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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1945. 8. 6. 히로시마.
게시물ID : military_473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GENTAG
추천 : 1
조회수 : 10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8/06 23:21:15


BGM: Sabaton - Nuclear Attack.

Warned, but did not heed.


1945년 8월 6일은 인류가 거주하는 도시를 향한 단 2회의 핵무기 공격 중 첫번째 공격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하의 내용은 리그베다 위키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항목을 발췌한 것입니다.


* 저작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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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하의 동기  ==

원래 미국은 올림픽 작전이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쉽게 생각하던 미국은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처절하게 저항하던 일본군을 맞닥뜨린 후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우선 소련군의 남하도 남하지만 상륙시 너무 많은 피해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핵 두 발로 일본을 항복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 올림픽 작전이 핵탄두 20여 발과 그에 상응하는 독가스까지 사용되는 작전이라 너무나 잔혹하기는 하지만 거듭된 항복 권유를 묵살하고 반자이 어택을 일삼는 일본군의 모습을 치가 떨리게 봐온 미군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결정에는 카미카제도 크게 작용했는데 이를 본 미군은 "도대체 일본인은 어떻게 된 놈들인가?" 라는 식의 연구가 있었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었다. 그리고 핵무기의 경우 이미 대전 전부터 이론적으로 가능했고 전쟁 내내 개발한 신형무기를 사용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실용화되기 전인 1945년 5월에 이미 나치가 항복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의 여론은 한마디로 눈이 뒤집혀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이 항복하고 세계적으로 종전 분위기가 강해진 상태에서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국내에선 일본 본토 상륙으로 큰 희생을 치르느니 기뢰 매설과 해상봉쇄로 그냥 다 굶겨 죽여버리자 는 여론도 해군을 중심으로 매우 강하게 대두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마침 추수철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에 일본의 모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버리는 걸 당연시 할 정도였으니 뭐...

더구나 선전포고도 없이 이뤄졌던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매우 심한 것이어서 히로시마에 대한 핵폭격 당시에도 더 치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투하 전에 사이렌을 울려서 시민들이 하늘을 보게 하고서 터뜨려서 폭발 섬광으로 인한 실명을 최대한 유도, 인명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겠다고 하거나 핵폭격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된 곳에 한 번 더 소이탄 폭격을 감행해서 소방시설이 마비된 상태에서 화재를 일으키면 도시가 완전 전소되리라는 것을 노려서 도시의 흔적도 완전히 사라지게 하자는 과격한 의견이 올라왔다. 당시만 해도 원자폭탄이 히로시마급 도시를 그대로 완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실제로 히로시마는 핵폭격으로 시 전체의 54% 영역만이 직접 피해를 입었다. 물론 폭풍 및 화재로 인한 간접피해까지 계산하면 훨씬 넓은 영역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실전에서의 위력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위의 과격한 주장이 억제된 건 그랬다가 원자폭탄 피해가 다른 피해에 묻히면 원자폭탄의 정치적 상징성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게 비인도적이라거나 무의미한 공격이라든가라서가 아니었다!

사실 원자폭탄의 위력, 특히 방사능으로 인한 2차 위력은 당시에도 몰랐다. 방사능으로 인한 백혈병이나 암 발생 혹은 열선도 당시에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었다. 전쟁 중 및 전후 기록 필름에서 원폭 실험을 한 뒤 군인들이 원폭이 터진 자리에 진입해 자료를 모으고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전후 원폭 지역을 시찰했던 윌프레드 버쳇이 후일 방사능 후유증이 분명한 병에 걸렸음에도 미 군부는 "우연의 일치이다" 라고 했을 정도다.

그래도 원자폭탄을 실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쓰는 건 너무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래서 일본 정부에 사전 경고와 더불어 성층권 정도의 고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려서 위력을 시연해 보이거나 인구밀도가 희박한 마을에 투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의 "성층권에서 거대한 핵불꽃이 터지고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면 과연 일본 지도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라는 의견처럼 효과 자체가 미지수여서 묻혀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고공 폭파시켜서 그 위력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애초에 제정신 박힌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거지 눈 까뒤집고 반자이 돌격이나 해댈 정도로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가는 수준이면 이미 공포심이고 뭐고 생길 틈새조차 남지 않는다. 거기에 당시 그 동네의 사고방식으로 번쩍하고 끝나면 십중팔구는 덴노님의 은총으로 절묘하게 바꿔버리면서 더더욱 자폭 공격에 열을 올렸을 거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든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었던 상황이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성층권에서 핵폭발 일으켰으면 EMP로 도시 직접 피해만 없지 본토 섬 하나가 전력이 완전히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곳을 미리 예고해서 민간인이 대피하게 함으로써 실제 피해는 줄이면서 심리적 효과는 더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 혹시 원자폭탄이 불발되는 경우 차후 미국이 하는 모든 제안이 일본 대본영에게 허세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일본인들이 연합군 포로를 히로시마에 끌어다놓고 인간 방패로 삼으면 어쩔 거냐는 의견도 나와서 기각되었다. 원래 미 육군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독일을 폭격하던 당시 목표가 된 도시에 아군 포로가 있음이 확인됐더라도 거리낌없이 폭격했는데 아군 포로의 희생을 막으려고 폭격을 중단하면 앞서 말했듯이 중요 지점마다 연합국 포로를 묶어놓아서 인간 방패로 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일단 폭격을 당하는 연합국 포로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유명한 소설가인 커트 보네거트는 악명 높은 드레스덴에서 아군의 폭격을 당한 경험으로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썼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히로시마에는 미군 포로가 20여 명 정도 있었다. 전후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그 중 시체가 남아있는 사람은 단 3명. 나머지는 말 그대로 원자폭탄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여명의 눈동자 원작에서는 이런 것을 감안해서 OSS에서 윤여옥을 보내서 포로수용소 위치를 밝히려는 작전을 한다.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까지 히로시마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때까지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이런 도시가 몇 개 있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 코쿠라, 니이가타, 교토였다. 이 중 교토를 제외하고는 바로 원자폭탄의 표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히로시마는 왜 그럴까?' 를 궁금해 하던 어느 날. 아침에 정찰기 3대가 히로시마 상공을 훑어보았고 히로시마에 사는 사람들은 폭격인 줄 알고 급히 대피했다. 물론 피해는 없었고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몇 시간 후 B-29 폭격기 하나가 단독으로 날아왔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늘 오던 기상 정찰용 비행기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대피를 안 했는데...


죽음이 내려왔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리틀 보이는 바람으로 인해,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m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의 600m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의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직접 쳐다본 사람들 중에서는 눈이 멀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수억 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뜨거운 화구가 공중에 생기고,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약 3,000-4,000도가 넘었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삭제되었다. 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이 증발하기 직전에 열선과 방사선으로 인해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은, 현재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뒤이어 열폭풍과 함께 잇따라 충격파로 인하여 최대 초속 340m = 시속 1224km = 음속에 달하는 엄청난 후폭풍이 주변 1.5km 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범위 내에 있던 건물들은 아주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 1발의 폭탄은 히로시마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투하 시간이 사람들의 출근 시간이었기에 피해가 더 컸다. 일례로 폭심지에서 불과 몇백 m 떨어진 은행에서는, 일찍 출근한 말단 여직원 2명을 제외하고 출근 중이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절명했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이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 희생자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나 죽거나 다쳤다.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고군분투했으나 피해상황은 초월적인 어떤 것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제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 만에 죽어갔다.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뼈저린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도시가 도시였던 만큼 군인들도 상당히 많이 죽었다. 7-8만명의 희생자 중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2만 명이나 되었을 정도였으니... 2총군 대부분이 죽었다. 이 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10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생존자들에 의해서 맞아죽었다는 증언도 있고 치료를 거부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 일본의 반응  ==

"이건 원자폭탄이 아니다. 큰 재래식 폭탄이다!"

유례가 없는 참혹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이것이었다. 일본의 물리학자가 히로시마를 본 순간 '원자폭탄' 부터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 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피해 실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상층부가 현실도피&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이 항복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협상은 진행중이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물론 대일 참전을 생각하던 소련으로서는 그걸 들어줄 리가 없었다. 히로시마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강경파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결국 미국은 일정에 따라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 자체가 이미 늦었던 것이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 - 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 - 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은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더구나 8월 9일 회의 중에 2차 핵 투하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지도부는 미국이 더 이상 핵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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