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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폭침 논쟁의 핵심 글에 대한 반론 (1)
게시물ID : military2_20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엽군
추천 : 1
조회수 : 967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7/08/19 05: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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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미사일 관련 연재글 질러놓은지가 어언 2주인데 정리도 못하는 차에 오지랖만 넓어서 여기저기 다 끼어들게됩니다 그려.

회사에서 늦게 퇴근하는 통에 졸음으로 정신줄을 반쯤 놓은 상태이니, 지금부터 시작할 지적질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을 것이 예상되는고로... 오타며 뭐며 중간 중간 삑사리 치는 것은 관대하게 봐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먼저...

 1. 국제정치학적 이유와 2. 국내정치적 이유 이 2가지는 천안함 폭침 논쟁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주제라 생각합니다.

 일단, 지난 수년 간 각 진영의 논리로 여론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NL 쓰레기들과 수구 우꼴들이 자기 진영의 논리를 앞세워 문제의 핵심이 아닌 부수적 문제까지 들쑤신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1항과 2항의 토픽들은 토론주제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하지만, 일단 내놓으신 의견에 대해서 몇 가지 뱀발을 다는 우를 범해보자면.

로마옹이 지적한  1. 국제정치학적 이유에서 간과한 주요 사실이 하나 있어요. 그 것은 2008년 경 발생한 김정일의 건강이상과 김정은의 지도자 수업이었습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399020&ref=A

상기 보도 내용을 준용하자면, 김정일은 2008년 8월에 쓰러져, 11월에 회복한 후 2011년 12월 사망합니다.
2008년은 김정일 건강이상설로 떠들썩할 때였으며, 후계자가 누구로 결정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던 시기입니다.
김정일이 이 때 쓰러지지 않고, 그리고 후계구도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았다면, 로마 아재 이야기가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 때 쓰러졌고, 그 이후 천안함 폭침 있은 2010년 3월까지의 평화는 점차 협상에서 대남 기만으로 돌아선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협상에 있어서도 북한은 다자회담보다 늘 통미봉남 상황 하에서 미국과의 직접 거래를 시도하는 것을 선호하던 쪽이었습니다. 2009년 1월은 대북 대화에 비협조적이던 부시행정부 대신 오바마가 들어온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군사행동을 통해, 통미봉남을 이룰 수 있는 계기라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북한의 공산주의는 주체사상이라는 유교적 공산주의 형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 김정일 같은 윗대 지도자의 주요 발언들을 유훈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언론에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 대략 2008년 경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군부의 신임을 얻기위한 행동들을 합니다. 김정일 접권 과정에 칼기 폭파사건과 아웅산 폭파 사건이 있었습니다. 천안함-연평도로 이어지는 일련의 도발 그리고 장성택 처형까지. 전, 어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해, 김정일이 그린 빅 픽쳐라고 봅니다. 

2. 국내 정치적인 이유는 양보할 수 있습니다. -_- 왜 천안함 보고서를 지방선거에 맞춰서 내야했는지 솔직히 이해 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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