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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찻잔 속 꽃으로 그가 내게 왔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70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9/01 22:58:25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신달자, 한지(韓紙)




저 허공의 질감이 어떻더냐

햇살 지나고 박살나는 피투성이 천둥 지나고 할퀴듯 사나운 폭풍하며

연한 몸빛의 달빛 지나고 연한 쑥물 봄바람 지나고

그 다음에 늘씬하게 두들겨 태어나는 한지

종이의 질긴 정신은 죽음을 넘어왔다

세상이 뱉어내는 것들 다 안아 들인

그래서 낮은 보폭으로

깊은 침묵 안에

얼어붙는 겨울 대지에 쏘옥 고개 드는 싹

소리 없이

도도한 사람의 정신 여기 태어난다

 

 

 

 

 

 

2.jpg

 

변종태, 구멍은 소리를 만든다




삐끔 열린 창 틈에서

잠긴 듯 뚫린 퉁소의 구멍에서

구멍은 클수록 저음으로 운다

작은 구멍은 고음을 낸다

사랑은 고음, 일상보다 한 옥타브 높은 소리를 낸다

구멍 탓이다

그대와 나의 헐거워진 구멍

긴장 풀린 저음이 난다

구멍을 스치는 바람이 소리를 만든다

그 뒤로 하얀 물보라 밀려온다

 

 

 

 

 

 

3.jpg

 

황경숙, 프로타쥬




눈꺼풀이 내려지고 푸른 동공이 닫히기 전에

나는 네 얼굴에서 데스마스크를 뜬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블루 빛 염색을 하고

손톱 발톱에 검은색 매니큐어로 날개를 그리고

너를 따라 날아오르는 내 얼굴

아직 가면은 아니다


내일 아니 오늘

이미 자란 너의 아이를 낳고

코르셋 끈을 조이면 허리가 잘록해지므로

나는 다시 태생의 물병자리에 꽂혀 물구나무선 채

너를 만날 수 있다


짧지만 여전히 날 선 말들로 내 물음에 대답하는 너는

모래시계 속의 블랙홀에 갇혔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얼굴에 흰 종이를 대고 연필로 긁고 긁으면

꿈속에서 접은 종이인형처럼 뻔뻔한 네 윤곽은

살아날 듯 꿈틀거린다


너와 내가 닮은 유일한 언어가 뒷모습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

과거와 현재 사이에 너라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천극(川劇)이 거꾸로 흐르면

내 시(詩)의 변검(變瞼)은 언제 네 얼굴을 떼 낼지 모른다

 

 

 

 

 

 

4.jpg

 

조용미, 난만




목 없고 팔 없고 코 없고 다리 없는 것들은

목을 베어내고 팔을 떼어내고 코를 잘리고 다리를 빼앗겨서

우뚝한 존재감을 갖게 되지

그 자리에 돋아나는 초록의 폐허를 쓰다듬어보네

당신 없이, 당신을 떼어내고, 당신을 빼앗기고

당신이 부서진 자리마다

빛나는 당신

몸통만 남아 그대로 당신이 되는

머리 없고 팔 없고 눈 없고 귀가 없이

그대로 더욱 강력해진 당신을

나는 바라보네

아주 긴 생을 출몰귀관하는 저 꽃들

 

 

 

 

 

 

5.jpg

 

한이나, 목련꽃차




찻잔에 꽃이 피었다

말려둔 목련꽃차를 마셨다

목련의 흰 빛

너무도 단순하여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열정

꽃봉오리를 덖고 덖었던 시간

나를 관통하여 지나갔을

찾잔 속에 가라앉은

꽃숭어리를 본다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다 써버려야 끝이 났을

봄 끝에 떨어진 꽃의 살점들

찻잔 속 꽃으로 그가 내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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