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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72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30 23:29:1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혜미, 비취




그가 물관을 꺼내 내 손금에 심어주었네

비취, 입술을 오므리며

먼 나라의 푸른 돌을 불러 윗입술부터 차오르는 바다

그 출렁이는 숨을 당겨 맡으면

차갑고 청록의 것들이 부드럽게 밀려들어

단단한 심장을 쓸고 지나갔네

뜨거운 입김도 없이 살얼음으로 짠 구름을 나누어 덮고

우리는 서로의 속을 궁금해하다 잠들었지


이름을 훔쳐가줘

떠나는 계절 대신 가장 아름다운 얼음의 장신구를 줄게


오래 머문 것들은 제 몸에 캄캄한 빛을 새긴다

물관에서 흘러나온 푸른 파문들이 가지마다 스며들어

얼어붙은 핏줄을 현(弦)으로 삼는가

떠나는 길보다 돌아오는 걸음이 더 낯설어질 때

손닿자마자 녹아드는 푸른 꽃잎


그를 위한 두 개의 이름을 가지려네

일렁이는 손금마다 길을 잇대며

쓰러져 바깥이 되는 것들을 위해

 

 

 

 

 

 

2.jpg

 

이정원, 마음이라는 것




개심사(開心寺)에 가면 저절로 열리는 줄 알았네

마음의 문(門)

산문이 어림없다고 세심동(洗心洞) 표석을 세워 어르고 있네

씻을 마음을 찾았으나 고놈의 것

벌써 휘적휘적 돌계단 앞서 오르고 있네

뒤쫓는 몸만 가쁜 숨으로 빵빵하네

씻을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있으면 내놓아 보라고

연못가에 가부좌 튼 바람에게 묻네

씻을 것도 씻길 것도 없으니

열 것도 열릴 것도 없지 않느냐 따져 묻네

아하

백 년쯤 제 속을 들여다보며 마음 닦아

환골탈태하고도

씻을 것 있다고 연못 속에 몸 담그고 있는 배롱나무

불쑥 심검을 들이대는데

굽으면 굽은 대로 휘면 휜 대로 흘러가게 두라네

멀찍이 고개 끄덕이는 심검당(尋劒堂) 배흘림기둥

마음의 문고리 슬쩍 잡아당기고

고놈의 마음, 열릴 듯 말듯하고

 

 

 

 

 

 

3.jpg

 

이수명, 비의 연산




깊은 밤 검은 우산이 홀로 떠 있는 명령을 내린다

그냥 떠 있는 것을 사랑해 우리는 일제히 비예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채운다

우리는 우리 이전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이 도출되지 않는 이 끝없는 연산을 무엇이라 부를까

만나지 않는 선들이 그냥 떠 있지

그냥 사랑해 더 가늘게 더 두텁게 불확실하게


우리가 주고받는 것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연수로 탄생하고 자연수는 무효가 될 때까지 자란다

낮과 밤이 어디로부턴가 흘러나와 시가전을 벌인다

낮과 밤을 떠다니게 하라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이곳에서


형상을 시작하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 속에서 틀림없어지거든요


틀림없이 비를 닮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벗어난다


우리는 마찬가지가 될 모양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

그러나 없는 베개를 움켜잡고 베개에 머리를 묻고 떠내려갑니다

 

 

 

 

 

 

4.jpg

 

하재청, 리모콘




불현듯, 그야말로 불현듯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쇼파에 누워 천장의 형광등을 보고 있을 때

불빛 속으로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리모콘을 찾았습니다

시계바늘은 9시 정각을 가리키고

모든 것이 너무도 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리모콘이 없었습니다

잠시 리모콘을 잡았던 것도 같은데

통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자라목처럼 퇴화된 손목을 길게 뻗어

오래 묵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자

화면이 흔들리며 치지직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 때 흔들리는 당신 얼굴을 보았습니다

당신이라는 이물질, 대책없이 흔들립니다

우리집 거실에는 나무탁자가 놓여 있고

그 밑에 플라스틱 과자통이 놓여 있고

그 안에 쌀과자가 늘 담겨 있습니다

입 안에 넣으면 금방 녹아버립니다

하얀 쌀과자 하나 집으려고 손을 내미니

아, 글쎄 손에 뭉클 잡히는 리모콘

너무도 자연스럽게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손을 뻗으면 항상 대기하고 있던 리모콘

한번쯤 사라지고 싶었나 봅니다

리모콘 눈이 한 번 번쩍이자

치지직 당신이 사라졌습니다

 

 

 

 

 

 

5.jpg

 

홍일표, 실종




공중에서 푸드덕거리는 새 한 마리를 움켜쥐었는데

새가 없다

깃털 몇 잎 하늘에 흩어져 있다

새를 보기는 본 것인지

꽁지 흰 새를 잡긴 잡은 것인지


아직 손끝엔 온기가 남아 있는데

콕콕 쪼아대던 부리의 매운 기억도 또렷한데


새가 없다


없는 새가 나를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깐 머리 드니

공중에 듬성듬성 찍혀 있는 새의 발자국


상심처럼 푸른 이파리 몇 잎 떨어진다


없는 새가 나를 업고 날아갔는지

눈과 귀가 만져지지 않아 온종일 공중을 뒤적거리는데

손발이 사라졌다


밤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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