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무명씨의 이름
게시물ID : panic_1010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0
조회수 : 130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01/14 13:17:42
옵션
  • 창작글

무명씨의 이름


전사

그는 자신의 마약 중독이 이율배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육신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정신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약물을 쓴다는 사실은 전투적인 유물론자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지극히 유물론적인 접근법이라고 확신했다. 그 활성화된 정신으로 다시 육신의 절정을 이끌어낸다 한들 육신을 자극하여 육신을 고양시켰을 뿐, 육신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육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의 존재를 믿지도 증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그는 가상현실 헬멧을 쓰고 인터넷에 접속하였다. 현재의 컴퓨터와 네트웍의 기술적 한계 때문이겠지만, 가상현실의 현실성은 마약으로 완성된다는 '가현' 인터넷의 전설을 그는 믿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의 수많은 바둑판 모양 뒷골목, 그 가운데에서도 사방이 고층건물로 막혀 일년 내내 하루 종일 해 한번 비치지 않는 저층 하숙집의 옥탑방이 순식간에 천사의 도시 속 유리성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마침내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에 젖어들었다. 열탕과 냉탕 사이를 널뛰기 하고 칠흑과 어스름 사이를 오가는 옥탑방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숨도 못쉴 만큼 답답해지곤 했던 터였다. 죽음 이후 천당과 지옥 이야기는 전혀 믿지 않았지만, 만약 지옥과 천당이 존재한다면 가현 인터넷 접속 전후의 옥탑방 같으리라고 상상해 볼뿐이었다.

일단 그는 자신의 사이버 공간을 둘러보았다. 무단 침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지상 1층 지하 100층의 구조로 건설되어 있는 그 가상 공간은 그가 처음 그 공간에 들어가기 시작한 다섯 살 무렵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꾸며온 구조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상 1층으로 시작한 그의 사이버 공간은 처음에는 평면적으로 확장되었다가 가현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하기 시작하던, 즉 마약을 가상현실 증폭기로 쓰기 시작한 십대 중반부터는 지하로 한층 한층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한시도 떼지 않았던 스마트 안경, 뇌파 감지기 등을 통해 그의 모든 기억과 추억, 오감 정보, 심지어 그가 거쳐오거나 그를 거쳐간 문자 정보까지, 하여간 인생의 모든 기록이 어떤 형태로든 낱낱이 저장되었다. 그의 뇌 또는 마음과 그 내용물들을 그 가상 공간에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그 가상 공간은 그의 마음 속에 무수한 기억의 바이트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기억의 바벨탑, 화석이란 메모리칩이 무수히 박혀 있는 기억의 지층을 파내려간 고고학자의 지하낙원 같았다.

1층에서 시작해서 지하 100층까지 내려가면서 층마다 돌아보았다. 마치 평생의 일기장을 엄지손가락에 걸어 주르륵 훑어보는 느낌이랄까.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기억과 기록들은 대부분 2차원 이미지와 3차원 홀로그램으로 형상화되어, 바닥뿐만 아니라 사면과 천정까지 전시공간으로 쓰는 무중력 박물관식으로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평생을 아주 짧은 시간에 복기할 수 있었다.

그 대목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몸이 분자와 원자 수준으로 흩어져 버리고 나면, 이 가상 공간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과연 유물론자인가. 태어나서 죽어가는, 천신만고 끝에 조립되어 생겨나고 결국 분해되고 사라지는 육신이 바로 나 자신인가.

하지만, 마약에 취한 그의 정신은 그와 같은 철학적인 사고에 맞지 않는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지하 100층까지 내려간 그는 지난밤 그가 자고 있는 동안 추가된 어제의 기억방으로 가서 편집을 시작했다. 평면적인 정보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매킨토시 128케이'에 갈무리되었고, 입체적인 정보들은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시간 순서대로 기억의 소인국을 이루었다. 편집은 쉬웠다. 해당 부분에 편집 모드로 접속하여 기억을 더듬어 구체적으로 떠올리기만 하면 나머지는 자동이었다.

다시 1층으로 올라온 그는 문을 열고 나서 광장으로 나갔다. 혼자만의 사적 공간에서 빠져나와 백억의 인간들과 접속되는 공적 공간으로 들어선 것이다. 전투적인 무신론자, 과학-이성-논리 지상주의자 '무무'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광장에는 그처럼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으로 나온 아바타들로 흘러넘치는 중이었다. 가장 쉽게 건설할 수 있는 가상현실은 바로 현실 세계를 그대로 베낀, 현실 세계를 사이버 공간으로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가현 세계였다. 일단 설계비가 따로 들지 않아서 좋았고, 아바타들은 익숙한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가상현실 속 세상에서 건축을 비롯한 공공재의 디자인 취향은 극도로 보수적이었다. 아바타들의 입성도 대부분 전통 의상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어느 한 전통 한 나라의 옷이 가현 세계 전체의 진정한 대세가 되는 경우는 없었고, 영화에나 나올 변형된 전통 의상을 입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사 무무가 전투를 벌이는 곳도 가현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광장, 어느 카페, 여느 만남의 상황이었다. 넓은 광장에는 한 무더기씩 아바타들이 둘러서서 목청을 높이는 광경이 흔했다. 토론의 주제는 종교와 과학, 철학, 정치, 경제, 예술 등으로 끝이 없었다. 무무는 그 가운데 가장 논쟁적이고 뜨거운 주제인 종교와 과학 토론에서 유명한 전사였다. 그의 동지들은 벌써 어느 종교 토론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무무는 그 유명한 별들의 전쟁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그 전투의 한 가운데로 곧장 뛰어들었다. 무기는 광선검 대신 대상을 가리지 않는 세 척 남짓의 삿대질과 독 묻힌 비도처럼 상대를 원격 타격할 수 있는 세 치 혀였다.

무무의 패거리들은 자신들을 과학지상주의자들로 자리매김했는데, 자신들끼리 모여서 과학지상주의를 토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투적인 무신론자로 살짝 비틀어 주로 종교 토론장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쳐들어가는 게 일이었다. 그들은 비과학적이고 시대착오적이며 혹세무민하는 종교는 박멸해야 하는 해충이라고 확신하는, 다분히 종교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만 모르는 사실이었다.

무무의 현란한 광선검과 독비도 초식이 끝난 때는 그의 신진대사 시스템과 피에서 마약 성분이 잦아든 시점이었다. 무무는 오늘도 무지몽매에 빠지려는 세상을 건져냈다는 뿌듯함을 안고 가현 인터넷을 빠져 나왔다. 가상현실 인터페이스 의자에 누운 채 헬멧 속에서 눈을 뜬 그는 그새 피로해진 몸과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안마의자 기능을 켰다.

기억궁

"당신이 오감으로 감지하는 모든 자극들 그리고 당신 자신이라는 자의식까지도 실체가 없다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무무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어제 토론에서 한 참석자가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그의 두개골 안에서 다시 메아리쳤다. 온갖 일들이 다 벌어지는 가현 인터넷이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과 사물들은 평면이든 입체든 빛이나 전자의 흐름으로 근사된 허상일 뿐 당연하게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홀로그램인 가현 인터넷 속에서 종교와 과학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육신의 죽음이 정녕 존재의 끝이라면 육신의 정수라고 해야 할 뇌가 죽는 치매에 걸린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겠지요. 치매 걸린 무신론자의 전투는 어떤 형태를 띠는가요?"

토론 상대자는 가사 한 자락 가볍게 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입술조차 달싹이는 듯 마는 듯 목소리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변사도 없는 무성영화 같은 초식이라 그는 광선검과 독비도를 어떻게 놀려야 할지 손발이 어지럽기만 했다.

치매. 정말 무서웠다. 죽음과 함께 자신의 육신과 정신이 동시에 원자와 분자 수준으로 해체되고 대자연의 지수화풍에 스며들어 아예 형체를 남기지 않는다면 그건 괜찮았다. 어차피 볼만한 대상도 그것을 지켜볼 주체도 없어지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육신은 멀쩡한 채 정신만 파괴된다면 그건 몹시 당황스러운 그림이었다. '정신은 육신과는 별개'라는 느낌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육신은 멀쩡한데 정신만 죽을 수 있다면, 반대로 육신은 죽었는데 정신만 멀쩡한 상태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육신의 일부인 뇌가 망가져서 정신이 따라서 망가지는 과정이란 설명이 더 과학적이었지만, 과학지상주의자 무무의 마음마저도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정과 느낌에 더 강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자신의 검과 도를 무력화시켰던 가사 차림의 고수가 암시한 대로 현실, 실체, 의식이 양파 껍질처럼 계속 벗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가 느끼는 불편함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하루 일을 끝마친 그는 가현 엘에이서 현실 속 엘에이로 나왔다. 두개골 안에서만 빛나던 형광빛 태양 대신 망막과 얼굴로 캘리포니아의 햇빛을 직접 받는 느낌은 남달랐다. 그가 하숙집 옥탑방에서 거리와 연결되는 일층으로 내려오는 일도 드문 마당에 사면을 막아선 깎아지른 듯 우뚝한 고층빌딩의 포위를 벗어나는 일은 그야말로 일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었다.

누구든 텅빈 우주공간에서 단독자로 사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매일 매일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서 다른 사람들과 근거리 접촉, 심지어 악수하는 축축한 손바닥, 정전기 튀기며 스치는 옷깃, 코와 입을 드나들며 찝찝하게 뒤섞이는 숨결과 입냄새로 만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일상의 삶을 위해 세상과 무무 사이에서 일어나야 하는 소통의 두 가지 형식, 물질과 정보 가운데 정보의 입출력은 가현 인터넷으로 충분하다 못해 홍수가 날 지경이고, 물질의 입출력은 택배와 쓰레기통 그리고 상하수도관을 통해 훌륭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그가 슬리퍼를 운동화로 바꿔 신고 하숙집 현관을 나서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던 터였다.

거의 일년 만의 외출이었지만, 골목길을 빠져 나와 윌셔대로에서 서쪽으로 꺾어 여전히 쨍쨍한 가을 저녁의 노란 빛깔 햇살을 전신 전면에 받으며 버몬트소로에서 시작해 열 대여섯의 소로와 대로들과의 교차로를 건너는 이십여 분 남짓 나들이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가현 인터넷 속 가상현실 윌셔대로와 똑같았고 차도를 달리는 차량의 물결과 인도를 오가는 인파는 오히려 가상현실에 비해 그 규모가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차도는 대부분 택배 트럭들이 차지하였고 인도는 기후마저 온화하기 짝이 없는 가상현실 속 기상도가 지겨워서 잠깐만이라도 진짜 바람을 쐬고자 7년만에 외출한 기상학자처럼 서쪽에서 불어와 작은 소용돌이로 코끝에 살랑거리는 바람 속에서 바다라도 찾으려는 듯 킁킁거리는 사람들뿐이었다. 휴지 한 조각 흩날리지 않는 거리는 무무의 기억 속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는데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신도심에 상권을 모두 빼앗겨버린 구도심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삼분의 일 정도는 아마도 병원에 가서 서로 만날 환자와 의사들일 거야. 아무리 택배가 무인자동차와 드론으로 지상전과 공중전을 입체적으로 결합했다 한들, 병원을 택배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환자를 택배로 부친다면 모를까. 너만 해도 제 발로 찾아온 환자라고 해야 하겠지."

대학병원에서 신경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무무의 삼촌, 무유의 말은 그럴 듯했다. 병원이 들어선 고층빌딩의 중간쯤에 위치한 무유의 사무실에서는 석양이 내려앉은 엘에이 시가지가 지평선까지 뻗어나가고 있었다. 새하얗게 칠한 사무실 벽은 무척 비현실적이어서 삼촌의 말이 그의 마음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너 같은 젊은이가 치매를 걱정한다니, 무슨 구체적인 증상이라도 있었더냐?"

"그런 건 아니구요. 겉으로 멀쩡해보이면서 정신이 나간 상태를 상상하기도 싫은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치매를 예방하거나 치매에 걸리더라도 치료할 수 있는 확실한 치료법 같은 거. 그 가능성이라도 알아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의학적으로 확실한 방법은 아직 없다고 봐야겠지. 오히려 컴퓨터공학자로서 너의 전공에 가까운 해결법을 찾아보는 게 어때? 안 그래도 지난 뇌과학 학회에서 발표된 어느 연구가 꽤 재미있던데. 멈춰버린 심장에 전기충격을 가해 다시 뛰게 만드는 제세동기와 같은 장치를 뇌에도 심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블루 스크린이 뜬 컴퓨터를 다시 부팅하는 뇌 스위치를 달거나, 치매로 망가진 기억을 되살려주는 하드디스크나 데이터베이스 바이오칩을 심는다? 그게 가능할까요. 뇌도 컴퓨터 같은 정보처리장치이긴 하지만, 그 복잡도는 하늘과 땅 차이일 텐데."

"뇌에 조직적인 자극을 주면 치매 예방과 같은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두 사람은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뇌의 언어 영역과 오감 영역에 자극을 주는 뇌제세동기 같은 장치의 설계 제작이 목표였다. 첫번째 임상실험 대상은 프로젝트의 제안자이기도 한 의욕에 넘치는 무무가 될 예정이었다.

식물인간

무무가 쓰러진 곳은 가현 인터넷 속 무유의 사무실, 결국엔 현실 속 옥탑방이었다. 그들은 공동연구를 위해 하루에 한번씩 만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시간에 무유 삼촌의 눈 앞에서 무무의 아바타가 의식을 잃었다. 말이 씨가 되었다기보다 가능한 응급상황에 대한 시기적절한 사고실험대로 무무를 옥탑방에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나른 장비는 바로 응급환자수송용 드론이었다.

마약 과다투여가 원인이었다. 치매에 대한 공포와 막바지에 달한 연구에 대한 조바심과 중압감에 못 이겨 결국 사고를 낸 탓이었다. 무무는 어처구니 없게도 먼 미래의 치매를 피하려다가 지금 당장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생명유지장치의 도움 없이 살아있을 순 있었지만 전투적인 무신론자, 죽음을 절대무로의 환원으로 이해하는 철저한 유물론자, 이성과 논리의 여백을 인정하지 않는 고고한 과학지상주의자로서 본인의 입장에서는 어리석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유신론자/무물론자들의 지옥보다 더한 치욕에 빠지고 만 처지가 되었다.

"몸은 마비되어 눈꺼풀 하나 열고닫을 수 없어도 뇌만 정상이면 가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장치, 그건 쉽지. 이미 다 개발되어 있기도 하고.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 뇌를 정상 작동 상태로 끌어내서 최소한 가상현실 속 몸인 아바타와 합체하여 완전체를 만들수 있을까, 이게 문제이지."

무유 자신이 무무에게 말했던 딱 그 문제 상황에 봉착한 순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설계가 거의 끝난 뇌제세동기를 하루빨리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는 것 뿐이었다.

"기억은 의식의 한켠에 쌓아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추억의 파편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의 필수 구성요소이지. 기억이 없어지면 순간만을 인식하는 의식은 부싯돌에서 튀는 찰나의 불꽃 같다고나 할까. 기억의 뼈대, 기억의 궁전이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배화신전의 불꽃처럼."

무유의 제안에 무무는 그 자신의 모든 기억의 하부구조가 되는 핵심 기억들을 뽑아내 바이오칩으로 구웠다. 또 무유의 말대로 기억은 언어 영역뿐만 아니라 감정과 오감 영역에도 걸쳐 있는 복합적인 구조를 갖춘 4차원 데이터베이스 같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쳐 경험하고 형성해 온 감정과 오감의 기억까지도 낱낱이 찾아내고 풀어내어 바이오칩에 굽는 작업도 병행했다. 특히나 그 영역의 작업을 할 때 무무는 마약에 더 의지했던 모양이었다. 심지에서 타오르는 불꽃에서 심지가 없어져도 그대로 타오를 수 있는 불꽃을 채화하여 갈무리하는 작업은 무신론적 유물론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끝없이 의심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육신을 초월해서도 지속될 기억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육신은 마비시키고 정신은 활성화해야 했기 때문에 마약은 정교한 기억 적출 수술을 위한 마취제로서 필수였던 셈이다.

식물인간이 된 무무와 무무를 일깨우려는 무유가 맞닥뜨린 싸움의 상대는 시간과 행운만이 아니었다. 또다른 막강한 싸움 상대는 바로 돈이었다. 무무의 치료는 무유의 연구 주제가 되었지만, 대학병원의 시설을 이용해야 하는 연구에는 막대한 돈이 들었다. 무무와의 공동 연구가 시작될 때 확보한 연구 기금은 급속도로 소진되어가고 있어서 돌파구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 무렵 뇌제세동기로 작동할 기억궁 바이오칩 시제품 두 개가 완성되었다. 무무에게 이식하기 전에 뇌제세동기가 무무의 면역체계에 거부반응 없이 적응하는지, 뇌의 생체전기회로와의 접속 전위와 임피던스가 적절한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뇌제세동기 바이오칩이 완성된다 해도 곧바로 이식할 수는 없겠지요? 운영체제가 다른 두 컴퓨터를 연결하는 데에도 네트웍의 구성을 위한 별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에어가 필요한데, 뇌라는 생체 컴퓨터를 전자 컴퓨터들로 이루어진 가현 인터넷에 접속하자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뇌와 컴퓨터의 접속은 지구인과 외계인의 만남 정도에 비교할 수 있을까. 문제는 짧은 시간 안에 접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뇌 쪽에서보다는 컴퓨터 쪽에서, 우리의 경우 뇌제세동기 바이오칩 쪽에서 뇌의 입출력 패턴을 읽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입출력 패턴을 맞추어가야 하겠지. 그러니까 그 대목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 뇌 프로그래밍보다는 아무래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더 쉬울 테니까."

뇌제세동기는, 컴퓨터에 꽂히자마자 컴퓨터에 맞게 드라이버 프로그램을 깔고 그 길로 컴퓨터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스마트 주변기기처럼, 뇌에 물리자마자 뇌파의 패턴을 분석하고 그에 맞게 자신의 내장 드라이버 프로그램을 최적화하여 거부반응이나 방화벽을 유발하지 않는 상태에서 뇌의 일부로서 매끄럽게 작동해야 했다. 다행히 무무는 식물인간이 되기 전에 그 설계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해 놓았다. 그렇다고 이식 전 정상작동 여부를 검사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동굴

작동검사를 마친 바이오칩이 두개골에 이식되고 나무가 땅속으로 뿌리를 뻗어내리듯 바이오칩 리드 선이 두개골 조직을 파고들어 뇌막에 촉수를 박을 때까지 일주일 내내, 무무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이오칩과 무무의 뇌가 전자적으로 접촉하자마자 바이오칩과 연결되어 있는 무유의 컴퓨터 화면에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는데, 그 일주일간의 악몽은 짧은 첫 잡음 신호로 기록되었다. 물론 무무 자신 말고는 그 잡음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 수는 없었다. 몸을 빼낼 수 없는 진흙 같고 칠흑 같은 확률의 바다에 잠긴 채 존재의 해면 아래에서 가능성으로만 떠돌던 식물인간 무무는 그렇게 뇌제세동기 바이오칩이란 첫 관찰자를 얻음으로써 딱 일주일만에 의식을 존재의 수면 위로 건져올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브라운 운동 중인 꽃가루의 악몽에서 빠져나왔지만 무무의 의식은 끊임없이 맴도는 작은 소용돌이에 갇혀 여전히 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육신의 오감으로부터 신호가 끊긴 상태에서 그의 의식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무한 맴돌이 아니면 정처없는 흐름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또렷한 오감 자극이 없어지면서 돛도 닻도 풀린 배처럼 동력과 북극성을 상실하고 물의 흐름에 실려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무무는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외부로부터 별빛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는 암흑성운 한 가운데에서 떠도는, 육지라고는 작은 섬 하나 없는 외톨이 물의 행성, 그리고 그 행성의 칠흑같은 망망한 바다 위에 떠도는 유일한 부유물인 나무토막이 바로 식물인간 무무의 의식 상태였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흔들리는 파도밖에는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외계는 없었고 안팎의 구분이 없어져버려 자신의 내면은 규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한 부유 중간중간에 찾아오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나락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은 주체를 특정할 수 없는 서술문처럼 다가왔다. 정신과의 접속이 끊겨버린 육신, 그 육신의 지수화풍을 기반으로 하여 작동하는 오감이 해체되고 있는 과정을 머나먼 안드로메다의 암흑성운을 떠도는 무무의 정신이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육신을 상실한 무무의 정신은 일종의 블루 스크린에 빠져 있었다. 그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 상태가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무유가 보기에, 식물인간이 된 무무는 공회전하고 있는 의식까지 죽어버리는 뇌사에 빠지면 끝이었다. 더 이상 되살릴 가망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자체적으로 몸의 생명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뇌간이 살아있는 식물인간일 때 어떻게든 되살려내야 했다.

두개골에 바이오칩을 심어 저승 어귀인 안드로메다의 암흑성운을 떠돌던 무무의 의식을 일단 이승 입구인 은하계까지 끌어내린 무유 덕분에, 무무는 자신이 평생 구축한 자기 내면의 매트릭스인 마음 속을 꿈의 형식을 빌어 떠돌고 있었다. 아직 지구와는 한참 먼 태양계의 끝 명왕성 근처 우주공간을 헤매고 있는 격이었다.

뇌사

무유가 국립과학재단에 제출한 연구 제안서는 거절되었다. 무무의 두개골에 심은 뇌제세동기 바이오칩에 대한 추적 연구도 포기한 채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작성해서 보낸 제안서였기 때문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블루 스크린에 빠진 컴퓨터를 재부팅하지 않고 정상작동 상태로 유도해내듯, 식물인간의 뇌 일깨우기뿐만 아니라 치매예방과 치료에 직접 관련되는 연구이기에 대중적으로도 각광 받는 연구 주제인데다가 찾기 힘든 맞춤한 연구 대상이 이미 대기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연구 제안서가 거절된 결과는 무무의 업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투적인 무신론/유물론 전사로서 무무는 가현 인터넷 상에서 숱한 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하드 사이언스 빼고는, 심리학이나 인류학 같은 소프트 사이언스는 과학으로도 치지 않는 그의 강경하고 딱딱하며 천박하기까지 한 유물론은 물리학자나 화학자들 사이에서도 적을 만들 정도로 턱없이 편협했던 탓이다.

"식물인간이라면 더 이상 살아있다 할 수 없을 것."

"뇌사는 육신이라는 정교한 화분에 피어났던 정신이라는 한 떨기 꽃이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본인의 관점에서 이미 죽은 그를 되살린다는 것은 무신론자를 두번 죽이는 셈."

국립과학재단의 연구 제안서 거절 뉴스에 달린 냉소적인 댓글들 대부분은 실은 무무 자신이 남들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었다. 무무와 그의 패거리들은 가현 인터넷 곳곳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서 모두 까기를 반이성 박멸이라 외치며 반이성을 완성하고 다녔던 터였다.

무무는 다시 옥탑방으로 되돌아왔다. 환자수송용 드론을 타고 병원에서 옥탑방까지 비행함으로써 무유의 연구비는 바닥이 마침내 났다. 무무를 옥탑방 안 침대에 눕히고 나서 묵직한 저음으로 떠올라 점으로 사라지는 드론을 따라 서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식물인간이든 아니든 환자를 무료로 그냥 맡겨둘 수 있는 병원이나 세상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무무의 간호는 무유 혼자만의 일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무무가 퇴원하기 전에 무유는 환자용 특수 침대를 병원으로부터 임대해올 수 있었다. 거동할 수 없는 환자를 먹이고 씻기고 대소변을 처리해주는 로봇 침대였다.

무무의 두개골에 심어진 뇌제세동기 바이오칩은 더 이상 시험가동하지 않았다. 옥탑방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백 퍼센트 가동을 시작했다. 뇌제세동기를 통해 나오는 뇌파의 곡선이야말로 무무로부터 나오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가상현실과 온라인의 세상이었지만 의사로서의 일이란 게 가현 인터넷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에 무유는 무무의 옥탑방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다행히 바이오칩은 온라인으로 실시간 접속이 가능했지만, 컴퓨터 화면을 스물 네 시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무무의 바이오칩과 직접 접속되는 초전도 양자간섭기를 아예 머리띠 삼아 두르고 다녔다. 무무의 의식 상태를 흐릿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있는 무무의 뇌를 그저 미세하게 둔탁한 두통으로 무유는 느낄 수 있었다. 한참 일하는 도중, 전혀 상관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무무의 생각이 나거나 심지어 교통사고로 죽은 지 이십 년도 넘는 무무의 부모, 곧 그의 형 부부,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부작용도 있었다. 생사를 오가는 조카에 대한 연민이 초전도 양자간섭기를 통해 기본자극으로 증폭됨에 따라 그는 하나밖에 없는 조카 무무와 형 부부와 부모님과 묘한 생사를 넘어선 일체감을 문득문득 체험하곤 했다.

간호사가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에도 무유는 자신도 형도 어렸을 적, 부모님과의 행복한 한 때가 생생하게 떠올라 일찌기 체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턱을 받친 채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무유의 모습에 간호사는 적잖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 무슨 일이죠?"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간호사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처음 보는 인물로, 무려 황색 가사 차림의 스님이었다. 무유는 순간적으로 긴장하였다. 무무의 적이 나타난 셈이기 때문이었다.

"무시주의 극락왕생을 빌어드리러 왔습니다."

뇌 제세동기

마약에 만신창이가 된 몸의 추락은 일단 멈췄는데도 마음은 추락을 멈추지 못했고, 무의식 상태가 계속되면서 마음의 밑받침을 상실한 몸은 더 추락하는 악순환 끝에 무무는 마침내 뇌사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난데없는 강렬한 희열을 느꼈던 그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무의 뇌에서 오는 신호가 더 미묘한 신호로 바뀐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약하고 둔탁한 느낌의 두통이 미열과 미묘한 편두통으로 바뀌었다.

"스님께선 어떻게 아시고.."

"가현 인터넷 광장에서 자주 만난 사이 아니겠습니까. 무시주의 상태는 방송을 통해 잘 알고 있었을 뿐, 제게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갑자기 한번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공교롭게도 중요한 순간에 오게 되었군요. 저와의 인연도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과거생에 부모자식으로 한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니.."

티벳 스님의 웅얼거리는 낮은 목소리의 대답은 전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무무가 죽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강렬한 희열과 함께 느꼈던 일체감이 한순간에 슬픔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유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슴 한 켠이 아련하게 저리기 시작했다.

"저를 무시주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스님은 반응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선 채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무유의 소매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병원 앞에서 무인 택시를 타고 절반쯤 비어 있는 윌셔 길을 달려 10분도 되지 않아서 무무의 옥탑방에 올라갈 수 있었다. 무유에게 무무의 겉 모습은 평소와 다른 점이 별로 없었다. 무의식의 표정과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져서 힘없이 꺾여 있는 손목의 각도까지 똑같아 보였다.

무유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무무에게로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스님은 말렸다. 그때서야 지금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은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는 의사로서의 냉철한 판단이 나왔다. 그는 대신 컴퓨터로 무무의 뇌제세동기 바이오칩에 접속하여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무무의 일생의 기록들과 기억들, 그리고 추억들을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무무의 뇌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몸을 휘청거렸다. 초전도 양자간섭기를 통해 그 정보가 자신의 뇌로도 흘러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충격이 그의 정신에 가해지고 있었다. 육신이 아니라 정신에 시술하는 심폐소생술, 그것이었다. 멀쩡한 그의 의식에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의 폭탄 때문에 그는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휘감고 있는 초전도 양자간섭기를 벗으려 했지만, 어깨 위까지 힘겹게 들어올린 그의 두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손가락을 가늘게 떨기만 했다.

"아미타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스님이 불호을 외웠다. 그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무시주! 괜찮아요?"

물론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스님은 장시 망설이다가 다짜고짜로 무유의 머리에서 머리띠를 벗겨내버렸다. 그 순간 무유의 손가락이 떨림을 멈추었고 뒤이어 두 팔이 툭 하고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무유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이나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괜찮아요?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스님의 걱정스런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무유가 마침내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들고 힘겹게 일어나 무무가 누워 있는 침대 맡 의자에 가 앉았다. 스님도 뒤따라 침대맡에 서서 무무를 내려다 보았다. 무무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머리띠가 뭔가요?"

스님은 아직 손에 들고 있는 초전도 양자간섭기를 내려다 보고 나서 무유를 쳐다보았다.

무유의 설명을 다 들은 스님은 창가로 걸어가 옥탑방을 둘러싸고 있는 고층빌딩의 회색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머리띠를 제가 써봐도 될까요?"

잠시 후, 침대 맡으로 돌아온 스님이 무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

스님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딱딱한 나무 의자 위에 반가부좌를 틀고 무무의 머리쪽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리고 나서 초전도 양자간섭기 머리띠를 이마에 둘렀다. 그 모습이 전설 속 손오공을 닮았다고 무유는 한가한 생각을 했다.

스님은 침대에 달려 있는 쪽책상 위에 펼쳐 놓은 옆으로 길쭉한 두툼한 종이 조각 묶음을 한 장씩 넘겨가며 읽기 시작했다. 티벳 사자의 서, 죽은 이들을 위한 저승길 여행 안내서였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현재로선 아무 것도 없는 상황. 그 티벳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초전도 양자간섭기를 통해 무무의 뇌에 접속하고 저승길을 안내한다. 뇌사에 빠진, 실질적으로 죽은 자에게, 생명유지 장치가 붙지 않는 이상 곧 죽게 되어있는 사람에게 말이다. 원래 스님의 제안은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은 무무에게 죽은이를 위한 책 읽어주기였다. 신경외과 의사인 무유에게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조카가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터에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음과 정성을 모아 반사적으로 두 손을 모으거나, 하다 못해 자신을 둘러싼 이 우주 자체 또는 무무와 자신의 운명에 대고 하소연이라도 길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도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좋았다.

"저승길 여행 안내서라고는 하지만 일단 무의식으로 빠져들고 있는 그를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저승으로든 이승으로든 인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존재하든 안 하든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를 만한 그 무엇이 언제 육신을 떠나거나, (유물론자들이 정 원한다면) 그 무엇의 물질적 기반이 언제 육신에서 무너져내리고 소멸되는지 의사들의 현대 의학, 첨단 의술로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 잘 압니다. 그 체계 안에서 무엇을 살아있다고 또 무엇을 죽어있다고 부르는지. 그렇지만 아무리 정교한 기계 장치라도, 심지어 가장 예민한 시각을 자극하는 광학 장치에도 해상도라는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해상도 너머에 존재할 그 가능성까지 그토록 용감하게 무시합니까. 그거야말로 문제의 초기조건, 제약조건, 전제를 뒤집어 엎는 반과학적 태도 아닌가요."

스님이 무무의 옥탑방에 오기 전 병원에서 무유에게 했던 말이다.

"스님 말씀대로 우리의 오감과 이성에 어떤 해상도가 존재한다면 과학자들도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오히려 확신에 찬 종교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들은 다른 현미경을 들여다 본다는 걸까요?"

"이를 테면 영혼불멸설을 봅시다. 유신론자들도 자신들의 연구에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고 편하게 생각해줘도 좋습니다. 소위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은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어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 우주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우주의 법칙 또는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인정하기, 이는 과학자들만의 미덕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그 우주의 섭리를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속단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죠."

"저승길 안내서.. 아무래도 저로서는 가설치고는 너무 멀리 나간 가설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드네요. 한 톨의 증거도 없이 쌓아올린 거대한 모래성 같은 느낌이랄까요."

무무의 뇌사라는 황망한 상황에서도 무유는 어느새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가상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가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입자인 전자의 천변만화하는 흐름을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백년 전 현실 세계 사람들에겐 어떻게 보일까요. 그들 역시 가현 인터넷 속 일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 증거라고는 단 한 비트도 찾지 못하겠지요. 알고 보면 너도 나도 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모두 각자 구축한 사적인 가상현실을 공적인 현실로 확신하는 맹신이 있을 뿐. 이승도 저승도 일종의 가상현실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가상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요. 가상현실과 현실은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상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한 순간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스님의 온화한 태도에 대해 무유는 안심하고 있었다. 가현 인터넷 광장에서 무무와는 적대 진영에 속했다고는 하지만, 무무에 대한 그 어떠한 악의나 적의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생의 부모자식이 현재생에서 재회한다는 것도, 나노 스케일까지 촘촘한 인과율이라는 엄정한 우주의 섭리가 일면 거칠고 나름 복잡하고 고차원인 인간세로 투영되고 편집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무에서 삼라만상을 만들어낸 빅뱅이 가능했다면 그 어떤 게 불가능하겠는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변하면서 '불가능'이라는 최종 딱지를 붙일 수는 없었다. 그런 거대한 결론은 신 또는 인간적 지성이나 이성의 외삽 극한에 놓인 미지의 존재의 몫이니까.

"미지의 영역은 미지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일단 그 앞에서 겸손하자는 게 미신일까요."

스님의 '티벳 사자의 서' 독경은 계속되었다. 무무가 옥탑방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시작한 독경은 한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무무는 최소한 생명유지장치를 단 채 여전히 저승과 이승 사이에 머물고 있었다.

무유는 스님과 함께 오랫만에 옥탑방을 나와 윌셔길을 서쪽으로 달려 바닷가로 나갔다. 비좁은 옥탑방에서 향을 피우고 하루 스무 시간씩 독경하는 스님을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저 수행의 일부라고 했지만, 그 초인적인 모습에 무유는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다. 하루 한 두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할 수 있을 때마다 그도 스님 곁에서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독경을 들으며 명상과 호흡법 수행을 따라하곤 했다.

"무시주의 현재 상태를 의사로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해변을 걸으며 스님이 무유에게 물었다. 눈부신 11월의 태양, 여전히 따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무유는 생각해봤다. 뇌사 상태로 몇년씩 가는 사례에 비추어볼 때 무무의 현 상태는 별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정말 최소한의 생명유지장치만으로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흔치 않은, 의료계의 작은 기적이라 할만 했다.

"뇌사 상태인 것은 맞지만 매우 안정적입니다. 흔치 않은 경우이지요. 스님께서 보시기에 무무의 상태는 어떤가요?"

"아직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인 중음계에 머물고 있을 겁니다. 원래 육신까지 죽은 상태에서도 49일 동안 그 세계에 머문다고 하지요. 무시주의 경우, 육신 자체는 지수화풍으로 아직 분해된 것은 아니라, 중음계에 못 미치는 무의식에 빠져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무의식에서 빠져나와 중음계를 통해 저승으로 가든, 이승으로 되돌아오든 해야겠는데 걱정입니다. 저승 입구에서 맴도는 영혼 또는 중음계라는 에너지 양자 우물에 빠져 무한 진동하고 있는 에너지 덩어리,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말이죠."

"무무는 무의식 안에서 자의식이라 부를 만한 걸 조금이라도 느끼고 있을까요? 뇌과학 입장에서 무무는 자의식은 고사하고 무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조차 갖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블루 스크린에 빠진 컴퓨터처럼 뇌 안에서 튀는 전기 불꽃은 전무하고 따라서 뇌 안팎으로의 정보 흐름도 완전히 멈춘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설'에 따르면 무시주가 말씀하신 그런 무의식도 있긴 하지만,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경우에도 인간의 영혼은 결코 잠들거나 사라지지 않는 초월의식인 참나의 영역이 있어 인간의 오감과 이성이 빠져 있는 무의식 그 자체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하지요. 보통 의식과는 주파수를 달리하는 에너지 흐름으로서 초월의식 쯤이 되겠지요."

그들은 한인타운으로 되돌아와 정갈한 채식전문 밥집을 찾았다.

"사자의 서 독경을 녹음으로 대체하면 어떨까요."

"사십구재까지는 지금처럼 하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렇게 하시지요."

"사십구재 이후에는 독경은 녹음으로 하고 뇌제세동기 바이오칩도 최대 출력을 유지하면서 초전도 양자간섭기는 제가 머리에 쓰고 다닐 생각입니다. 바이오칩으로부터 양자간섭기로의 과도한 입력을 제한해야겠지만요."

스님의 경우 뇌제세동기 바이오칩으로부터의 입력되는 기억과 오감 자극 정보를 그대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무무와 많은 기억을 공유하는 무유의 경우에는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현실, 실체와 환영, 삶과 죽음.. 참 어려운 문제라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네요. 무무를 위해 스스로 찾아와 주신 것도 고맙지만, 많은 가르침, 특히 고맙습니다."

옥탑방으로 올라가면서 무유가 말했다.

"실은 모두 허상이란 사실을 인정하거나 알기는 쉬워도 온 존재를 통해 느끼기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지요. 바닷가에서 보았던 석양빛도 얼굴을 간질이던 해풍도 발을 적시던 파도도 나의 뇌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직접 닿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아차려보기는 하는데도요. 나 자신을 포함한 온 우주가 나의 마음 또는 나의 뇌가 만들어낸 정교하기 짝이 없는 가상현실이란 말이 아마도 맞을 겁니다."

뇌사를 기준으로 한 사십구재. 임의의 시간일 수 있었지만, 무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뇌사 상태에서 빠져 나온 날이었다. 여전히 식물인간 상태였지만 생명유지장치를 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유는 기뻤다.

'사자의 서'를 바랑에 챙긴 스님이 옥탑방 문 앞에 섰다.

"무무에게 사자의 서 독경이 효험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 못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무시주에게도 절대절명의 시간에 부를 이름 하나는 있어야 했겠지요. 아무 것도 도움도 위로도 안 되는 상황, 마지막 순간에 부를 수 있는 이름 하나. 그 이름은 내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대상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내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 들어온 이상, 그 상황에서는 이미 쓸모 없는 것으로 판명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마지막 이름이 실체가 있든 환영에 불과하든지 간에."

스님은 인자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