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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1-4)
게시물ID : lovestory_941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낭만아자씨
추천 : 1
조회수 : 10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3/23 10: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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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그대에게 드리는 꿈


        씨앗(4)




 연단에 오른 자들은 하나같이 이번 상해의 왜국영사관 폭파가 영・미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자행하는 대일본제국의 철천지원수 영・미를 지상에서 씨를 말리자고 역설하고, 광분했다.

 “진짜로 영・미가 했을까?”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지. 어쨌거나 영국이나 미국은 대단한 나라들이야. 왜놈들이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면 아예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으이.”

 “어쨌거나 속이 시원하네.”

 “삼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으네.”

 “이 사람아, 삼 년 묵은 체증이 아니고 동학 때 묵은 체증이로세.”

 “아니지. 임란 때부터 묵은 체증이라네.”

 “그래, 그래. 왜놈들이 저리 발악하는 걸 볼작시면 정말이지 망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게 말일세. 이제 우리도 고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이.”

 “암, 그렇게 돼야지.”

 군중대회장에 끌려 나온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말이었다.


 여운형은 신문사를 나섰다. 7월 초순의 한낮은 찌는 듯이 더웠다. 쥘부채로 쉴 새 없이 바람을 만들면서 걷는데도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나선 것은 특별한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미행이 붙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참 독한 자들이야.

 출옥하고 나서 몇 달간을 끊임없는 감시를 당한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는 미행하는 자가 없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안심하게 만들어서 일이 무르익으면 일망타진하는 것은 고등계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일부러 종종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느지럭느지럭 걸어보기도 했다. 여전히 미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총독부 관리들과 가끔 들렀던 명월관의 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갔다. 아직 치장도 하지 않은 마담이 쪼르르 달려나왔다. 마담의 환대를 받으면서도 여운형의 온 신경은 뒤로 쏠려 있었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따라붙는 자는 없는 것 같았다. 낮시간에 은밀히 요정으로 들어오는데도 미행이 붙지 않은 것을 보면 이제 감시가 느슨해진 게 분명했다.

 사건의 시작은 작년 12월이었다. 김구에게서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좌우합작을 제의받고 국내 좌파를 먼저 통합하고 우파와 합작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을 시작하다 경무국의 감시망에 걸려 버린 것이었다. 막 시작하려던 단계였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잡혀간 처음부터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협박 섞인 신문도 받지 않았다. 총독부는 알고 싶은 게 별로 없는지 그냥 유치장에 몇 날 며칠을 가둬 놓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서 경무국장 요시에가 찾아왔다. 취조실에 마주 앉은 요시에는 궐련을 꺼내 여운형에게 권하고 자기도 피워 물었다. 궐련 한 개비가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요시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운형으로서도 먼저 입을 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칫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말려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담배를 몇 개비나 더 태우고 난 요시에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상,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솔직하게 대답하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니,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가둬놓고는 뭘 물어보겠단 말이오?”

  여운형은 짐짓 화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요시에가 손을 내저었다.

 “화낼 것까지 없소.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니까. 여러 말할 것 없소. 여상은 지금 여상이 획책하고 있는 일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소?”

 “아니, 획책이라니? 내가 뭐를 어쩐다고 이러시오?”

 여운형은 다시 화를 냈다. 요시에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아니, 됐소. 고생 좀 하시오.”

 날이 선 말투와는 달리 요시에는 매우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간도 넘게 여운형과 요시에는 같이 있은 것이었다.

 “이번이 여상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예우라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오.”

 요시에는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여운형은 이미 총독부의 술수를 간파하고 있었다. 요시에가 직접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그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 형무소고 유치장이었다. 마음 놓고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눌 수 없는데도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는 게 그곳이었다. 총독부의 계략은 경무국장 요시에와 여운형이 취조실에서 오랜 시간을 평화적으로(?) 같이 있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동지들에게 배반을 의심하게 만들고, 의혹의 눈초리를 견디다 못해 결국에는 자포자기해서 변절하게 만들려는 술수였다. 고문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 사람에게 주로 쓰는 수법이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동지들은 너희놈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 여운형이었다.

 짐작했던 대로 여운형은 곧바로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됐다. 죄목도 ‘유언비어 유포‘였다. ‘왜국이 곧 망할 것’이라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것이었다. 총독부 입장에서는 아직도 조직을 만들만한 독립운동 세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굳이 광고할 필요가 없었다. 여운형 외에는 아무도 검거하지 않은 이유였다. 왜국이 망하리라 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잡아 족치겠다고 선전하는 효과도 함께 노린 것이었다. 

 독방에서 여운형은 다시금 결론을 내렸다. 역시 좌우합작만이 살길이었다. 조만간 왜국이 패망할 것은 자명했고, 왜국의 패망은 한반도에 기회가 아니라 또 다른 수렁일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앞세우나 연합국들도 전범국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들이었고 특히, 아직도 임정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태도를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자주독립이 절실한 것이었다. 국제관계는 정의나 인류애가 아니라 오직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운형이고 김구였다. 김구의 좌우합작 제안도 그런 현실인식 위에 기반한 것이었다. 왜국의 패망을 자주독립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좌우가 똘똘 뭉쳐서 왜적들과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재판도 없이 있다 두어 달 후에 출옥을 했지만 지금까지는 밤낮없는 감시 속에 헐수할수없었던 것이다. 마음이 급했는데 이제서야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어머, 선생님이 이렇게 일찍 웬일이세요?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화장을 하지 않아도 얼굴에 교태가 자르르 흐르는 마담이 호들갑을 떨었다. 여운형은 지체 없이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손님 만나기로 하셨나요, 선생님?”

 “아니오. 지나다가 잠시 들러 봤소. 덥구려! 우선 찬물 한 잔 주시오!”

 마담이 얼른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대령했다. 여운형은 사발에 가득한 물을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우물이 깊기로 소문난 집답게 물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마담에게 그릇을 넘겨주며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커어! 물맛 한번 조옿다! 과연 더울 때는 물이 최고로고!”

 “그럼 주안상 봐 올릴까요, 선생님?”

 “대낮부터 술은 그렇고...... 출출하니 요깃거리나 좀 갖다주시오.”

 “기생집에 요깃거리래 봤자 안주밖에 더 있나요, 선생님?”

 술을 팔 기대가 무산되자 마담은 금세 샐쭉해서 톡, 쏘았다. 여운형이 들어왔을 때는 이 불경기에 대낮부터 웬 떡이냐고 속으로 신바람이 났던 그녀였다. 패망 분위기가 짙어지자 총독부 관리들의 발길이 끊기다시피했던 것이다. 거기다 술장사라는 것이 계절도 타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가만있어도 더운 판에 아무리 계집을 빠치는 남정네라도 기생 끼고 술 마시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지 싶긴 했다.

 “그것도 그렇구려. 그럼 또 오겠소.”

 여운형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들어온 것이 미안해서 뭐라도 좀 팔아줘야 될 것 같아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당황한 마담이 붙잡았다.

 “아이, 선생님, 화나셨나 봐요?”

 “허허허, 내가 그리 졸장부였더란 말이오? 사실은 내가 좀 바쁘오. 다음에 또 오리다!”

 명월관을 나오면서 여운형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미행을 할 만한 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분명 미행을 당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을 집으로 잡았다. 미행이 없다 해도 아직 움직이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집으로 가면서도 미행이 있나 없나 신경을 곤두세웠다. 역시 미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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