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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기생충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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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본탐
추천 : 8
조회수 : 202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9/06/09 20: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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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와 계급사회]

 

영화를 보는동안 몇몇 장면에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지만 분명 나는 영화 보며 웃고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난 뒤 지하철을 타고 반지하로 향하는 우리로 인해, 또 그걸 지켜보고 냄새를 맡는 누군가로 인해 이 영화의 나머지 조각은 채워진다. 진짜 영화는 시작된다. 그게 우리의 이야기 였음을 너무나도 날카롭게 담아낸 나머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그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삶이었음을 봉준호 감독은 말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있는,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계급에 대한 통렬한 묘사가, 누구도 규정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알고있는 자본주의 계급질서의 실날한 오마주가 마지막 박사장의 심장에 꽂히듯 우리의 심장을 파고들어 영화가 끝난뒤 우리의 정신을 붉은 피로 물들게 한다.

 

 

[자본주의의 극명한 명과암, 처참하도록 날카로운 계급의 대비]

 

장난감 텐트와 비까지 내리는 완벽한 상황에 아들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부모는 그 모습을 흐믓하게 지켜보며 소파위에서 또 하나의 쾌락을 찾는다. 그들은 모르지만 더 낮은 탁자밑에 숨어 자식들과 함께 그 상황을 숨죽여 견뎌내야만 또 다른 더 낮은 사람들의 비참함은 누구의 몫인걸까.

 

장난감텐트로도 막아지는, 파티하기 좋은 맑은 공기를 만들어주는 누군가에겐 선물같은 비는,

똥물이 올라와도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삶을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버려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그저 젖은 신발이 당연한 누군가에겐 내리는 비 한방울 한방울이 날카로울 뿐이다. 누군가에겐 레저와 놀이, 누군가에겐 생존의 외침이 되는 비와 모스부호 이런 메타포가 우리에게 깊이 파고든다.

    

 

 

[저항은 사치인것을, 기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되어버린]

 

기택의 가족과 전 가정부 그리고 그의 남편의 모습에서 특히, 전 가정부가 북한 말투로 장난을 치는 장면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메세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저 지하실이 편하다는 마치 그곳에서 태어난 것 같다는 그의 남편은 자유를 잃었지만 그저 부자가 흘린 부스러기에 만족하는 아니 그를 신으로 경배하는 그 모습에서 사회주의보다 더욱 사회주의같은 지금 우리 자본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에게 저항은 사치이고, 계획은 부질없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는 행위자체가 무의미하다. 생존자체가 전쟁인 삶 일뿐이다. 송강호는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으리라 수 없이 실패했으리라 그 고통을 알기에 자식에게만큼은 그 고통을 주고싶지 않아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는 메세지를 남긴다. 이제는 더이상 이 세상을 바꾸고 싶지도 그럴 필요조차도 못느낀다. 오히려 그들을 동경하고 낮은곳에 그들끼리 싸우고 경쟁한다. 그들끼리 간편한 분노를 주고받을 뿐이다. 그럼에도 진흙속에 꽃이 피듯, 그 아들의 가슴속에서는 반복되는 무의미한 계획과 헛된 희망이 또 다시 피어난다.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말이 어겨진 순간, 그들이 계획을 갖기 시작한 순간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버린 그 순간 그들의 미래는 이미 비극으로 결정되어 버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어지는 선, 우리가 모르는 사이 겨눠지는 칼날]

 

 

이 영화에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썩은 무말랭이 냄새가 싫은, 행주 삶는 냄새가 싫은, 지하철 냄새가 싫은, 그런 사람의 냄새가 불쾌한 사람들이 등장할 뿐이고, 그런 냄새를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할 뿐이다.

 

그들은 많은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선을 넘지 않기만을 바라지만, 그 선은 과연 누가 규정한 선일걸까. 빨아도 없앨 수 없는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그 냄새는 그렇게 선을 넘고 만다. 불가항력이라 울부짖어도 그들에겐 불쾌한 선을 넘었을 뿐이다. 하지만 결국 그 냄새는 가난한 자들의 역린이 되어 높이있는자들에게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과연 봉준호가 의도한 냄새는 진정 후각적인 냄새였을까, 가정부와 운전기사에게선 맡을수 있지만, 명문대 과외선생님들에게선 맡을 수 없던 그 냄새는 진정 후각만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냄새였을까. 나와 비슷한 선 안에 존재하는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선 맡을 수 없지만, 그저 나와 다른 또 다른 존재로 규정되는 그들에게서 만큼은 불쾌하게 지독한 그 냄새가 난다고 느낀건 아닐까. 누구도 선을 긋지도, 누구도 칼을 겨누지도 않는것 같은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들이 행해지고 있다.

 

 

 

[현실을 넘어선 현실, 우리의 진짜 이야기]

 

 

반지하 그리고 그보다 더 낮은곳에서 그들만 알 수 있는 모스부호가 울려퍼진다. 이미 우리의 삶 곳곳에서 목놓아 소리치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우리의 가장들과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그 신호를 알면서도 외면하는 높은 곳의 몇몇 사람들, 알면서도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아니 할 수 있는게 없는 낮은 사람들, 절실한 모스부호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그저 고장난 전등의 불빛이 되서 매일밤 의미없이 부서져버리고 만다.

 

 송강호가 튕겨버린 그 곱등이는 그의 아내가 비유한 바퀴벌레는 그들 자신이 아니었을까, 높은 곳의 진짜 집주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 집에 불이 켜지는 순간, 인간이지만 바퀴벌레가 되어버린 그들은 또 다시 낮은자세로 몰래숨어 그들의 진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니 도망가야만 했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와 다르게 관객들 저마다의 웃음 포인트가 다르다. 아마 다름 웃음포인트 그 숫자만큼 그들의 냄새또한 다를것이리라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자신의 냄새는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고 영화를 볼 수록 헷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똥물이 올라오고 빗물로 집이 가득차버린 송강호의 가족들을 보고 내심 안도했을 것이다. 내가 저정도는 아니니까, 저런 삶까지는 아니니까, 하지만 높은곳에 그들이 불쾌한 냄새로 "지하철 냄새"를 언급하는 순간 우리가 어느곳에 이입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그 뒤로 우리는 더이상 웃을수 없게 된다. 기득권이 보기엔 그저 자신들과 다른 기생충의 냄새, 하층민의 냄새, 지울래야 지울수 없는 우리의 냄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사장 이선균에 이입된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악의가 없다. 아주 젠틀하다.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자신은 모르는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인식들이 드러남으로 인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칼날이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게 된다. 이런 심장을 파고드는 칼날의 공포는 박사장에 이입한 또다른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렇게 봉준호 감독은 조금은 잔인하게도 영화를 보여 웃고있던 우리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응, 네 얘기야" 지하철을 타는 네 얘기이고, 자신도 모르는 선을 긋다 심장으로 칼이 파고드는 네 얘기라고.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누구의 잘못인 걸까, 누구의 책임인 걸까, 영화에 악인은 존재하지 않지만 정부와 사회라는 시스템이 그 냄새를 온전히 맡을 수 있어야함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더 이상 투쟁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되어버린]

 

 

봉준호 감독의 과거 작품들을 보면 투쟁의 역사가 보인다. "괴물"에서 보여준 국가와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 "설국열차"에서 직설적으로 보여준 계급체계의 전복, "옥자"에서 보여준 자본주의에 대한 어린 소녀의 도전과 저항. 하지만 이제 더이상 저항도 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체제를 바꾸려는 시스템을 뒤엎으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체제는 몇몇의 작은 저항으로 절대 무너지지 않는것이라는 것을 인정해버린듯, 아니 어쩌면 그 체제라는 숙주가 있기에 우리가 그곳에 기생하며 생존할 수 있다는, 결국 우리 역시 그 체제를 그 체제의 부조리를 바라고 있었다는 반문을 제시하고 있다.

 

가정부라는 그 사람 고유의 인격이 인정받기 보단, 가정부라는 수단자체에 집중하는 그 자리를 메울 또 다른 가정부를 찾으면 그만인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하여, 체제의 전복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더 깊은 고민과 대안이 필요하다고 봉준호 감독이 이전의 작품들 보다 더 어렵고 더 풀기힘든 숙제를 우리와 사회에 던지고 있다.

 

우리가 숙주인지 기생충인지 그 누구도 규정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선을 긋지 않았지만 그 선을 긋고 있는건 기생충인 그들 스스로가 아니었을까, 우리 스스로가 아니었을까. 



출처: https://insight-amplifier.tistory.com/100 [영감증폭기, Insight Amplif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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