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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공중, 전화를 찾다
게시물ID : lovestory_936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6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9/29 23:21:41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향란, 공중, 전화를 찾다




혼자서 아침을 부르고 혼자서 저녁 속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한꺼번에 공중이 그리운 날

길모퉁이 부스에 들어가 전화를 걸면

저요 저요, 손을 들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거나

노래를 부르겠다거나 술을 같이 마시겠다거나

연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들이 범벅을 이룰 것 같다


거리로 뛰쳐나가 ‘여보세요’ 하면

공중은 꽃밭처럼, 숲처럼, 새떼처럼 몰려와

오래도록 막혔던 귓속을 뻥! 뚫어 줄 것 같다


하여 나는 곰살궂은 일상에 몸을 띄우고

공중의 몸으로 떠들썩하게 날아다니거나

공중의 눈빛을 반짝이며 공중의 가슴으로 화끈거릴 듯싶다

그들처럼


적요로 인한 환청에도 시달리지 않을 듯한데


공중, 전화는 어디에 있을까

 

 

 

 

 

 

2.jpg

 

이영옥, 검은 버찌의 나날




낙하하는 어둠보다 빠르게

조울증 앓는 해보다 먼저 시무룩하게

너는 어떤 뜨거움을 지나와 여기에 놓여 있는가

고요한 버찌는


자신으로부터 달아났던 열매가 온몸을 웅크리고 있다

화기(火氣)의 순간을 깨물고 있는 문신처럼

조용히 돋아나는 기억에 물을 주며


낮과 밤이 뒤섞여 뿌옇게 흐려진 봄 날

조금씩 상해가는 백야를 천일 동안 걸어갔다

문방구 좌판에서 뽑아 낸 오렌지 맛이 나던 설탕 달

지나간 것은 어디서나 쉽게 떠올라 쉽게 부서졌다

소슬한 바람의 이마를 밀치고 일어서면

연분홍 불빛을 군데군데 슬어놓은 초저녁 밤


터진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고

이유 없이 오래 남는 얼룩이란 없었다

작은 반성에도 마음을 할퀴며 풀썩 엎어지던 봄바람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간신히 하루를 매달았다가

떨어진 뒤에야 온전하게 자신을 안을 수 있다는

그것이, 문득 위로가 되어주는

아직도 즙이 덜 빠져 얼룩얼룩한 나로부터

가만히 멈춰 있는 버찌로부터

 

 

 

 

 

 

3.jpg

 

조말선, 깊이에의 강요




그렇다면 나에게 깊이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빈 술병과 반쯤 남은 술병을 예로 들어

목이 좁은 원통의 높이를 구하는 공식은 어떤가요

내 손이 가장 커지는 순간이 병의 바닥에 닿지 않을 때라면

저 꽃병에 꽂힌 짧은 손목들은 깊이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키가 큰 당신은 나보다 깊습니다 키가 큰 당신은 바닥보다 얕습니다

술을 가장 많이 마신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 때문에 밤이 깊어졌습니다

목을 수그린 대화는 테이블에 엎질러졌습니다

관상용으로 꽂혀 있던 주먹이 튀어나와 불확실한 얼굴을 가격한다면

분출하는 밤이라도 막아주세요

나의 질문이 다시 자정에 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낸 사람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저 사람 때문에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저 사람이 쾅, 테이블만 내리쳐도

깊이는 형식적으로 불안합니다

 

 

 

 

 

 

4.jpg

 

강성은, 올란도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죽었다

몇 세기에 걸쳐 꿈을 꾸었다

수많은 계절들의 반복과 변주

수많은 사람들의 반복과 변주

어제와 내일의 경계가 사라지고

여성과 남성의 경계가 사라져도

이 꿈은 사라지지 않아

죽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지면

다음 생이 시작된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야?

밤이 저 오랜 질문을 던지고

슬그머니 얼굴을 바꾸면

다음 날이 시작된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야?

몇 세기에 걸쳐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나의 노래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나의 얼굴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이 오랜 꿈이 끝나고

나 자신이 희고 빛나는 밤이 될 때

이것이 어떤 잠이었는지 알게 되리

 

 

 

 

 

 

5.jpg

 

이운진, 우주적 우연




우주를 가로질러 오는

그대가 만약 그라면

나는 지구의 속도로 걸어가겠어

시속 1674km의 걸음걸이에 신발은 자주 낡겠지만

지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

사랑을 믿는

이 별의 아름다운 관습처럼 살고 싶어서였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단단한 국경선인 마음을 넘어

천 년 넘은 기둥처럼

그의 곁에 조용히 뒤꿈치를 내려놓는 일이야


눈부신 밤하늘의 정거장들을 지나

지구라는 플랫폼으로 그가 오면

풀잎이 새에게

호수가 안개에게

바위가 바람에게 했던 긴 애무를

맨발로 해 주겠어

첫 꿈을 깬 그대에게 적막이 필요하다면

돌의 침묵을 녹여

꽃잎 위에 집 한 채를 지어주겠어

그것으로 나의 정처를 삼고

한 사람과 오래오래 살아본 뒤에도

이름을 훼손하지 않겠어

지구에서의 전생(前生)을 잊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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