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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가면을 벗을 수 없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7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29 14:45:15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안효희, 슬픔의 막




그가 잘 웃는 까닭은 더 많이 슬프기 때문

안경을 꼈다 벗었다 한다


웃음은 슬픔을 감추려는 얇은 막이라

비오는 날 강물 위에도 있고

사랑 하나 없는 날 빈 나뭇가지에도 있다


그의 눈과 입이 약간의 미소를 내게 보내었다면

형체 없는 약간의 슬픔을 내보인 것


진주로 만든 목걸이가 흩어지자

웃음이 차르르 터진다


슬픔을 가진 마른 육체의 살이 터지고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 같은 목소리가 난다


압력밥솥 속에서 끓다가 혼자 가라앉는 것

냉장고 속에서 조각조각 오래도록 얼어 있는 것


그가 한 주걱 밥을 퍼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다 양푼을 헹궈도 남아 있는 흔적


세상의 모든 슬픔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웃음은 울음으로 연결되는 저마다의 통로를 가진다


슬픔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나날이

입었다 벗었다 하는 마네킹의 무표정이 말을 한다


누군가의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슬픔의 막을 가르고 당신의 절반을 그에게로 보내는 것

 

 

 

 

 

 

2.jpg

 

신영배, 저녁의 점




베란다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베란다에서 자란다

보도블록 위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보도블록 위에서 자란다

테이블 앞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테이블 앞에서 자란다

엘리베이터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엘리베이터에서 자란다

침대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침대에서

물속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물속에서

거울 속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거울 속에서

꿈속에서 뽑힌 머리카락은 꿈속에서

자란다, 손아귀들의 한낮


검은 바람결이 목을 감는다

손아귀들이 연체동물처럼 스멀스멀 저녁의 구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들이 죄다 머리가 잡혀 저녁의 점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얼어붙어 집으로부터 떨어진 점이 된다

둥근 나무들의 여백 사이로 발 없는 여자가 달린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검은 식물 속으로 모공의 꿈속으로

침대와 엘리베이터와 테이블과 보드블록과 물빛이 함께 있는 거울 속으로

달린다, 점이 될 때까지

 

 

 

 

 

 

3.jpg

 

이향란, 뚜껑




뭔가가 이미 담겨져 있거나 담길만한 것에는 뚜껑이 있다

주스 병을 따면 주스가

콜라병을 따면 어김없이 콜라가 나온다

밀봉됐던 것들이 냄새를 풍기며 탱탱하게 살아있다


땅의 뚜껑은 하늘이며

하늘의 뚜껑은 땅이다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담겨져

저마다의 생김새와 목소리와 냄새로

온전히 숙성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가끔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던 것

혹시 우리의 생을 너무 무거운 뚜껑으로 유폐한 건 아닌지

뻥! 하고 한번쯤은

머리꼭지와 가슴의 뚜껑을 따버려야 했던 건 아닌지


아직껏 단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나를

탄산가스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를

언제 한번 힘 있게 따볼까

내 안의 뜨거운 너는 속 시원히 솟구칠 수 있을까

 

 

 

 

 

 

4.jpg

 

강인한, 오페라의 유령




노래의 날개 위에 극장이 있고

도취의 하늘이 거기 떠있었다

내 사랑의 깊이는 지옥보다 깊어서

오, 두려워라

저 푸른 심연을 소라고둥처럼 내려가고

내려가면 거울의 방

소용돌이 속에 떴다 가라앉고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는 섬이었다

갈채는 거미줄이 되어

샹들리에를 휘감아 흔들더니

내 심장이 터질 듯 슬픈 날이었다

우레처럼 떨어져 산산 조각이 난 샹들리에

죽음의 오페라는 막을 올리고

나는 가면을 벗을 수 없었다

눈부신 삶을 노래하는

디바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절망에 입맞춘 내 입술로 지옥의 사랑을

하소연해도 부질없을 뿐

이제 나의 노래는 어둠 속에

삐걱이는 층계와 벽 속에 숨어 있느니

그대가 바라보는 거울 뒤에 숨어 있느니

춤추며 노래하는 그대여

그대의 발길을 희미한 꿈결로 따라갈 뿐

그림자처럼 거미줄처럼

 

 

 

 

 

 

5.jpg

 

이원, 오토바이




왕복 4차선 도로를 쭉 끌고

은색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오토바이의 바퀴가 닿은 길이 팽창한다

길을 삼킨 허공이 꿈틀거린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끊긴 길을 좋아하고

4차선 도로는 허공에서도 노란 중앙선을 꽉 붙들고 있다

오토바이에 끌려가는 도로의 끝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따라온다

뽑혀져 나온 아파트의 뿌리는 너덜너덜한 녹슨 철근이다

썩을 줄 모르는 길과 뿌리에서도 잘 삭은 흙냄새가 나고

사방에서 몰려든 햇빛들은 물을 파먹는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뿌리의 벼랑인 허공을 좋아하고

아파트 창들은 허공에서도 벽에 간 금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다

도로의 끝을 막고 있던 아파트가 딸려가자

모래들이 울부짖으며 몰려온다 낙타들이 발을 벗어들고 달려온다

그러나 낙타들은 우는 모래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모래들은 울부짖으면서도 아파트 그림자에 자석처럼 철컥철컥 붙어간다

모래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여서

오토바이는 허공에 전 생애를 성냥처럼 죽 그으며 질주한다

아파트는 허공에서도 제 그림자를 다시 꾸역꾸역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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