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펌] 공군의 살아있는 역사에게 군인정신을 묻다 '김신 장군'
게시물ID : military_232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gentag
추천 : 4
조회수 : 158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05 19:08:58

출처는 공군 "공감"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afplay.kr/1092




[월간공군] 공군의 살아있는 역사에게 군인정신을 묻다 '김신 장군'




지난 5월 20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김신 장군님을 만났습니다. 김신 장군님은 백범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로 1922년 태어나셨으며, 중국 공군에 입대해 항일 항공독립운동을 펼치셨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공군으로 6·25 전쟁에 참가하셨고,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제6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내셨습니다.


아들인 김양 前 국가보훈처장과 손자인 김용만 중위까지 3대가 공군에서 복무했으며, 사위인 김호연 前 국회의원과 외손자 김동만 중위도 공군 장교로 복무한 병역 명문가 이기도합니다.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이신 김신 장군님은 올해 아흔이 넘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시간을 넘겨 인터뷰를 자청하실 정도로 열정적이셨습니다. 일제강점기 항공독립운동과 6·25 전쟁에서의 공군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들려주신 김신 장군님께 다시 한 번 고개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지면의 한계로 인터뷰 전문을 싣지 못하는 점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김신 장군님과 함께 떠나는 호국의 오디세이, 지금 출발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 공군이 되다


장군님의 유년기 성장과정과 중국공군에 입대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신 장군 

내가 태어난 곳이 중국 상해야. 그런데 태어난 지 일년 반도 안 되어서 어머님이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조모님이 나를 키우셨지. 그런데 집안 사람들이 독립운동 하다 보니까 생활이 어려워서 중국 고아원도 몇 번 갔다 왔어. 부모님 사랑같은 건 받지도 못하고 자랐어. 그러다가 중국에서도 전쟁(중일전쟁)이 나니까 학교들이 피난을 가는거라. 나라(중국)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었지. 그래서 내가 거기 끼어서 같이 공부했던거야. 그런데 전쟁 때문에 나라가 어려우니까 대학생들이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공부는 하면 뭐하냐’ 하면서 군대에 많이 갔단 말이지. 나도 군대에 가야겠다 마음먹던 차에 어렸을 적 남경에서 보았던 일본 해군 항공대의 융단폭격 하는 장면이 생각이 났어. 그때 결심을 했어. 똑같이 비행기 타고 일본가서 불바다를 만들어 놓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중국 공군에 입대하시고 나서는 어떻게 훈련을 받으셨나요?


김신 장군 

당시에 중국 조종사들은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어. 그런데 미국에 가기 전에 간단한 비행훈련을 인도에 있는 라호르지역에서 했었지. 그때는 자동차도 몇 대 없을 때니까. 비행기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야. 그래서 훈련에 입과하면 절반 이상이 워시 아웃 (중도탈락을 이르는 말)을 당하고 그랬어. 쉬운 과정이 아니었지. 그렇게 기본 훈련을 마치고 나서 인도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 지중해, 대서양을 지나서 뉴욕으로 갔지. 미국에서는 3단계에 걸쳐서 훈련을 받았는데, 완전히 미국 조종사 훈련 코스를 그대로 배우는 거였지. 뭐 미국 교육도 쉬운게 아니야. 이 사람들도 쌍욕을 써가면서 한다고. 갓 뎀, 썬 오브 비치 막 이러면서 말이야. 정말 어려웠지. 인도에서부터 미국까지 세계 일주를 하면서 비행훈련을 받은 셈인거야.









백범 김구 선생께서 조종사의 길을 놓지 않게 하셨다


중국 공군에 입대해 비행훈련을 받는 것에 대해서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김신 장군 

중국 공군에서는 외아들을 안 받아. 외아들은 훈련 중에 그냥 나가라고 하거든. 그만큼 위험하다는 걸 아는거지. 그런데 내가 중국 공군에 있는 동안 형님이 폐병으로 돌아가셨어. 그래서 인도에 있을 때 아버지께 편지를 드렸지.‘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겠다. 내가 공군에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대가 끊기는 것이 아니냐. 해방이 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실 거니까 그때 시중을 들고 하겠다’고 말이지.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께서) 답장이 왔는데 그때 돌아오라고 하셨으면 이 길(조종사의 길)을 걷지 않았을거야. 하시는 말씀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계속 해라. 독립운동이나 군인이나 다 목숨 걸

고 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다음에 대한민국이 건국돼서 나라가 선 다음에도 그런 기술을 배우면 우리나라에 가서도 얼마든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지.







임시정부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혹시 임시 정부에서 주도한 항공독립운동이 있었나요?


김신 장군 

중경에 있을 때 임시정부 명단이 있는데, 거기에 내 명단이 들어가 있어. 신익희 선생이 내무부장이었고, 내가 그 밑에서 일을 했어. 막 고등학교를 마친 무렵이었는데, 당시 나이 많은 임시정부 요원들이 중국말을 잘 못했었거든. 그래서 우리가 보조를 해 드렸지. 모임 있으면 따라가서 통역도 해드리고 그랬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가 중국 공군에 입대를 하게 된 것이지. 중국 공군에도 한국인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입대를 한 것이었어. 그때는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까.






한국 공군으로의 입대, 그리고 L-4 한강 에어쇼


한국 공군에는 언제 입대를 하게 되신 건가요?


김신 장군 

내가 미국에서 1947년 9월에 한국으로 들어왔어. 그리고 그 다음해에 중국 중경에 갔었지. 조모님과 어머님,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모시고 돌아왔다구. 그때 돌아와서 보니까 수색에서 여러사람들이 미국 군대 훈련을 받고 있는거야. 당시에 통의부라는 곳이 미 군정하에 있는 국방부라고 보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 미국 고문관으로 와있던 캡틴 하우스먼이 내게 “왜 아직 (군대에) 가지 않았느냐?”하고 묻는거야. 그래서 중국에 다녀왔다고 했더니,“ 미국에서 훈련을 받지 않았느냐? 증명서가 있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미국에서 훈련받았던 증명서를 보여줬더니 내일부터 소위로 군복입고 나오라고 하더라고. 조금 늦었지만 그렇게 시작된 거지.






L-4 연락기로 한강교 교각 아래를 통과하는 묘기를 선보이셨다는 기록이 있던데요.



김신 장군

 어느날은 여의도 비행장에 나갔더니 미군한테서 L-4 연락기를 받는다는 거야. 태극 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비행을 하는 것이었어. 비행기는 볼품 없었지만,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설움 받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떠오르면서 비록 반쪽이지만 독립의 꿈이 실현되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대한민국 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나는 것이잖아? (교각 아래를 통과한 비행은) 비행기술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좋은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지.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할거야. 그때 기분은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거야. 허허.







6·25 전쟁, F-51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다


6·25 전쟁 당시에 F-51을 타고 첫 출격을 하실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김신 장군 

F-51을 가져오려고 일본으로 간 거야. 거기서 미군에게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일단 언어가 어려움이 있었어. 내가 중간에 서서 통역도 하고 그랬다고. 정말 비장한 심정으로 현해탄을 넘어서 대구기지로 들어왔었지. 훈련도 제대로 못했어 사실은. 비가오고 그래서 말이야. 그런데 다음날인가 7월 3일에 인민군이 도하작전을 하고 있다고 빨리 막아달라고 지원요청이 오는거야. 이건 뭐 안나갈 수가 없는 상황인거야. 가서 보니까 도로가 포장된 것이 별로 없어서 먼지가 엄청 날려서 잘 안보이더라구. 그래서 저공으로 길게 내려가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인하고 와야겠다 하고 내려가봤더니 대공사격이 막 날아오는거야. 정신이 없었지. 그게 첫 출격이야. 안타깝게 희생도 따랐고.

※ 공군은 F-51 무스탕이 처음 출격한 7월 3일을 조종사 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동료조종사들이 순직할 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김신 장군 

(단호하게) 전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희생이 따르는 거야. 물론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애통하지. 그때는 조종사, 정비사 할 것 없이 부대원들이 비행기가 나갔다 돌아올 때 비행기 숫자만 세고 있는 거야. 8대가 나갔다가 6대만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런 날이 있으면 다음날 부대장이 같이 비행을 나갔어.“ 내 비행기 준비해라” 하고 말이야. 그래야만 부하들이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당시에는 천막속에 조종사들이 나란히 잠을 잤기 때문에 더 민감 했거든. 한번은 나도 그런 이유 때문에 비행을 나갔다가 포격을 맞은적이 있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아직 이북 땅인거라. 지금 내리면 포로가 되는거야. 겨우겨우 조종해서 여의도에 내렸지. 그랬더니 강릉에서 난리가 난거야. 부대장 비행기가 안돌아왔다고 말이야. 그때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은 지금 만나도 우의가 넘쳐.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말이야. 생사를 함께한 전우잖아.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김신 장군 

그때는 (미군이) 사실 한국 공군을 깔봤어. 기술도 그렇고 경험도 그렇고 어쩔 수가 없었지. 그런데 미군이 500소티를 했는데도 승호리 철교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그제서야 우리에게 임무를 맡기더라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 ‘대한민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희생이 따르더라도 해야한다‘고 강조를 했어. 여러 회의를 했는데, 낮게 내려갈수록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지. 대공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비행 나가면 조종사들끼리“ 야 우리를 환영하는 포탄이 올라온다” 이럴 정도 였으니까. 그때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을) 귀환한 비행기들 중에는 우리 전투기가 공중에서 투하한

폭발 파편에 날개가 맞은 것들도 있었어. 폭발 파편에 날개가 다시 맞을 정도면 얼마나 낮게 내려갔다는 것이겠어? 대단했었지 정말로.



승호라 철교 폭파작전이란?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은?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1월, 북한군 주요 후방보급로였던 승호리 철교를 폭파한 한국 공군 최초 단독작전이다. 미군이 500소티에 걸쳐 출격했으나 실패했던 임무를 한국공군이 맡아 성공시켜 우리군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공군 장병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김신 장군

 자기 직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서, 임무를 해주었으면 해. 공군 조종사 양성하는데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잖아? 결국은 목숨걸고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거야.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면 안돼. 세대가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거야. 2차 세계대전 중에 중국공군이 인도 비행장을 하나 빌려서 중국공군 군관학교를 세웠었는데. 그러니까 공군 사관학교지. 거기 대문간 양쪽에 쓴 글이 아주 재미나. 한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


貪生怕死 莫入此門

탐 생 파 사 막 입 차 문

- 죽는 것을 무서워 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문을 들어오지 말라. 



다른 한쪽에는 이런 글귀가 있어.


 升官發財 請走他路 승 관 발 재 청 주 타 로 

- 벼슬에 올라가고 돈이나 벌려면 다른 길을 가라. 



다른거 있나. 군인정신이 이거 아니겠나.














 대위 김나청

사진 상사 김경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