지는 것이어서

연어처럼 지난 세월의 강물을 숨차게 거슬러 오르고 싶기도 한 것이어서

 

 

 

 

 

 

2.jpg

 

임재정, 몸 밖의 정거장




사원 처마에 매달려 풍경으로 울었지

삐걱거리는 마루 지나 격자문에 그림자를 누인 채 쉬기도 했네

나는 흔들리는 불빛을 사랑했으므로 흔들림

창가에 서 있노라면 길은 초여름 밤의 반디처럼 격식도 없이 날아다니곤 해서

그때만은 나도 소리 한 잎으로 그림자 꾸러미로 가벼워지곤 했네

잠은 곤하고 무거웠네


손잡이가 닳은 서랍을 만지작거리네

나를 훔쳐갔던 행선지로부터 멀어지네


낡은, 몇 개 서랍이 달린 장난감 기차를 가지게 되네

오후 그늘로 아이들이 몰려오네

나는 깊은 풍경을 거느린 투명한 유리창

기적이 울고 아이들은 아무 정거장에서나 뛰어내려 집으로 돌아가네


헐렁한 무릎을 여밀 동안

녹슨 못 박힌 꺾쇠를 비틀며 서랍이 열렸다 닫히네

여행도 끝이 보이네

 

 

 

 

 

 

3.jpg

 

최승호, 취한 밤




데킬라 몬테알반 술병 속에는

선인장 애벌레가 한 마리 들어 있다

술에 절여져

바닥에 누워 있는 벌레

그 물컹한 미해탈의 나비를

술꾼들은 씹어먹곤 한다


늦은 밤의 바에는 늘 취한 사내들이 있다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라

혀가 꼬여 돌돌 말릴 때까지

횡설수설 거품을 물고 헛소리를 질러라

술꾼들이란

오아시스를 찾아 방황하는 낙타들이다

대도시의 고독을 잊고 싶은 낙타

가슴의 사막에 독한 술을 들이붓는 낙타

잔뜩 취해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은 낙타


나도 늘 취해서 사는 것 같다

나비의 꿈속에서 한 생을 살았던 장자(莊子)처럼

혹은 공왕(空王)의 꿈속에 사는 허깨비처럼

나도 허둥지둥 늙다가 사라지리라

그러나 허공 같은 공왕은 죽지 않는다

공왕은 허무를 모른다 우울을 모르고 술맛을 모르고

술값이 얼마나 허망한지 모른다


술에서 깨어난 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바에는 아무도 없다

나와 빈 술병들과 쓰레기와

헛소리의 유령들처럼 떠다니는 냄새들이 있을 뿐

모두들 나를 버려둔 채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4.jpg

 

최호일, 흩어진 말




라일락 향기가 무작정 공중으로 흩어질 때 아니

공중으로 흩어진다는 말이 흩어지지 않을 것처럼 좋았을 때

나는 그것을 봄과 혼동하기로 했다

우리 결혼해도 될까요 국문과 선배에게

문학적으로

어제 산 장난감처럼 꺼냈다 그 말은

한쪽 무릎이 잘린 채 골목길을 비관적으로 걸어갔다

흩어지고 내렸다

검은 고양이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오는 것처럼

그 계절의 비가 왔다

젖은 옷과 젖은 옷 사이

흑백으로 된 라일락 냄새가 봄의 겨드랑이에서 풍겼다

혁명을 꿈꾸기도 했으나 불길한 색상 때문에

머리가 가려웠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 말은 어디로 갔을까

오후 다섯 시에 약속이 있다는 그녀의 시간은

녹슬어서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같이

문득 활짝 열리는 그 말은


잃어버린 지갑을 또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았다

가장 먼 곳에 두고 살았다

그 말이 몸에서 흩어지는 걸 본 최후의 사람처럼

 

 

 

 

 

 

5.jpg

 

이승희, 적막한 식사




잠결에 밥 먹는 소리 들린다

물소리 달그락대는 강가를 걷는 중이다

잠시 물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들여다본다

적막하다


촉수 낮은 불빛이

분필가루처럼 식구들의 얼굴에 내리는 동안

두어 번 조용한 허기가 다녀간다


물소리 점점 멀어진다

나는 강가에서 돌이나 던져본다

물 위를 날아가는 생각의 끝에서

잠깐의 정지

나는 다시

물 속으로 오래 가라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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