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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당신은 먼 곳을 본다
게시물ID : lovestory_936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5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9/18 16:18:1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한보경, 뚜벅뚜벅




뚜벅뚜벅 소리내어 걷고 싶다 생각했을 때

뚜벅뚜벅 걸어 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생각이 났다

뚜벅, 뚜벅, 뚜벅

어디에서 이런 은근한 울림이 따라오는 것인지

한 곳을 응시할 줄 아는

깊숙한 습관을 익히지 못한 탓에 오래 전부터

내 걸음은

절룩거리거나, 통통거리거나, 질퍽거리거나, 진중하지 못했다

늘 반 박자씩 어긋나던 걸음을 모른 척하고

너무 오래 걸어왔다

고개 숙이고

제대로 바닥을 사랑해본 기억이 없어

뚜벅, 뚜벅

까마득한 아랫것이었던, 온 몸을 울리는 그 소리

가슴까지 한 번도 올라온 적 없었다

 

 

 

 

 

 

2.jpg

 

김충규, 가는 것이다




어둠에 발목이 젖는 줄도 모르고 당신은 먼 곳을 본다

저문 숲 쪽으로 시선이 출렁거리는 걸 보니 그 숲에

당신이 몰래 풀어놓은 새가 그리운가 보다 나는 물어 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발목을 다친 새이므로

세상의 어떤 숲으로도 날아들지 못하는 새이므로

혀로 쓰디 쓴 풍경이나 핥을 뿐

낙오가 우리의 풍요로움을 주저하게 만들었지만

당신도 나도 불행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

어둠에 잠겨 각자의 몸 속에 있는 어둠을 다 게워내면서

당신은 당신의 나는 나의

내일을 그려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태양의 순결을 믿고 있으므로

새를 위하여 우리 곁에도 나무를 심어 숲을 키울 것이므로

그래, 가는 것이다 우리의 피는

아직 어둡지 않다

 

 

 

 

 

 

3.jpg

 

문정희,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못 볼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을

당신이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을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4.jpg

 

김명리, 낙원의 풍경




오래 바라보면

바라보는 몸이 활처럼 휘는 순간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지 않으려고

구름의 표면장력을 팽팽히 조이는 봄 허공

바람에 휩쓸리는 것들은 죄다

밤보다 더 깊이 뿌리내린 검푸른 수초들이다


발 자칫 헛딛는다 해도

여기서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오래 바라보면 바라보는 몸이

낙원의 풍경 같은 고인 물 속 어딘가에


애욕이 비눗방울처럼 부푼, 생이 만발한 방이 있어

물속에 내린 열나흘 달이

꽃 핀 고사목처럼 기우뚱 부풀어 오르는 봄밤


낡은 상앗대로 간신히 괴어 논

꽃 피는 밤의 무게에 활처럼 휘면서 번지면서


모든 슬픔을 그 속에 지닌

품속에 지녀온 날카로운 비수를

가만히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5.jpg

 

이승희, 절벽 가는 길




며칠 치의 말들이 입 속에서 저물고

또 저물어

검고도 흰 괴로움의 집을

짓고 부수는 동안

나는 잠들지 못했다

잠들거나 죽은 것들 사이에서

허공에 발 딛는 순간

붉은 꽃으로 피어

나 그만 항복하고 싶었다고

더는 누구도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하도록

수시로 뒷덜미에 칼을 들이대는 치욕이

나를 데리고 먼 길 가시라고

검은 입술을 부딪혀 오는

들짐승 같은 바람의 털을 쓰다듬었다

난 아주 많이 외로웠다고

선량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평창동 고개 넘어

절벽 가는 길

가벼운 산책처럼

불 꺼진 버스가 절벽 끝으로 사라졌다

벽이 어딘가로 갈 수 있는 문이었으므로

절벽 또한 그러하다고 믿기 시작한 것은

다정하게 찾아드는 저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어떤가

일렁이는 불빛을 가슴에 심장처럼 달고

새처럼 바람처럼

한 끝에서 한 끝으로 옮겨가는 일

어찌 이리 쓸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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