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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콜렙시를 아시나요..
게시물ID : medical_204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rius7782
추천 : 1
조회수 : 65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5/16 00:09:59
안녕하세요. 전 올해 42살 된 강제 백수입니다.
사실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써보는데요. 주작 이런거 아니고 실제로
제가 겪고 있는 상황이니까 주작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조용히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
 
사실 제목에서도 써놨듯이 저는 나르콜렙시(Narcolepsy), 즉 기면증을 앓고 있는 환자입니다.
그것도 매우 중증에 해당합니다. 제가 이 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3년 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이상징후가 나타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제가 금천구 시흥동에
살고 있을 때 저희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저희 살던 집을 팔아야 했고 그 뒤에
강북쪽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저는 공립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이사를 온 뒤에 저희 어머니께서 저희 3남매(제가 장남)를 모두 같은 사립 초등학교에 전학을
시켜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등록금이 ㅎㄷㄷㄷ...
 
어쨌든 이사 온 뒤로 그 때가 8월에서 9월 사이쯤 되었던 듯 합니다. 저랑 같은반 애들하고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저는 다 건넜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횡단보도의
거의 절반 약간 넘은 시점에서 서서 졸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 있던 차는 계속 경적을 울리고
있었고 이미 다 건너갔던 친구들은 저를 희한하게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 뒤로 저의 학창시절의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을 정말 하루도 안빼고
항상 졸았어요. 자연스럽게 저는 애들한테 만만하게 보였고 고2때는 왕따를 당해야 했었습니다.
뭐.. 이건 여담이긴 한데요. 계속 왕따를 당하다가 고2 기말고사를 거의 1달쯤 앞둔 시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였습니다. 거의 야.자.를 하려던 시점에서 저를 항상 괴롭히던 녀석이 갑자기
제 책가방을 들고 튀는 겁니다. 이녀석 달리기도 잘해서 저와 계속 거리는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이녀석이 교실로 들어갔는데 그 상황에서 저는 이성의 끈이 생애 처음으로 끊겼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실은 완전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책상 하나는 맨 앞에 던져져있고
교실 앞문 유리창은 깨져있고 제 손은 완전 피칠이었고..
 
알고보니 제가 이성의 끈이 끊긴 시점에서 그 녀석이 앞쪽으로 도망가니까 제가 책상을 앞으로
집어던졌더랍니다.  그것도 한팔로.. 역시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 초능력이 나오나봐요.. 아하하..;;
그것도 모자라서 그 녀석이 앞문을 열고 도망치니까 필통 뚜껑을 열어서 던졌는데 앞문 유리창이
깨진 것은 그것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근데 거기서 끝난게 아니라 깨진 유리창 조각을 들고
그 녀석을 찌르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 반장이 더 냅두면 큰일날듯 하여 저를 기절을
시켰다고 하는데.. 뭐 제가 들은건 거기까지네요.. 다행히 그 이후로 왕따 신세는 면하긴 했지요.
 
그리고 저는 지옥같은 중고교시절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졸업만 하면 지옥을 벗어날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요.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현실은 훨씬 더 생지옥이더군요. 정말 진심으로 학교를
다닐 때가 훨씬 행복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입니다. 사실 학교를 다닐 때는 조는 것을 가지고 퇴학을
시키지는 않지요. 뭐.. 수업을 못들으니 공부를 못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사회생활은 그런게 없더군요. 그 어떤 직장도 1년을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그나마 가장 오래
다녔던 곳이 1년 1개월 정도 다녔지요. 정말 어떤 곳은 보름만에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정말 왜 사나 싶었지요. 진짜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맨날 직장에서 일도 제대로
못하고 졸기만 하는 인간이고 집에서는 졸음 하나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의지박약인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저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듯 합니다.
 
 나중에 제가 28살 쯤에 교회를 다니게 되긴 했었는데 저는 그래도 처음엔 교회 분들은 착하셔서
이해를 해주시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물론 착하신 분들이 많기는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체감해야 했습니다. 물론 저같은 인간을 정말 인격체로 존중해주는 분들도
계셨기에 버틸 수 있었지요. 그러다가 저희 집에 2009년에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나름의 집안 사정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갔던 이사였는데요. (조금 밝히기가 꺼려지는 부분이라
죄송하지만 요건 생략할게요) 거의 1년 약간 넘긴 시점에서 저희 어머니가 이곳은 도저히 살곳이
못되는 것 같다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010년 12월에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시흥에 살던 집보다는 주변환경은 좋더라고요.
 
뭐 어쨌든.. 안산에 가서도 저에 대한 편견은 여전했습니다. 하긴 뭐 저도 2015년 되기 전까지는
무슨 병인지조차도 몰랐기 때문에 변명도 못하고 진짜 답답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운명의 해인 2015년.. 그해 8월이 되던 시점에서 우연히 인터넷에서 '기면증'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가진단을 해보니 제가 겪고 있는 증상과 너무나도 똑같더군요. 그 길로
어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수면클리닉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기가 좀 망설여졌었어요. 가서 혹시라도 '이게 아니라고 하면 어쩌나?'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결국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게 되었습니다. 원장님께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검사비가 좀 비싼
편이니 의료실비보험이 있으면 싸게 받을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전 이전에도 선천성 갑상선
기능저하를 앓고 있었던지라 실비보험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자그마치 110만원이나 되는
검사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요. 해서 원장님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검사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지금 직장도 못구하는데 그 돈을 어떻게 제가 감당을 하겠냐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원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는 제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원장님은 지금 돈이 중요하냐
지금 환자분이 검사를 받고 병을 치료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 아니냐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 그러면 그 돈을 제가 어떻게 감당을 합니까 여쭤봤더니 그러면 일단은 지금 낼 수
있는 돈만 보증금식으로 걸고 나중에 생기는 미납금은 선생님께서 사정이 될 때 조금씩 내시다가
나중에 다 갚을 수 있을 때 갚으시라고..
 
진짜 쇼킹했습니다. 보통 병원같은 경우 돈 없으면 그냥 가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한데 이 원장님은
뭔가 다르다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나중에 양압기 때문에 전화로 저희 어머니께 상담을 해주실
때도 진짜 뭔가 정성을 다 해서 해주시는 분위기를 느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병원을
다니고 있고요.
 
근데 저같은 경우는 상당히 희귀한 케이스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보면 자가면역 시스템이 고장이 나서
자신의 세포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이라고 생각하여 파괴하는 식인 듯 하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같은 경우는 증상이 갑상선 질환으로 인한 피로 누적이 나중에 잠으로 연결되서 그 시기에
정말 강제적으로 잠을 자게 되요. 신기한 것은 누가 옆에서 말을 하거나 혹은 꼬집거나 건드리면 그런
감각을 다 느끼게 되는데 잠에서 깨지만 못한다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잠이 올 때가 있는가 하면
어쩔 때는 저도 모르게 잠이 와서 정신 차리고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는 경우도 있고요.
 
이놈의 갑상선 기능저하 때문에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1년여를 휴학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를 졸업할 때는 제가 77년생인데 78, 혹은 79년생들과 같이 졸업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제
친구들의 대다수가 저보다 1살 혹은 2살이 어립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가 14살이었으니까
올해로 꼭 28년째네요. 정말 긴 시간을 빛 한줄기 보이지 않는 암흑의 터널 속에서 보내야만 했었는데
작년부터는 제 멘탈도 많이 성장한 듯 합니다. 그 전에는 제 병에 대해서 자꾸 판단하고 뭐라고 하면
그 때마다 일일이 다 따지고 덤벼들었었는데 작년부터는 그에 대해서 '모르니까 저러는거다'라고
생각하고 설명을 해드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중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28년 중에서 정말로 의미있는 시기를 꼽으라면 작년인 듯 해요.
 
작년 2월 말에 저희 아버지께서 칠순잔치를 하셨었는데 안산에 있는 뷔페식 레스토랑에 방 하나를
빌려서 했었어요. 그 때 저희 일가 친척들 거의 다 모여서 저희 아버지 생신을 축하해주러 오셨는데
저는 일부러 맨 구석에 앉았습니다. 졸리면 기댈 곳이 필요해서.. ^^;;
저도 나름대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중에 하필 그놈이 왔습니다. 졸음이 온 것이지요. 잠이 오기 전에
먹던 수저를 식탁 위에 놨습니다. 놓자마자 바로 잠이 옵니다.(하.. 놔 진짜...-_-;;)
그런 저를 목격하신 어머니께서 제 옆에 앉아있던 둘째 작은집 동생에게 나 좀 깨우라고 하셨어요.
근데 깨운다고 깨어지나요.. 애초에 병이 그런데.. 그 광경을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봤지요.
그런데 이때 정말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어요. 사실 사소한 것이긴 한데 제 여동생이 그때까지만 해도
저를 너무 싫어해서 지 딸래미(지금 9살짜리 조카)를 저한테 접근시키지도 못하게 했었지요.
근데 제가 조카 손을 잡고 음식을 가져오려고 하니까 여동생이 조카한테 삼촌 손 붙잡고 맛있는거 많이
가져오라고 합니다. 저는 그땐 별 신경을 안썼는데 조카 손 잡고 음식 가지러 가는 중에 딱 촉이
오더라고요. '아.. 얘도 이제 알았구나..'라고 말이지요.
 
그 뒤로 저희 집안 식구들의 저에 대한 오해는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많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동생이 저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바꿨어요. 작년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원수보듯 하다가 갑자기 잘
챙겨주더라고요. 가방 필요하다니까 가방 사주고(Samsonite 백팩), 지갑 필요하다니까 지갑도 잘
사주고(몽블랑 마이스터튁)..
 
사실 제가 동생들한테 미안한 감정이 정말 많았어요. 저 어렸을 때 부모님이 거의 저한테 집중을 많이
하셔서 동생들은 제가 쓰던걸 물려받고 했거든요. 괴와같은 경우도 저 할 때 여동생이 꼽사리 껴서
하는 식이었으니까요. 전 그때만 해도 어머니께서 여동생분까지 계산하시는 줄 알았었지요.
어쨌든 동생들이 절 위해서 좀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철없을 땐 그런 것을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동생들한테 미안한 감정들이 너무 많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여동생에게는 식사
쿠폰이라든가 조카 먹을만한 거 쿠폰 있음 챙겨주고 합니다. 솔직히 여동생이 해주는 거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여동생은 그것마저도 저한테 뭐 이런걸 주려 하냐고.. 본인이나 좀 맛있는거
챙겨먹지.. 이래요.. 그래도 결국은 오빠가 주는 거라고 쓰긴 하더라고요.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뭐 결혼하는 것이 굳이 필수는 아니다라는 생각..? 물론 압니다.
제 자신이 그럴 처지가 못된다는 것을요. 두가지 상반되는 생각이 떠올라요. 뭐.. 결혼이야 물론
하고 싶기는 하다는 생각.. 그리고 다른 생각은 만일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내가 배우자에게 너무
큰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요.
 
사실 글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이 사람들에게 어떤 면으로 보이게 될까? 또한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악플같은 게 많이 달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을 듯 해요. 그냥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일상 자체가 즐거워지는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요. 하시는 모든 일들 꼭 성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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