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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Christmas In August, 1998)
게시물ID : movie_699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ynousia
추천 : 0
조회수 : 33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8/19 22: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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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산다.




1.
인간은 왜 사는가? 
고래로 이어진 이 답도 없는 질문을, 필자가 다시 여기서 미적미적 꺼내놓는 까닭은 이 영화가 언죽번죽 이러한 물음을 핵심적으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인간들이 살아내는 다양한 삶들을 변주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산다. 
그렇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산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사는 이유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정답이라면, 왜 지금도 여전히 위의 질문은 질문으로서 계속 부쳐지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 답변 또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 때문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이번엔 거꾸로 뒤집어서, 다시 한 번 다르게 물어보자.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하는가?
어떤가?
인간은 정녕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사랑하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 또한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목적지나 목표를 빛나는 밤하늘에 찍어놓고, 끊임없이 어두운 대기를 가르며 위쪽으로 나아가는 존재일지언정, 거꾸로 그러한 수고로운 등정을 사전에 경감시키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저 위로 빛나는 밤하늘에다 사랑을 찍어 바르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대충 보면 별것 아닌 차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정말 심대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고지순의 사랑, 로맨틱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는 선남선녀에게는 과연 후자의 사랑이 사랑으로나 보이긴 할까? 
설령, 전자를 좋고 권장할 만한 것으로, 후자를 나쁘고 권하지 못할 만한 것으로 어쭙잖게 나눠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인간들이 살아내는 삶 안에서 딱 이분법적으로 나눠지지도 않음을, 또 그러한 가치판단이 확연히 선악이라는 색깔로도 쪼개지지 않음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알고 있는 뭇 사람들에게서조차도, 전자는 후자보다 더욱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사랑이리라는 점을 필자는 의심치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과 삶을 유감없이 던져대는 전자의 사랑이 어떻게 자신의 삶 앞에서 비굴하게 사랑을 내려놓는 후자의 사랑과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2.
하지만 이 영화는 이렇듯 간단한 사랑의 이분법적 도식을 활용하진 않는다.
마치 혈기방장한 젊은이(정열의 크기나 의미의 관점에서)의 사랑과 이미 노쇠해버린 늙은이(마찬가지 관점에서)의 사랑 가운데 절대적 우위를 가진 전자의 사랑만을 취해서 이 영화는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다 보여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절대적 열위를 지닌 후자의 사랑만을 취해서 그 나름 인간 군상이 형상화된 전형적 혹은 독특한 모습이나 의미를 담아내고 있지도 않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확실히 안전한 소재들을 채택한 영화는 지금까지도 무수히 있어왔고, 앞으로도 끝간 데 없이 있을 것이리라.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의 특이한 맛과 색깔이 번져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위의 두 가지 사랑을 사실상 섞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모순, 위기와 시련 등이 매우 불완전하면서도 불편하게 녹지 않고 남아 앙금으로 침전되어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 그러한 불투명한 용액을 불투명한 느낌 그대로 담아 마치, 이것 보게, 여기 사랑은 참으로 불투명하구먼, 하고 담담하게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결코 생명이 아깝지 않을, 그런 전자의 사랑을 이 영화는 전제부터 꺾어내고 있다.
이미 남자 주인공(이하 정원)에겐 사랑의 담보물로서 생명이 올라와 있지 있거나, 혹은 올라와 있더라도, 얼마 있지 않아 꺼지게 될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겐
전자의 사랑이 눈물겹도록 불가능한(혹은 곧 불가능하게 될) 구조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남겨진 생명이란 지폐가 이제 몇 푼 되지도 않는데, 과연 사랑이라는 엄청나게 비싼 물품을 살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남겨진 시공간이라는 껍데기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과연 사랑이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물품을 담을 수 있겠는가?
역시나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당연시하며 언급했던 명제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산다.'- 는 애초에 이런 정원 같은 인간에겐 하등 아무런 쓸데조차 없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을 찾는 후자의 사랑 또한 정원에게 허락되는가?
인간은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만 한다는 실존적 고통 혹은 불안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롭게 되기 위해 누려야 할 권리나 의무로서의 사랑, 바로 그 후자의 사랑이 정원에게도 허락되는가?
하지만 이 또한 정원에겐 불완전하게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그 자신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살아감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랑을 찾을 동기나 유인 효과가 과연 있기나 할 것인가?
또 만에 하나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크기나 강도나 얼마나 클 것이며 강할 것인가?
 
하지만 이는 실제로 전자의 사랑보다는 훨씬 효과적으로 다가오리라는 점 또한 분명해 보인다. 
자의 사랑보다는 후자의 사랑이라는 그 물품이 상대적으로 싸기도 하려니와, 크기 또한 엄청나게 거대하지도 않을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의 사랑과는 달리 후자의 사랑은 그 자신이 가진 생명이라는 푼돈, 딱 그 가치에 합당한 사랑을 고르는 것에 불과하며,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공간이라는 껍데기, 딱 그 크기에 알맞은 사랑을 취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정원이 자신의 생명을 목적으로 삼든지, 도구로 삼든지 간에 정녕 사랑과 엮일 수 있기를 원한다면, 전자보다는 후자의 사랑이 그나마 안전하고 쉽게 다가올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정원은 후자의 사랑, 즉 정열의 강도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 마치 간단한 액세서리나 장난감 고르듯, 사랑을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고르는 사랑,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살아감의 기간 동안만 유효한, 딱 그 기간만을 위해서 필요한 사랑을 (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다인가?
정작 전자의 사랑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후자의 사랑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면, 앞에서 언급한, 이 영화는 단순히 이분법적 사랑 도식을 전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양자를 불완전하게 섞어가며 불편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말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3.
사실, 정원과 여자 주인공(이하 다림)은 몇 번 만나지도 않았다. 
소위 우리 시대 언어로 풀자면, 이네들은 '썸' 조금 타다가 첫 데이트를 끝으로 영영 이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 그네들에게 허락된 시공간은 매우 짧았고 빈약했다. 
간신히 후자의 사랑만 하기에도 벅찬 시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과 불편함 속에서도, 보는 사람 모두 공감하듯, 이 영화는 후자의 사랑뿐만 아니라 전자의 사랑까지 고루 성취해내며, 도리어 서로 화해시키고 승화시키기까지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결국은, 다시 한 번, 시공간이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물리적 몸체의 시공간이 정서적, 심리적 영혼의 시공간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반듯하게 절연되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정원 같은 인간,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에서 이야기 소재로 등장했던 후임병 같은 인간, 그런 인간에겐 더욱더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순간에서 영원을 조각하는 방법을 이 인간들은 정녕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원은 그 형이상학적 방법을 사진이라는 형이하학적 물건 안에다가 아로새겨 놓고, 후임병은 그 형이상학적 방법을 형이하학적 자기의 몸에다가 각인시켜 두었던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라고 한들 그것은 정녕 문제가 될 것이 없는, 문제였다.
육체가 썩어지고 백골이 진토 되더라도, 그네들은 오롯이 죽음을 벗어나는 또 다른 삶의 각인을 각자 삶의 방식을 통해 태깔 곱게 이룩해냈고, 또 그것을 보는 관객들의 마음속에다가도 또 다른 자기만의 삶의 문양으로 새겨놓고 화려하게 비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과연 머가 문제란 말인가? 
정녕 겉으로는 노쇠해버려 곧 죽을 줄 알았던 후자의 사랑 속에다, 번듯한 영원의 생명을 불어넣고 다시금 불사조로 비상하는 이 전자의 사랑, 바로 이 사랑이야말로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산다'라고 되뇌며 고백하게 만드는 힘이 아닌가?
잔잔하고 담담한 이야기, 그에 맞게 따뜻하고 푸근한 영상미, 이러한 요소들로 후자의 사랑을 가장했지만, 실상은 그 안에다 불가능에 가까운 영원성을 유감없이 심어놓은 전자의 사랑, 바로 이 사랑이야말로 더욱더 강력한 감동과 여운을 발휘하게 만드는 힘이 아닌가?


4. 
이제 다시금 그 명제를 톺아보자.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산다.
하지만 이것은 단일한 이것 자체로만 완고한 배타성을 띠고 있지는 않거니와, 따라서 이것은 살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룩될 수 있는 것이며, 또 어떤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왜 꼭 이 명제 하나로만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만 하는가?
후자의 사랑을 통해서 전자의 사랑은 정녕 설명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더라면, 신이 무슨 재미로 인간을 창조하였겠는가?
그러니, 다시금 이 명제는 조금 더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산다. 
인간은 사랑하고, 또 살아가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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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대한 나의 촌평 -
인간 고유의 숙명과 함께 시나브로 이지러지는 한 청춘 남녀 그네들의 사랑 독백이 농밀하고 담백한 시공간을 통해 번져 난다. 고요한 대기 속 활짝 만개한 붉은빛 장미처럼 그렇게 한 살이 아름답게 피워내던 그네들의 사랑, 정말 눈시립도록 애틋하다.


출처 http://blog.naver.com/ha_eun_love/221072677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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