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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비가 오길 기다린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7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9/04 22:50:40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정란, 상투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물들의




햇살이 섬섬옥수로 주변을 고전적으로 어루만지다 비틀거린다

애완동물은 눈으로 권태를 조곰조곰 밀어내고

꽃봉오리는 시들어버릴까 모레 필까 고민하고 있다


손에 늘 잡히는 휴대폰이 상투적이지 않은 건 고품질의 입을 가졌다는 거

혀 깨물어 스스로 수혈하는 책이나 한순간의 착각을 박제한 액자보다

더 비린내 나는 르포에 홀린다는 거

오래된 사물들은 기꺼이 천공을 지향한다


소멸이라는 상투성을 다 뱉어내면

물구나무 선 비비크림은 더 이상 마개를 닫지 않을 것이다


허공에 잠입한 지 오래된 복조리 아귀엔

옷장과 침대의 상투성이 바싹 건조된 채 한가득 걸려 있다


깊은 우울증의 사이코패스 테이프는

무엇이든 한걸음에 겁탈하고 한 번에 교합하려 든다

폭포 같은 괴성과 괴력을 어떻게 오물거리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지구가 매일 방향 바꾸는 걸 몰라보는 방을

바람이 한 바퀴 홱 돌리고 지나간다

 

 

 

 

 

2.jpg

 

문정희, 문어




문어(文魚)가 꽤 지적인 이름을 가진 것은

머릿속에 들어 있는 먹물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가 먹물을 찍어 글을 쓰는 것을 누구도 본 적은 없다

물렁한 대가리에 움푹한 눈을 하고

여덟 개의 긴 다리를 팔방으로 뻗치고 다니며

포획물을 휘감는 것을 보면

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그는 전형적인 먹물 가진 속물

흡반으로 강하게 밀착한 후

맹렬히 빨아대는 그에게 걸리면

누구든 그만 슬슬 넋이 나가고 만다

긴급 상황에는 유감없이 먹물을 뿜어 사태를 흐려 놓고

다리를 통째로 자르고 사라질 때도 있다

그가 노는 물에 떠다니는 새끼들을 보면

이건 모두 오리발이다

주로 여의도나 인왕산 부근에서 논다고 들었지만

이 무척추 동물이 색깔을 바꾸어 가며

대학가에도 나타나고 우리 동네에도 있다

그는 시보다 몸으로 더 많이 돌아다닌다

어떤 시집을 펼치면 덜 말라 쭈뼛한 그의 대가리가

고약 같은 먹물을 달고 뛰어나와

섬뜩 뒤로 물러설 때가 있다

 

 

 

 

 

 

3.jpg

 

이승희, 비를 맞는 저녁




당신의 살냄새 같은 앵두꽃을 데려가는 바람의 뒤에 서서

나는 비가 오길 기다린다

한때 그것은 내 몸을 살다 간 구름의 입자들

불의 이마를 닮은 짐승처럼 바람이 불어 간 방향으로 떠나갈 것들

빗방울이 맨살에 떨어진다

스미듯 집의 불빛이 꺼졌다

앵두꽃이 진 자리마다 물고기들이 꼬리를 감추며 나무속으로 사라졌다

허기가 들끓는 지상에서 상처 난 짐승들이 제 눈을 파내려는 듯 자주 울었고

핏물이 배어나오는 그리움으로 버텼다는 기별

다시 앵두꽃은 피겠지

바람이 솜털을 부드럽게 누이며 말했다

몸속에 새겨 넣은 지도 한 장이 낡아가는 저녁

당신은 피 묻은 바닥을 닦아내며 물처럼 그렁거렸지

항상 구석의 풍경이었던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구석을 지워낼 때

바람의 지워진 문장을 읽어주던 당신

그 문장 속에서 꽃들의 한생이 다시 시작되고

내 몸이 기억하는 빗방울의 무늬 속으로 걸어가는 저녁이었다

 

 

 

 

 

 

4.jpg

 

채선, 비에 관한 또 다른 유래




빗줄기에도 각이 있다

열차가 지나가는 기억 밖으로

매듭 풀린 시간들이 빠져나간다


덜컹이다 휘굽는 기적소리

갈래져 아스라해지는 소실점으로부터

느닷없이 비가 몰려오고


쇳조각 긁히는 소리를 내는 이

허공에서

힘줄처럼 뻗히는 빗줄기를 붙든다

물컹한 어둠의 속살을 비집고

그렁그렁 불빛들 매달린다


누군가 웅크렸다 사라진 빛으로

축축한 몸을 켜는 폐허

녹물 겹겹 들러붙는 어둠은 과녁이 되고

오래도록 문질러도 촉이 닳지 않는 빗소리에

평행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침목(枕木)들

가늘게 빗겨져 격리되는 모서리마다

무수한 고리로 이어진, 나는

차갑게 긁히며 비망이라는 역을 떠돈다

 

 

 

 


 

5.jpg

 

조유리, 사바사나(Shavasana)




죽음을

개었다 다시 펼 수 있나

깔았다 다시 개어 윗목에 쌓아두고


목숨을 되새김질해 보는 체위

숨골이 열리고 닫히는 허구렁에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나로부터 나 조금 한가해지네


감은 눈꺼풀을 디디며

천장이 없는 사다리가 공중을 빗어 올리고


목덜미로 받아낸 악장의 형식으로

죽음을 게송해도 되는 건가

백 개의 현을 건너 걸어나간

먼 저녁이 되어


이 세상 계절을 다 물리고 나면

어느 사지에 맺혀 돌아오나 다시

누구의 숨을 떠돌다

바라나시 강가(Ganga)에 뛰어드는 바람이 되나

뜬 듯 감은 듯 어룽어룽 펄럭이는

눈꺼풀이 산투르 가락을 연주하는 동안


어제 아침 갠 이부자리가 내 숨자락을 깔고

기웃기웃 순환하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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