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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후기 (스포주의, 긴글주의)
게시물ID : movie_745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막새
추천 : 9
조회수 : 397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5/19 1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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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ning_01.jpg


버닝 후기
(스포주의)


1. 버닝 : Burning
동명사 불탐 혹은 불타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글을 쓰고 있을테니 영화로 소설쓰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의 워딩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
그가 포크너의 소설 <헛간 방화>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서
목적격 ’헛간’을 지우고 ‘방화’와 ‘태우다’의 중간점 이기도한 동명사 Burning을 택한 점을 주목한다.
그의 영화 중 외래어 <오아시스>를 빼면 모두 한국어이다.
그런 그가 영어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진행형을 표현하는 한국어로는 그럴듯한 제목이 안되서 였을까.
불타는 중. 방화중. 타는 동안. 타는 과정…불태우고 있는
영문명 Buring은 까만머리 외국인 벤과 함께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Burning_02.jpeg
 
2. Little Hunger vs Great Hunger
영화 <버닝>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해미가 아프리카 부시맨에게서 가져온 헝거(Hunger)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Little Hunger와 Great Hunger, 즉 작은 주린 자와 큰 주린 자가 있다.
작은 주린 자는 배만 고프지만 큰 주린 자는 삶이 고프다.
부시맨의 언어가 있을텐데 굳이 영어로 의표되는 상징.
한국영화인 버닝이 Burning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벤의 외제차 포르쉐 앞에서  종수의 한국차 기아 트럭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남산 타워(Tower)의 반사광이 볕 들지 않는 해미의 방을 비춘다.
이제는 ‘남산’의 머리만 남은 ’N Tower’의 남성기같은 형체를 보며 종수는 발기하고 자위한다.
해미와의 정사에서 본 타워의 반사빛.
중학교 때 느닷없이 못 생겼다고 한 종수가 성형으로 예뻐진 해미와 섹스를 한다.
종수가 품은 여자는 해미인가 아니면 그가 꿈꾸던 무엇인가.




Burning_04.jpg

3. 판토마임
오프닝부터 카메라는 종수의 마음처럼 핸드헬드로 흔들린다.
다르덴 형제 이후 수많은 독립영화에서 빠른 촬영 속도의 경제성을
느낌적인 느낌을 핑계로 포장하며 난무한 핸드헬드.
홍경표 촬영감독이 왜 저러나 싶었다.
주인공의 마음이 흔들리니 카메라도 흔들린다.
얼마나 창조적인 1차원적 아이디언가. (비꼼)
하지만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기점으로 핸드헬드는 끝난다.
심지어 해미가 상의탈의로 날개짓하는 노을 샷도 부러 흔들림을 잡는 스태디캠으로 찍었다.
종수는 말한다.
‘사랑한다고 씨발!’
해미가 아프리카로 부재한 순간부터 종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없는 걸 있다고 상상하면 그 맛까지 느껴진다.
마치 해미의 판토마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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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NA
벤이 공항에서 픽업한 종수의 차 안에서 전화통화 중 말한다.
‘그게 DNA에 있다니까. 타고난 거야.’
벤의 부와 무법성, 종수의 가난과 분노조절장애.
최승호 PD가 분한 종수의 아버지는 역사적으로 월남전까지 참전한 충실한 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과 구분된다.
군면제라는 특권, 아니 정확하게는 특권층의 군면제.
넘을 수 없는 경계를 꿈꾸며 해미를 제물로 종수는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떨(대마초)의 의미를 아는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헛소리를 한다.
이 대마초의 메타포도 의미심장하다.
사실 대마초를 불법으로 하는데에는 담배공사의 독점권이 관여한다.
대마초는 ‘마’라는 식물의 거친 생존력 때문에 담배초에 비해 매우 키우기 쉽다.
어떤 이는 담배는 각성제이고 대마는 환각제라서 운전이라도 하면 위험하다는데
그런 논리라면 금주령을 실시하는 게 옳다.
필자의 요지는 대마초가 좋다는 게 아니라 그의 불법성이 온당한가이다.
다시 한번 탈법과 불법에 대해 떠올려 보자.
월남 참전용사의 분노와 군면제의 여유.
법은 과연 누구의 편인가.
항소 포기는 종수 아버지의 저항없는 반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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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욕망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뇌리에 남는 장면 두 개가 오버랩되었다.
저수지를 바라보는 벤과 포르쉐 너머 언덕을 등 뒤에 놓은 종수.
화면 중심이 저수지의 경계에 둔 이 샷은 정확히 해미방에서 글 쓰는 종수의 와이드샷으로 연결된다.
사라진 해미 방에서 종수는 자위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종수는 노트북 화면만에 집중한다.
해미의 방에서 더이상 타워는 언급되지 않는다.
종수의 모습에서 카메라가 빠지면서 펼쳐지는 도심의 와이드샷.
이 샷이 자꾸 저수지 샷과 오버랩되는 것은 와이드샷이라는 공통점인지
아니면 감독과 촬영감독의 의도인지 알 수 없다.
물을 저장한 저수지는 불타지 않을 여유를 상징하는 것일까.
단지 확실한 것은 인간의 역사적 심리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을 욕망하는 인물이 있다는 점.


 
Burning_08.jpg

6. 비닐하우스
벤이 해미를 죽였을거라는 단서는 단 두 개.
경품 손목시계와 ‘보일’ 호명에 반응한 고양이.
그걸 빼고는 벤은 단지 여성 편력이 심한 부자일 뿐이다.
해미는 리틀 헝거가 점점 그뤠잇 헝거로 된다고 했다.
환각의 힘으로 반쯤 태운 채 하늘을 날 던 해미의 나체는
분노의 힘으로 모두 태운 종수의 나체로 끝이 난다.
정작 그뤠잇 헝거는 벤이 아니라 종수였다.
일단 말로는 비닐하우스를 태운 벤.
실제 행동으로 벤과 차를 태운 종수.
엄마의 옷을 태웠다는 종수의 말 뒤로 이어지는 회상씬.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미소짓는 아이는 벤이었을까 종수였을까.
비닐하우스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작물을 재배하는 곳.
집은 집인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불타오른다.



Burning_07.jpg

7. 모두 불타고...
해미나 불명의 여자를 파티에서 보며 하품하던 벤이 그뤠잇 헝거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계층상승을 위해 오늘도 버닝, 열일한다.
하지만 그 손에 쥐어지는 건 돈이 권력이라는 허망한 바램 뿐.
그 주린 영혼을 브랜드로 떡칠한 물질로 메운다.
종수는 송아지를 팔아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구할 수 없다.
불타는 물질 벤과 외제차
불타는 영혼 종수
벌거벗은 몸뚱아리에서는 계층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한낱 인간일 뿐.




 
출처 https://yuminhouse.blog.me/22127940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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