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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밀레] 비뚤어진 영웅의 서사
게시물ID : mabinogi_1359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중구
추천 : 10
조회수 : 70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1/28 17:29:43





*G20 네타가 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를 날조하여 만든 이야기이므로 스포일러에 주의해주세요
*카즈밀레라고 썼는데 솔직히 커플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메인스트림 클리어 이후 분노를 말 그대로 '배설한' 글이라 아주 아주 아주 최소한의 맞춤법 검사만 했으니 감안해주세요
*피네를 좋아하시면 읽지 마세요
*피네를 좋아하시면 읽지 마세요
*피네를 좋아하시면 읽지 마세요 
*중요하니까 세 번 썼습니다









 결국 선지자 일행을 저지할 순 없었다. 무수한 발악에도 그들은 우습다는 듯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사단의 모두가 지쳤다. 무던히 애를 썼건만 결국 할 수 있던 거라곤 몇 번의 저항 끝에 나가떨어져 정신을 잃고 다시 한 번 밀레시안에게서 구해지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지위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억지로 바로 서있어야 하는 것인지. 일단락된 상황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밀레시안을 백업한 톨비쉬가 상황을 정리하며 그들에게 추후에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지 일러둘 참이었다. 발칙하게도 그런 그의 말을 끊는 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선 아무런 대책도 없으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거 아냐.”

 이번에는 밀레시안을 그리도 따랐던 알터마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처럼 시선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지루하다는 듯, 연신 주변을 돌아다니다 이제는 사태의 심각성도 무시하는 행동이다. 아벨린이 입을 열었지만 곧 톨비쉬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예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띠며 고개를 숙여 악동과 시선을 맞췄다.

“지루하셨습니까?”
“아니. 이러나저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못 하는데, 이렇게까지 사람 붙잡아 둘 이유 있냐는 거야.”

 그의 시선이 피네와 카즈윈에게 꽂혔다. 이미 안면이 있던 너희들이라면 몰라도 저것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할 거 아냐. 어깨를 으쓱이며 툭툭 던지는 말이 여간 얄미울 수가 없다. 톨비쉬는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무엇이 몇 번이나 세상을 구한 영웅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는가. 그러나 일단은 정리가 급선무다. 이질적인 신성력의 감지가 뛰어난 아벨린은 아발론 게이트에 머무르는 것으로, 나머지는 평소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며 마무리 지었다. 이런 일이 아니면 모이지 않을 사람들이란 것을 알기에 인사를 나눴다. 해산이다.

 톨비쉬는 피네의 옆을 바짝 스치고 지나가는 영웅을 바라보았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는 유명인사다. 몇 번이고 이 에린을 저 손으로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이다.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여신의 말에 따르며, 배신을 당해도 큰 반응 없이 지났다. 수없이 많은 탈진으로 거머쥔 승리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그 사람을 존중하지도, 대우하지도 않았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고 그저 저 자가 지켜주는 것이 당연시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그는 점점 비뚤어지고 있었다. 농담처럼 지나갔지만 거절의 반응도, 뒤틀린 대답도. 설령 그 안에 무언가 불온의 싹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선지자들이―

“너는 안 가?”
“……. 아, 제가 얼른 가버리길 원하시는 건가요? 나름대로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는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겠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톨비쉬가 수습하기도 전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어느 샌가 게이트의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우리도 가볼게. 알터, 아벨린. 수고해.”
“피네님! 카즈윈님! 안녕히 가세요!”
“응, 피네. 앞으로 고생할 게 훤하지만, 조심해. 그리고……. 카즈윈, 당신도요.”

 미묘하게 어색해진 기류에 피네는 애써 웃으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서면 연민이나 실망, 불안이 섞인 시선과 마주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그냥 걷기에도 힘든 몸을 간신히 이끌며 평소보다 빠르게 걸었다. 결국엔 문을 벗어나자마자 주저앉았다. 카즈윈은 그저 가만히 그녀를 내려 보다 손을 내밀 뿐이다. 그녀는 괜찮다며 고개를 젓고 땅을 짚어 일어났다. 그때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지만 날카롭게 울렸다. 투명하게 빛나는 백색의 보석이 박힌 금반지, 그녀는 곧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밀레시안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거, 돌려드리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먼저 가, 나중에 연락할게.”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카즈윈의 등을 떠 밀며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손을 흔들며 어서 가라는 그녀의 제스처를 눈에 한껏 담은 그는 못내 발을 뗐다. 완전히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섰다. 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하지 않은 말이 너무나도 많아서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 혼란에 혼란이 쌓이고 그에 시간은 지체되어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그래도 기회는 있으리라. 피네는 다시 게이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밀레시안님이요? 아까 폭포 쪽으로 가시는 것 같던데.”
“고마워. 왜 이게 나한테 있었을까? 이상하네, 하하…….”

 물어보지 않고 폭포 쪽을 둘러봤으면 더 편했을걸. 피네는 목을 쓸며 후회의 말을 삼킨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땅은 붉게 물들어간다. 새삼스레 낯이 익은 공간에 걸음이 느려진다. 피로에 젖어 무거워진 몸, 과거에 절어 무거워진 걸음. 그녀는 무엇을 위해 걷고 있었는지 잠시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야에 폭포가 들어오자 곧 그 근처 나무에 기대앉은 형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목적을 상기하고 그에게 다가간다. 인기척을 느낀 이는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한참 전에 갔을 당신이 왜?” 아까 전의 불퉁한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언제나와 같은 온순한 영웅의 모습. 피네는 저도 모르게 안심의 호흡을 내뱉었다. “그대의 반지가 제게 있어서요, 돌려드리러 왔어요.” 손위에 반지를 올려둔 채 그녀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 없이 고개를 기울이며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황을 넘어 민망함의 경지가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으켜달라는 뜻일까, 그 손에 반지를 두라는 뜻일까. 잠시 고민하던 피네는 그 손을 가볍게 잡고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으나 오히려 그녀가 그리로 끌려갔다. 순간 무게중심을 잃어 상체가 꺾였다.

“상냥한 사람.”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 피네가 쥐고 있던 반지는 흙바닥을 굴러, 구르고 또 움직여서는 끝내 물에 빠진다. 그녀의 선의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끝까지 침잠된다. 불안정한 시선이 심연을 닮은 시선과 맞닿았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영웅의 탈을 쓴 무언가가 자리했다. 본능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억센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힘이었을 텐데, 어째서?

“그 상냥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움직일 수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한없이 순수한 백색의 미소와 상반되는 아주 조금의 움직임조차 허용하지 않는 지독한 힘이다. 그녀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간다. 의문과 혼란이 뒤섞이는 가운데 한숨과 같은 단어가 그녀의 귓속에 기어들어간다. “부모에 대한 죄책감일까?” 기어들어간 말은 클로디어스가 햄릿 왕에게 흘려 넣은 헤보나가 되어 그녀의 몸을 잠식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간절히 바라는 듯 오묘한 감정이 그녀의 빛나던 페리도트 색의 눈을 검게 물들인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추는 이는 그저 천진한 아이마냥 웃는다. 자신이 어떤 말로 누구를 어떻게 했는지, 어떠한 죄책감도 찾을 수 없는 그저 순백의 감정만을 표출할 뿐이다.

 "나는 피네,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라면 무서워서 도망쳤을 것 같은데. 그 정신력으로 알반 기사단의 조장 자리까지 꿰찬 건가? 대단하네, 피네는.”

 절망의 굴레에 얽매여 움직이지 못하는 여자를 두고서 영웅은 움직인다. 무너져 내린 이의 주변을 빙빙 돌며 계속해서 크고 작은 칼날을 꽂는다.

“금방이라도 널 죽이려드는 병마와의 싸움에서도 이기고. 그저 아프고 싶지 않아서 내뱉었던 말에 부모가 스러지고, 혼자가 되었어도 쓰러지지 않고 그 두 목숨으로 얻어낸 삶을 짊어지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잔악무도함을 던지던 입을 멈추고, 걸음도 멈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발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찍는다. 불쌍한 어린 양은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오히려 얽히고설켜간다. 뒤틀린 영웅의 말이 만들어 낸 잔혹의 웅덩이는 개미지옥,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진득한 늪이 되어 그녀를 집어삼킨다. 혼자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 익사하는 결말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빛나던 보석은 그렇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아, 그래도 말이지. 당신 부모들은 정말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병으로 당신을 잃었어도 마음속으론 계속 기리다 언젠가는 그들을 꼭 빼닮은 아이를 다시 낳았겠지. 그 아이는 당신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그 가정에도 상실의 경험이 없던 것처럼 행복해질 수 있었을 거야. 말이야 ‘신이여, 제가 대신 아프겠나니 제발 제 아이만큼은 아프지 않게 해주시오!’ 라 부르짖었지만 글쎄, 그때가 되어 당신의 말 한마디로 죽음을 맞이했을 땐 어땠을까?”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그만, 그마안! 제발 그만! 환히 빛나던 봄의 모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했던 이야기, 그러나 외면하고 싶던 그 생각이 타인의 입에서 흘렀다는 자체가 그녀에게는 극악의 고통이었다. 고통을 선물 한 이는 측은한 심정을 담은 시선으로 몸부림치는 여자를 내려다본다.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않은 채, 그렇게 쳐다보고만 섰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영웅의 마지막 판단이었다. 그는 처절하게 망가진 이를 뒤로 하고 본인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유난히도 짙고 긴 그림자가 그 뒤를 따랐다.

 그날 밤, 아발론 게이트에는 짐승의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나치게 조용한 날이 밝았다. 아발론 게이트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곤 새 소리나 바람이 나무에 스치우는 소리, 훈련을 위한 도구에서 나는 소리뿐이었다. 아니, 이따금씩 리라의 현을 뜯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한동안 밀레시안이 머무르게 된 공간은 완연한 봄날의 조건을 품었다. 그는 알터와 아벨린이 지키고 선 문 앞에 앉아 온순한 봄바람에 밀려드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병든 닭처럼 졸고 있었다. 허공에 잔잔함만이 존재할 때까진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적막이 폭풍전야임을 알아챌 수 없었다.
 “조장님, 잠시 일어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정하게 자신의 조장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깨운 로간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알터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잠든 이가 깨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작게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이가 깨어났다. “…무슨 일인데?” 미묘한 기류의 두 사람을 흘겨보고는 몸을 일으키며 상황을 묻는다. 알터의 옆쪽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두 사내는 답이 없다. 그 엄격한 아벨린이 자리를 비울 정도면 예삿일이 아니구나, 그는 직감했다. 조장 급을 불러내려면 대체 무슨 일이어야 하려나. 두 가망 없는 사내의 사이에서 그는 답을 가지고 올 이를 기다렸다.


“이야기가 그대의 귀에도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서 해결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 왔습니다.”


 앉아있는 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엘베드 조의 조장, 최강의 기사의 행차였다.




 자리를 피해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아벨린이나,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톨비쉬까지. 본능적으로 이 일은 분명 귀찮은 일이 될 것이며,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 되리란 걸 깨달았다. 한가로이 보내는 휴식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밀레시안은 자리를 피했다.
 아튼시미니의 기사단, 그를 위한 유적지. 결국엔 침입자를 허락한 것을 보면 이는 무엇을 위함이었는가. 외부인의 비소가 유적지 어딘가에 흩뿌려진다. 그는 스스로를 외부인이라 생각했다. 지금처럼 자신에게 저들의 견습 기사를 떠넘기고 그들의 조장이 되어 은근슬쩍 그들 집단으로 끌어들이려는 수작 또한 곱게 보이지 못했다. 자신이 뒤틀렸다는 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 본인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먼저 생각했던 것처럼 ‘외부인’일 것이라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특히나 며칠 전 환하게 빛나던 봄의 여인에게 타박을 한 것이 그랬다. 그저 경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너, 피네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카즈윈의 칼날이 목에 겨눠질 줄은 모르고 있었다.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이의 칼날이 떨리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살기 앞에서 무력해진 이는 뒤돌아서 카즈윈의 표정을 보자니 조금만 스쳐도 베일 것 같아 그저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피네와 그, 분명 일이 있긴 있었다. 무슨 말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이런 일을 일러바칠 성격이었던가? 

“나는 모르는 일이야. 왜 내게 의심을 갖는 건데? 오히려 사도화를 한 번 한 인물이기에 너희 조직에서 위험하다 판단하고 처리했을 가능성부터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억울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차, 하는 순간 살점이 칼날에 묻어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카즈윈은 공격할 의사가 없었고, 그는 답을 할 생각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환부를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핏줄기가 흐른다. 칼날을 타고 끝에서 피는 빗방울처럼 드문드문 떨어진다. 툭, 툭. 연신 떨어지는 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더해 묽은 적색이 되어 바닥으로 스며든다.

“……. 피네가, 그날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아.”

 메마른 목소리가 물기어린 단어를 품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검신도 기울어지며 이내 쓰러진다. 고고하게 서있던 이가 봄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 무언가에 젖어 무거워진 고개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웅은 몸을 일으킨다, 작지만 그 누구보다 커다란 육신은 작게 비틀거리며 올곧게 섰다. 신의 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회개하는 이처럼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등을 마주하며 나락으로 기어들어간다. 한숨을 터뜨리며 영웅은 잔뜩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본다. 얼굴에 빗방울이 닿아 미끄러진다. 순간의 암전에 아무도 영웅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래 봐왔던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카즈윈.”

 비는 그 기세를 더한다. 늘 맑은 날만이 계속되던 곳에는 먹구름만이 가득하다. 영웅은 작아진 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춘다. 여전히 그는 반응이 없다. 연민과 다른 미묘한 감정이 섞인 시선은 카즈윈에게 머무른다. 잠시 기다리던 이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절망에 젖은 자의 고개를 들어올린다. 혼탁해진 그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비뚤어진 이는 입 꼬리의 움직임을 감추려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분명 그 날 피네는 많은 걸 겪었지. 그동안 감추려 애쓰던 것들을 들키고, 자신의 입으로 시인했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네가 그녀의 내면을 봤지.

“절대 들키고 싶지 않던 과거를, 너와 내게 들켰고.”

 네가 그녀를 구하지만 않았어도, 그녀의 치부가 드러날 일은 없었겠지.

“아마도 그녀는 당신에게 그걸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을 거야.”

 소중히 여기던, 소중하다 여겨지던 이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겠지. 늘 봄처럼 화사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겠지. 오로지 너에게만,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이건 상관없으니 단 한 사람, 카즈윈 당신에게만은 절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좌절했겠지, 슬퍼했겠지.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은 했지만…….”


 밀레시안의 입은 굳게 다물어졌고, 짙은 청색의 눈이 감겼다. 그저 쏟아지기만 하던 비는 살갗을 에듯 파고든다, 떨어진다.
비는 나뭇잎을, 가지를, 흙바닥을, 물을, 바람에 스치며 소리를 자아낸다. 각기 다른 음색은 한데 어우러져 누군가를 위한 곡조처럼 퍼진다. 하늘이 내리는 엄숙한 장송곡이었다.


 카즈윈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비척거리며 다른 조장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남겨진 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빗소리에 그에게서 들리는 묻힌다. 그는 새어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간신히 억눌렀던 감정은 마지막 남은 양심에 비통한 이를 보내고서야 터진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계속해서 웃었다. 점점 커지는 웃음소리는 더욱 커지는 빗소리에 감춰지고, 또 가려진다. 미친 사람처럼 웃는 이를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스산하게 부는 바람만이 그를 감싸고 불 뿐이다. 참으려는 노력에 물어뜯는 입술은 찢어지고, 어깨를 움켜쥐던 손끝, 그 손톱이 살 안으로 파고든다. 영웅이 웃는다, 한 편의 희극을 본 사람처럼 그저 계속 웃는다. 자신이 내몬 사람의 죽음의 소식에 웃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자의 눈물에 웃었다. 잘못이 없는 자에게 잘못을 만들어 씌운다. 숨이 모자랄 정도로 웃는다, 웃음은…멈추지 않고…….




“에일레르 조의 조장, 피네의 장기간 연락 두절에 대한 것은 정황상 사망으로 보는 것이 옳다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에일레르 조의 조원들은 당분간 아르후안 조와 행동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하며, 조만간 새로운 조장을 물색하여 재정비하는 것으로 결론 내리겠습니다.”



 또다시 집단은 흩어진다. 한 명의 기사, 한 명의 동료를 잃은 집단은 무기력감을 감추지 못하고 늘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본분을 다잡기 위해 굳건히 서야만했다. 영웅은 그들을 둘러보며 그것이 ‘와해’의 시작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날, 유난히도 슬피 우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는 소문이 울라 대륙 전역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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