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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나는 빨갱이였다.
게시물ID : military_290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로배웠어요
추천 : 21
조회수 : 1514회
댓글수 : 40개
등록시간 : 2013/08/21 13:38:56
1997년 쯤이었던 것 같다.
수요일 오전에, 작전관은 정훈교육을 하겠다며 승조원들을 사병식당으로 불러 모았다.
정훈교육은 주적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작전관과 행정관이 나서서 주적 개념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후텁지근한 사병식당에 오밀조밀 모여 앉은 승조원들은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드디어 영겁 같던 교육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행정관으로부터 마이크를 넘겨 받은 작전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다.

"행정관으로부터 주적 개념에 대해 잘 들었을텐데, 그럼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말 해 볼 사람 있습니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므로 아무나 손 들고 일어서서 "네! 북한입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뜻 손을 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승조원들을 둘러보던 작전관은
어서 빨리 아무나 일어나서 정해진 답변을 하고 끝내라는 듯이 재차 채근을 했다.

"아무도 없습니까?"
"......"
"아무도 없으면 내가 호명을 하겠습니다"
"....."
"글로 하사"
"....???"
"글로 하사 없나?"
"네?"
"일어나서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얘기해봐"
"제가 왜요?"
".... 왜요는... 얼른 말 해봐"
"그러니까... 왜 저한테..."
"질문을 하지 말고 대답을 하라고!!"
"질문이..."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얘기해 보라고!!"

나는 잠깐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그냥 "북한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면 되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직 전쟁 중인 휴전국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대답은 나의 평소 소신에 어긋나는 대답이었다.
내 양심을 속여가며 윗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아닙니다. 북한은 앞으로 통일시대를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동반자이자 한 민족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해양주권과 영토주권을 위협하는 진정한 주적은 일본이나 중국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호시탐탐 독도 영유권을 노리고 있고,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독도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국 또한 우리 기업들의 수출입 항로인 남방항로에서 자신들의 군사적 지배권을 확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은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 고대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국과 일본이 동시에 군사적으로 우리를 압박한다면
우리는 탈출구도 없이 고립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이라는 단기적이고 국지적인 적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적 개념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당연하게도 내 발언이 끝나자 사병식당 안은 쥐 죽은 듯 고요가 흘렀다.
작전관도 많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으며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이내 입을 닫았다.

주임원사가 마이크를 넘겨 받고 나서야 장내는 정리가 됐다.

"네, 글로 하사의 얘기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마시고... 정훈교육을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내 별명은 빨갱이가 됐고, 며칠 동안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집중 상담을 받아야 했다.
한참 후에 안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의견에 동의하고 공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빨갱이로 몰려 진급에 문제가 생길까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때, 조용히 내게 힘을 줬던 전기 선임하사, 작전관, 그리고 함장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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