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feature=shared
최문자, 유년
괜히 종이가 필요했다
나에게
펜과 심란한 마음과 절벽과 배추밭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이 마당을 놓지 않았던 도마뱀들
말 못하는 우물 하나 있었다
나만의 종이도 아닌 종이에
사람들이 절벽 아래로 내던진 꽃을 그렸다
시
첫
단어 첫 행을 이렇게 시작했다
문장이 오기를
24시간 기다렸다
생각만 해도 강까지 흘러가주던 시냇물과
계속 흰 새 두 마리가 수만 번의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와 같이 살아주고 말해주었다
변선우, 회전문
나는 회전하므로 입장이 번복됩니다
내부와 외부는 나로 하여금 교차합니다
나의 내부는 외부가, 나의 외부는 내부가 되어
공존을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반복적으로 중단을 사유합니다
내 몸에, 이 순간에 도사리는 안과 밖이
이토록 함께 간섭하다니
나는 놀라움으로 하여금 조작을 하여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합니다
더욱 빠르게 넘나듭니다
그래서 경계는 도리어 뚜렷해지며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됩니다
그럴수록 나는 바깥을 몽상합니다
그럴듯하게 중단을 사유합니다
강재남, 자각몽
찬찬히 내린 비로
세상이 그윽한 날
나무는 빼곡하게 새롭게 싹이 돋고
멀리서 가까이서 초록이 일렁였지
생명을 잉태하는 고요한 걸음들이
어떨 땐 거룩하게 때때로 가혹하게
그렇게 저들끼리 측근이 되어가고
채송화꽃 벙그는 화단 쪽에 모여앉아
지나간 이야기를 우리는 또 풀어내고
종일토록 가랑비는 가만가만 내렸는데
젖어가는 세상을 넋 놓고 바라보다
까무룩 꺼져가는 날들을 생각했지
언젠간 사그라질 이런 일이 일상인 듯
어쩌면 꿈이다가 꿈 아닌 듯 나는 깨고
속절없는 시간에서 불가해한 몸의 영역
이런 게 삶이 아니면 어떤 것이 삶일는지
이미산, 이명
몹시 아팠던 여섯 살
슬픔이 초대한 매미 한 마리
내 오른쪽 귓속에 눌러앉았지
누군가 내 국어책 숨겼을 때
매미는 나 대신 골목을 헤매며
돌려줘
돌려줘
직장에 다닐 땐 피곤해 피곤해
그래서 결혼이나 하고
일기장에 이상한 남편을 일러바칠 때도
매미는 나보다 더 슬피 울었지
매미가 떠나면 나는 행복해질까
보약을 먹고 명상음악을 듣고
그러나 점점 힘이 세진 매미는
원고 마감일
고치고 또 고치다 문장의 뼈대마저 허물어졌을 때
두 마리였다가 세 마리였다가 죽음의 칸타타 레퀴엠
나는 살려줘 살려줘
매미는 나를 삼키고 떠나겠다는 듯이
그래서 그날까지
우리는 서로를 묵묵히 견딘다
한명희, 햇빛의 가격
옥외 계단은 철로 되어 있고
철은 군데군데 녹슬어 있다
계단 가운데 달이 하나 걸리어 있다
저 달도 오르든 내리든 해야 하리라
한 달이 지나기 전 결정을 해야 하리라
계단을 올라가 옥탑에 다다르든지
계단을 내려가 지층에 이르든지
지나친 햇빛과
부족한 햇빛
햇빛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햇빛은 공짜가 아니고
햇빛은 절대 공평하지 않기에
철제 계단에 걸터앉아
달의 고심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