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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안일함이 낳은 최악의 참사.
게시물ID : military2_26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파마늘판타지
추천 : 19
조회수 : 307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11/03 23:53:57


  일본 해군의 텐류급 경순양함 2번함 타츠타 입니다.

  언니인 텐류와 함께 구형함의 한계 내에서 할수 있는 임무들을 묵묵히 수행하던 배로서 한때는 방공 순양함으로의 개장도 논의 되었습니다만 결국 취소 되었습니다.

  가라아게의 변종 요리로 닭고기를 밀가루 대신 전분가루를 입혀 튀겨 내는 타츠타아게가 항해중 밀가루가 떨어진 타츠타에서 밀가루 대신 전분을 써서 튀겨 먹었더니 맛이 일품이라(...) 이후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는 재미있는 설이 있는 배이기도 합니다.

  (타츠타아게는 전분을 써서 그런지 뭔가 양념 안바르고 소금으로 간을 한 깐풍기 같은 느낌이더군요. 탕수육 같기도 하고...)


  치도리급 어뢰정(일본식 표기로는 수뢰정) 3번함 토모즈루 입니다.

  일본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주력함의 건조 톤수가 제한되자 구축함, 어뢰정, 잠수함등을 충실히 하여 대응 하려 했지만 이후 채결된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일본 해군이 강화 하려던 보조함들에게 까지 제약이 걸리고(...) 결국 일본 해군은 조약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600톤 이하의 소형 함정을 구축함 수준으로 무장시켜(...) 전력 강화를 꾀하게 됩니다.

  이런 꼼수를 부리는 과정에서 나온게 바로 이 문제의 치도리급 어뢰정.

  기준 배수량 544톤짜리 소형 어뢰정 주제에 12.7cm 50구경장 2연장포 1문, 동일 구경의 단장포 1문에 53cm 2연장어뢰 발사기가 2기 올라가고 어뢰를 8발 휴대하는 과무장의 끝을 보여주는 물건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애초에 그리 크지도 않은 배수량의 무려 24%가 무장의 무게로 돌려지는 막장 건조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딱 그때쯤 한창 건조중이던 하츠하루급 구축함이 베이스가 된 후부키급 특형 구축함의 경량화 플랜 정도로 건조 되면서 1530톤의 배수량에 12.7Cm 50구경장 연장포 1문에 동일 구경의 단장포 1문, 90식 3연장 61cm어뢰발사기가 3기 올라 갔다는걸 생각 하면 이건 정말 타라고 만든 배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일본 해군 안에도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은 있었던지라 복원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나왔지만, 건조 책임자인 후지모토 키쿠오 소장은 어찌어찌 해군의 ROC에 맞춰 배를 만들어 놓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치도리급에 경순양함 한척을 붙여 수뢰전대로 편성 하는데...

  텐류급 경순양함 2번함 타츠타를 기함으로 치도리급 1번함 치도리, 2번함 마나즈루, 3번함 토모즈루를 편성하여 사세보 경비대 제 21 수뢰전대가 편성 됩니다.

  21 수뢰전대는 1934년 3월 12일 오전 1시 사세보항의 테라지마에서 출항해 치도리, 토모즈루의 순서로 오오타테시마 남쪽 바다로 향해 폭풍우가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기함인 타츠타와 함께 연습전투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만...이거 어째 점점 날씨가 영...

  그날 03시 25분에 결국 훈련은 종료되었고, 타츠타 이하 21 수뢰전대는 사세보로 귀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점점 거세지는 풍랑에 가뜩이나 안정성이 좋지 않았던 치도리급의 특성상 함체가 요동치기 시작 했고, 03시 58분에는 토모즈루의 무선 통신이 침묵하여 발광 신호로 상호간의 연락을 취합니다만...04시 12분에 이르러서는 토모즈루의 발광신호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연히 난리가 났고 타츠타 이하의 다른 함정들이 토모즈루의 실종 지점으로 되돌아가 탐조등을 비추며 토모즈루의 행방을 찾았으나 탐색에 실패합니다.

  07시 45분이 되도록 토모즈루의 행방이 묘연하자 토모즈루가 완전히 실종되었다고 판단 하여 제 1보를 발령, 타츠타에서는 악화된 기상과 점점 높아지는 파도로 인해 탐색이 불가능할것이라고 판단하고는 09시 45분에 임시 정박지에 입항 한 뒤 11시 12분에 재출항 하여 토모즈루의 탐색을 재개 하였습니다. 21 수뢰 전대는 물론이고 사세보 진수부에 소속 되어 있던 여러 함선들 역시 탑재하고 있던 수상기를 날려 탐색을 도왔습니다.

  제 1보 발령 후 7시간 20분 뒤인 14시 05분, 전복된채 표류중인 토모즈루를 발견한 타츠타는 토모즈루를 예항 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중 2명의 생존자가 해수면으로 올라온것이 타츠타에서 관측되었습니다만, 이들은 바로 해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실종됩니다.

  이후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두사람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외부와 접촉하여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나갔지만 해수면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시간을 지체한것이 체력의 한계를 불러와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것으로 밝혀 졌습니다.

  이 두사람은 함내의 생존자들에게 "혹시 내가 잘못된다면 사세보의 우리 가족들을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고...그리고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토모즈루 안에 생존자가 있다는것이 밝혀 졌습니다.

  토모즈루 발견 약 30분 후인 14시 26분, 타츠타가 예항을 시작 했고, 중간에 예항 케이블이 끊어져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다음날인 3월 13일 07시 15분  결국 타츠타는 토모즈루의 예항에 성공하여 무사히 사세보항에 입항 합니다.

  생존자 확인작업을 거친 뒤 선체를 부상시켜 생존자 반응이 있던 제 4병사실로 잠수부가 공기를 보내기 시작 했고 그날 20시 도크에 입거시켜 배수시킨 토모즈루의 선체 하단에 직경 50Cm의 구멍을 뚫고 구조원이 뛰어들어갔습니다.

  구조원은 겹겹이 쌓인 시체 속에서 생존자들을 발견 했고, 갑자기 빛을 보면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눈을 가린채 선체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데 성공 합니다.

  총원 113명 중, 정장 이와세 오쿠이치 소좌(한국군의 소령에 해당) 이하 100명이 사망및 실종되는 처참한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과도한 무장으로 인한 톱 해비, 승조원들의 조함 미숙(그도 그럴게 이따위 과무장에 복원성도 거지같은 배를 능숙하게 모는게 신기한겁니다.), 책상 위에서 계산으로만 책정한 형편없는 복원성 등이 이유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각한 악천후에도 훈련을 강행한 지휘부의 답도 안나오는 훈련 지휘는 덤.-ㅅ-;;;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토모즈루 사건. 일명 우학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본 해군 최악의 훈련 사고중 하나 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해군은 자군이 건조 중이던 모든 함선에 대한 전면적 재설계 및 기존 함선의 개조 작업에 착수 했고, 가뜩이나 빡빡한데 더욱더 등골이 가루납니다. 이 사건으로 큰 죄책감을 느꼈는지 치도리급을 담당했던 후지모토 키쿠오 소장은 자신이 설계한 모든 배들에 대한 재설계 작업에 몰두하던 중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고 불난 집터에서 못줍기에 불과 했지만 그래도 외양간 한번 튼튼하게 고치고 주운 못으로 새 집을 잘 지었는지 이후 악천후에 의한 전복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또 다른 사건이 있는데 말이죠...그건 다음 기회에.

  덤1. 함대 컬렉션이나 벽람항로 같이 배에 인격이 있는 듯한 묘사를 하는 매체들은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정말로 배에 인격이 있다면 타츠타는 진즉에 자살 해 버렸을거라고 생각 합니다.

  토모즈루 사건 이전에도...

  제 43 잠수함 침몰 사건 - 타츠타와 충돌해 침몰한 잠수함이 30미터라는 깊은 수심에 거친 조류까지 더해져 약 1개월 후에 인양 되면서 승조원 45명 전원이 천천히 질식사 한 사건입니다.

  제 43 잠수함의 승조원들은 죽음을 앞두고 달관했는지 1개월여 후 인양된 43 잠수함의 함내에서 발견된 승조원들의 시신은 모두 단정하게 마지막까지 할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함내에서 승조원들의 유서가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제 43 잠수함은 이후 로호 제 25잠수함으로 재취역 했습니다.

  미호노세키 사건 - 무리한 강훈련에 시달리던 해군의 군함들이 일으킨 충돌 사건.

  이때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던 가토 히로하루 대장이란 인간이 "훈련에는 제한이 없다!"라는 명령을 내리며 얼마나 훈련을 막 굴렸냐 하면 그 유명한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소리가 이때 나온 소립니다.

  (저 명령 자체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러일전쟁을 대비해 휴일 없이 훈련을 굴리며 한 말을 인용 한건데, 도고 제독의 경우는 진짜로 수병들 숙련도가 안오르면 X될 상황이었고 미호노세키때 일본은 딱히 전쟁 계획이 없었다는게 함정.-ㅅ-;;;)

  심지어 같은 제목의 군가까지 나왔다고...(...)

 센다이급 경순양함 2번함 진츠, 모미급 구축함 와라비, 센다이급 경순양함 3번함 나카, 모미급 구축함 아시가 충돌한 사건. 같은 훈련장에서 같은 훈련을 뛰다 동시 다발적으로 다중 충돌을 일으켜서 난리가 났습니다.

  와라비는 침몰하여 함장 포함 92명이 사망, 나카는 중파, 아시는 대파되며 28명이 사망하는 초대형 훈련 사고였습니다.

  타츠타 역시 그 훈련에 참가 중이었고 다른 함선들과 함께 충돌한 배들의 승조원들을 구하고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이게 골때리는게 당시 중좌(한국군의 중령에 해당)였던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이 함대의 상태를 본 후 뭔가 일이 터질것을 예감하고는 (그도 그럴게 장교들부터 수병들까지 지친 기색이 역력 했으니...) 훈련에 참가하는 함대의 편제를 재검토 해 줄것을 가토 히로하루 대장과 다카하시 산키치 소장(당시 연합함대 참모장)에게 건의 하였지만 묵살 당했다고 합니다.(...) 에라이...

  (가토 히로하루 대장은 자기 탓 아니라고 발뺌하기 바빴고, 사건의 책임자로 과실치사, 함선 상실 혐의로 기소된 진츠 함장 미즈시로 케이지 대좌는 많은 희생자를 낸 죄책감에 자신의 제자였던 이가라시 메구미 소좌가 이 사건에 희생된것까지 더해 자신이 죽음으로 모든것을 책임지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해군성이 미즈시로 대좌를 소장(한국군의 준장~소장에 해당. 일본군은 장성급이 소, 중, 대장의 3개 계급이었습니다.)으로 추서하려 했지만 유족이 거부 했다는군요.

  가토 대장은 처벌 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 갔다고...-ㅅ-;;;)

  등의 훈련 사고를 목격해 왔고 토모즈루 사건 이후에도 수많은 사고들을 목격해야 했던 괴로운 함생의 주인공이기 때문.

  눈앞에서 사람 하나만 죽어도 몇년동안, 혹은 평생토록 멘탈이 가루나는데 이런 끔찍한 사고들을 수도 없이 봐야 했던 타츠타는 인격이 있었다면 진즉에 목을 매고도 남았을겁니다.

  덤2.


  언니인 텐류는 이후 해상자위대의 훈련지원함 텐류가 그 이름을 이어받아 신입 해상자위관들의 훈련함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배 자체의 용도는 카토리급 연습 순양함을 이어받은 연습함.

  다행히도 이 배는 사람 잡았다는 소리는 안들리더군요.-ㅅ-;;;

  덤3. 이 토모즈루 사건은 당시 한반도에서도 크게 보도 되었는데, 동아일보에서 토모즈루의 실종 당일인 12일 첫 기사가 나오고 13일~15일까지 구조 과정을 보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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