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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머리속 들려오는 목소리
게시물ID : panic_1002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른이의꿈
추천 : 13
조회수 : 152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9/05/21 18: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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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머리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울음으로 목이 잠긴 듯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 



아..!

약 먹는 것을 깜빡했다.

식탁 위의 약병을 집어들었다. 



조현병 초기 증상이라 했다.

의사는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마음의 병이 아님을 강조했다.

나이를 먹으며 뇌 기능에 이상에 생긴 것이 이유라 설명했다.

50이 넘어 갱년기가 시작되고 호르몬 분비가 변하며 생길 수 있는 증상이라고. 

일찍 병원을 찾아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약을 처방 받았다.



약을 복용하고 한 달여.

증상이 많이 좋아졌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빈도 역시 줄었다.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약처방을 조금 바꾸었다며 새로운 약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설명이 끝나고 혹시 궁금한 것이 있냐는 의사의 물음에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누구일까요?"

당황한 듯 의사의 양 눈썹이 올라갔다. 

순간 멍청한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머리속 목소리의 주인을 왜 의사가 안다고 생각했을까?

의사가 입을 열었다.

"음... 글쎄요... 환청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새로운 약을 먹으면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더욱 궁금해졌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답답했다.

아는 사람인 듯하면서도 곰곰히 생각하면 처음 듣는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일까?



==
퇴근 길 편의점에 들렀다.

만원에 수입맥주 4캔.

약 때문에 한동안 술을 못마셨다.

증상도 많이 좋아졌고, 맥주 정도는 괜찮겠지.

집에 도착해서 치킨 한마리를 배달 주문했다. 

샤워를 하고 맥주를 한 캔 땄다. 

얼근히 취기가 오르며 배가 불러온다.

치킨 상자를 정리하며 남은 치킨 조각을 용기에 담았다.

냉장고를 열며 식탁 한쪽 구석에 놓인 약병이 보였다.

오늘 저녁은 약을 건너뛰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하나 더 꺼냈다. 



오랜만이었다.

이토록 취하도록 마신게... 

맥주 4캔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

내일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 있을까?

손을 뻗어 전화기를 찾았다.

전화기의 알람을 맞춰놓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을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환청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알딸딸한 취기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대답했다.

"물론 돌아가고 싶지... 그때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대답과 함께 잠이 들었고, 

나는 꿈을 꾸었다.

그때로 돌아가는 꿈.



젊은 모습의 은우.

은우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목이 메여 하던 말을 잇지 못했다.

울컥거리는 울음을 뱉어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은우는 이해한다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의 반대를 거스르고 결혼을 밀어부칠 수도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고, 

전세로 구한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어서 따로 신혼집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은우 역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등지고 내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은우와 헤어지고, 헤어짐의 아픔으로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었다.

오랜시간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어머니, 모두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20여년의 시간 동안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고 후회했다.



==
마법처럼... 정말 마법처럼 그날로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생생한 꿈이라 생각했다.

은우와 헤어지는 날의 악몽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취에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오피스텔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의 머리칼, 그녀의 입술, 그리고 그녀의 몸.

20여년을 그리워하던 그녀였다. 



다음날 이른 새벽.

눈을 떴을 때 고개를 돌려 옆에 잠들어있는 은우를 확인했다.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왔구나!

잠든 은우의 이마에 입을 맟추고 속삭였다.

다시는 너를 놓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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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끝내 결혼식에 오지 않으셨다.



지난삶 은우와 헤어지고 어머니를 무척 원망했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연락이 뜸해졌고,

나중에는 명절에도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어머니의 죽음.

빈말이라도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한마디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은우와 헤어지기 전으로 돌아와서 은우 다음으로 찾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보고 싶었던 어머니.

나를 보자마자 끼니는 챙겨먹고 다니느냐며 잔소리부터 시작하는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나의 시간으로 꼭 10년만이었다.



이번에는 어머니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잠깐 은우를 만나는 것 조차 거절하셨다.

결혼식이 끝나고 장모님이 나를 불렀다.

어머니가 오시지 않아 서운하다 하셨다. 

그리고 은우가 걱정된다며 은우와 어머니 사이에서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당부하셨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표현은 완곡했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어머니가 은우에게 상처주지 않게 하라는 말이었다. 



그날 결혼식 피로연이 끝날 무렵...

은우가 그녀의 친구를 배웅하며 한 말을 나는 우연히 들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시어머니가 결혼식에 올까봐 걱정했다고...



==
은우는 눈매가 나를 꼭 닮은 딸 아이를 출산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계절이 채 바뀌기 전이었다.

사실 결혼식 당시 은우는 배가 제법 나온 상태였다.



결혼을 준비하며 은우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

출산 예정일을 듣고 잠깐 셈을 해보았다.

은우와 헤어지기 직전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 은우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다.



지난삶.

은우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은우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때... 우리 딸은 어떻게 되었던 걸까?



==
산후조리원에 들어가는 날.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축하한다는 어머니의 말에 눈물이 핑돌았다.

길지 않았던 대화.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잠 푹 자두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전화를 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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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얻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만...

아내와 나는 좋은 엄마 아빠가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출산 후 우울증으로 긴 시간 힘들어했던 아내.

그리고 예민했던 아내를 따뜻하게 감싸줄 여유가 없었던 나.

힘든 시간을 보내며 아내와 나는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시간은 흘러 힘들었던 날들은 이제 지난 이야기가 되었지만, 

아내와 나 사이의 깊어진 골은 메워지지 않았다. 



비록 좋은 부모는 아니었지만 나와 아내, 모두 딸에 대한 애착은 깊었다.

끝없는 불화와 싸움 속에서 끝내 갈라서지 못했던 것은 딸 때문이었다.

자식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같이 산다는 말.

꼭 우리를 두고 있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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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딸 아이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취방을 얻어 집을 나왔다.

아내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의사확인서를 구청에 제출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은우와 나는 결국 이렇게 되는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은우와 헤어지던 시간으로 되돌아갔던 그때...

그때 나는 옳은 선택을 했던 것일까?

만약에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녀와 헤어지고 한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는 삶을 택할까?

아니면 그녀를 늘 옆에 두고 서로 미워하며 반목하는 삶을 선택해야 할까?

옅은 웃음이 얼굴에 스쳐갔다.



대학생이긴 했지만 딸은 아직 미성년자였다.

이혼 서류에 딸의 양육권자를 정해야 했다.

딸에게 물었고, 딸은 아빠인 나를 선택했다.



딸과 아내, 둘은 서로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가 엄마로서 딸에게 큰 실수나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딸은 자라면서 사사건건 엄마와 부딪쳤고,

특별한 이유 없이 엄마에게 적대감을 보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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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하고 나는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하나 구해 집에서 나왔다.

이사를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이 침침해지고 두통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오피스텔에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통이 심해졌고, 

손발이 저리고 구토 증세까지 더해졌다.



동네의 작은 의원을 찾았고, 정밀 검진을 받으라며 나를 대학병원으로 보냈다.

검진 결과 머리 속 암세포가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단층 촬영 결과를 보여주며 암세포와 일반세포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했다.

무슨 말이냐는 나의 물음에 의사는 수술을 통해 암세포를 절개하는 것이 어렵다 말했다. 

의사는 몇가지 치료법과 함께 각각의 치료에 따른 부작용, 그리고 성공 확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의사의 긴 설명이 끝나고 나는 물었다.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의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두 번의 삶을 살았다.

삶에 미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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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딸은 매주 주말이면 내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하루는 딸이 나에게 물었다.

혹시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고.



내가 가지고 있던 작은 바램 하나.

딸의 손을 잡고 딸의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빈 허공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네 남자친구 얼굴 한번 보는 게 이 애비 마지막 소원이야."

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없는 남자친구를 지금이라도 만들어와야 할까봐."



시력을 잃은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

발작이 찾아오는 빈도 역시 점점 빨라졌다.

뇌종양을 진단했던 의사가 알려주었던 삶의 기한 역시 이미 많이 지나있었다.

오늘 발작이 일어나 심장이 멈춘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발작성 경련이 지나가고 의식이 돌아오면...

내가 죽었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시력을 잃어 눈앞은 암흑이었고,

특히 주위에 아무 소리 마저 나지 않을 때면 내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작은 소리라도 찾기 위해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의대생 자원봉사자가 내게 말해주었다.

사망에 이른 후에도 한동안 청각이 살아있을 수 있다고.

그래서 소리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숨을 깊게 들어마시고 호흡을 느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
어느 이른 아침.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화장품 냄새가 느껴졌다.

이혼한 아내였다.

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뜨겁게 사랑했고, 

20년을 넘게 미워했던 사람.

그리고 마지막에는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하나까지 혐오스러웠던 사람.

솔직히 나는 아직 마음 속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마 아내 역시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 정도는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문이 열린 후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그렇게 서있지 말고 들어와."



아내와의 마지막 만남은 길지 않았다.

이렇게 아픈지 몰랐다는 말.

와줘서 고맙다는 말.

그리고 알았다는 대답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지난삶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미안하다는 말과 이해한다는 대답.


==
그날 저녁 딸이 병실을 찾았다.

엄마에게 말했냐는 나의 물음에 딸은 대답이 없었다.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을 딸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했다. 마지막 인사하고 나니까 이제 정말 끝이구나 싶어서 속이 다 시원하더라."

딸이 말했다.

"엄마랑 아빠, 두 사람 볼 때마다 참 궁금해.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기도 쉽지 않은데... 언제부터 그렇게 싸우기 시작한거야?"

연애하던 시절부터 많이 싸웠다는 나의 대답에 딸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결혼을 했느나고.

"글쎄... 알 수 없는 신기한 일이 있었어. 정말 믿을 수 없는 신기한 일이었지..."

딸은 궁금한 목소리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나는 아내와 헤어지기 직전으로 돌아와 삶을 반복한 이야기를 딸에게 해주었다.

딸은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딸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딸이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딸이 물었다.

지금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그리고 돌아가면 다시 엄마와 결혼을 하겠느냐고.

딸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순간 두통이 시작되었다.

두통은 이내 발작과 경련으로 바뀌었고, 

딸은 간호사를 찾기 위해 급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밀려오는 통증으로 의식이 흐려졌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숨을 들어마시려 했다.

하지만 숨을 쉴 수 없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몸뚱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암흑.

그 암흑 속에 나의 의식이 갇혀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암흑의 공간 속에 나의 의식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두려웠다.



순간 암흑 속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리고 울음으로 목이 잠긴 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다시 태어나도 아빠 딸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흐려지는 의식의 끝자락.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가서 은우를 다시 잡을 것이라고.

그래야 우리 딸을 만날 수 있을테니까.



<머리속 들려오는 목소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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