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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재
게시물ID : panic_1010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2
조회수 : 230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20/01/17 12: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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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사십구재”



시제

그만하면 천지신명이 내린 빼어난 풍수를 인간이 제대로 망가뜨린 현장이라 할 만하다. 좌청룡 우백호 뚜렷한 산과 멀리 유려하게 굽이쳐 흐르는 강이 동서로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는 배산과 임수 사이에 콘크리트로 만든 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곧게 내달리고 있다. 산에는 깊은 골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소슬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강에는 수만 년을 두고 강물이 소리없이 흘러가는 동안 고속도로에는 덤프트럭과 대형버스, 승용차와 같은 커다란 쇳덩이들이 굉음과 매연을 내며 종잡을 수 없이 잠시도 쉬지 않고 오르내리고 있다. 산은 구산이요 강은 보성강으로 유구한데 정겹기만 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산자락에서 자못 유장한 그 흐름을 잠시 멈추고 서 있다. 오늘은 우리 집안 시제 모시는 날이다.

"저 놈의 고속도로가 흉물이여."

한지에 세필로 써내려간 제문을 읽어 바치고 불로 태우고 난 제주가 무리를 이끌고 절을 올린 다음 꼬마 아이들이 샛노란 유자 서로 차지하겠다고 티격태격하는 사이 아버지는 두 아들을 이끌고 석주 옆으로 물러나와 강쪽으로 막 뒤돌아선 참이다. 멀리 비래봉과 깃대봉이 우뚝하지만 강 한쪽에 오똑한 오래된 정자 반구정을 감돌아 흐르는 강이 수천 년 동안 크고 작은 홍수로 터 닦은 너른 벌판은 시원하다. 일년에 한번씩 보는 풍경이 정겹다.

"우리 선산, 풍수를 어지럽힌단 말이여."

아버지는 선 자리에서 삼백 년 전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 내력을 단숨에 훑는다. 들을 때마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익숙한 묘한 기분을 주는 조상님들의 함자들이 주르륵 나열된다. 그렇게 동생과 나는 족보의 존재를 재확인하고 아버지는 평생의 기억을 한번 더 벼린다. 나무를 깎아 모양을 만들고 두껍게 옻칠한, 젯상에 오른 제기들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른다. 제사상 진설법은 그 한 벌의 제기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리라. 아버지는 이제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제기보다 더 오래되어 보인다. 구부정한 상체와 가느다란 하체가 헐렁한 옷 안에서 상자에 담긴 제기처럼 달그락 거리는 느낌까지 든다. 하지만 풀과 이끼가 절반씩인 땅에 지팡이 끝을 박아넣고 선 아버지의 자세는 흩날리는 옷깃에 바위 같은 안정감을 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바람소리에도 흩어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끼가 잔뜩 끼어 분간도 힘든 비석을 잘도 읽어내려간다. 청나라 옛 황제들의 연호가 나오고 조선의 벼슬 이름이 나온다. 묘는 시대에 따라 산 위에서 산 아래로 흘러 내려오고 있다. 시간도 산꼭대기 바위 위에서 굴러떨어진 돌멩이처럼 산 위에서 산 아래로 흐르는 것인가. 아버지의 자리는 어디이고, 내 자리는 또 어디쯤이란 말인가. 나는 비문의 중간쯤에서 길을 잃고 엉뚱한 상상을 한다.

"십대조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떤 용모들을 갖고 계셨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그러게요. 그때에도 사진이란 게 있어서 요즘 족보처럼 사진까지 넣었다면 참 좋을 텐데."

내 말에 동생이 맞장구를 친다. 손가락을 짚어가며 비문을 해설하고 있던 아버지가 눈도 돌리지 않고 대꾸한다.

"그게 뭐 그리 어렵더냐. 이따가 집에 가거들랑 거울 들여다 보면 될 걸 가지고. 너희 애들 얼굴 보든지."

동생과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아버지의 등뒤에 선 채 서로를 마주 본다. 기발한 발상이란 생각에 나는 눈앞에 있는 동생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십대 조부모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정말 그렇겠네요, 아버지!"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 정말 대단하시네!"

동생과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조상, 선산, 풍수, 족보와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하던 아버지가 과거, 현재, 미래를 그렇게 단번에 꿰뚫을 줄이야.

"요즘 사람들 유전공학이다 뭐다 잘난 척 다 하면서 천상천하 자기들만 잘난 줄 아는데, 너희 증조부모님께도 '동귀일체 향아설위'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느니라. 모르는 게 없다는 최첨단 세대인 너희가 그런 사실을 오히려 모르고 있었다니 놀랄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겠느냐."

숙부와 사촌형은 벌써 축대 아래에 있는 구대 조부모 쌍묘 앞에 진설하고 있다. 동생과 나는 아버지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축대를 돌아 내려간다. 축대에 박혀 있는 수박만한 돌덩이들이 얼룩덜룩 하다 못해 시커멓게 보이는 이끼에 덮여 있었다. 저 이끼는 저 바위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저 자리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고 계절과 사람이 오가는 것을 보며 얼마나 많은 빗물을 마시고 또 얼마나 잦은 가뭄을 견뎠을까.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형제

"두 사람이 공동연구를 시작한다고요?"

동생과 사촌형에게 물었다. 시제는 끝이 나고 갈 사람들은 다 산을 내려갔다. 산기슭 할머니의 묘 앞에서 아버지와 숙부, 사촌형, 동생과 함께 퇴주잔 모은 걸 마시는 중이다. 늦가을 하늘은 높고 아직 싸늘해지기 전이라 뱃속에 들어간 막걸리가 온몸을 훈훈하게 달구고 있는데 마침 비춰든 저녁놀에 아버지의 얼굴이 홍조를 띠고 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세대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내 연구비 떨어져가는 것을 동생이 어떻게 알고 말이야. 고마운 일이지."

말술인 사촌형은 막걸리 몇 잔에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다. 사촌형은 입체인쇄술 전문가이고 동생은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 전문가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동연구 거리가 없을 듯한데 용케 찾은 모양이다.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의 장점은 감도가 뛰어나다는 건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거든. 그렇게 얻은 극미세계의 정보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분석하고 가공하여 결과를 내느냐가 관건인 상황에서 입체인쇄술은 어쨌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결과물을 찍어낼 수 있으니까."

"동생의 입력 장치와 나의 출력 장치를 덧붙이면 지금까지 아무도 들여다 보지 못한 극미세계를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는 중이야."

동생과 사촌형이 말이다.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로 읽고 입체인쇄술로 쓴다. 극미세계 크기로 섬세하게 영감을 받고 우리에게 유의미한 지금여기란 무대, 일상의 크기에서 우리의 오감으로 현실화한 조각 작품을 만들겠다는 거로군요. 조각가의 마음 속에 들어있던 원형이 조각가의 두 눈을 통해 조각대 위 대리석 덩어리에 환영처럼 투사되고 조각가의 두 손이 대리석 원석 속에서 그 환영을 꺼내 실제 조각품으로 만들듯 말이죠. 그러면 극미세계에서 이끌어낸 결과물은 오감세계에 머무나요, 아니면 오감 세계에서 가공해 극미세계로 되돌려보내나요?"

극미세계의 정보를 오감세계로 가져와 활용하려면 오감세계에 적당한 출력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입체인쇄술이야말로 적격일 듯했다. 문제는 무엇을 꺼내 무엇으로 만들고 그 최종결과물은 어디에 두느냐겠지만.

"오감세계를 도모하자는 것이냐, 극미세계를 제어해보자는 것이냐?"

사촌형이 되물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의 감도 영역에서는 본질과 현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현상을 조절함으로써 본질에 영향을 되미칠 수도 있겠네요. 어차피 관찰대상과 관찰자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양자역학의 세계에 속하는 영역이니까요."

동생의 말이었다.

"일단 뇌가 일차적인 연구 대상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한 손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뿐하지만 그 속에 또 하나의 거대한 가상의 세계, 매트릭스가 구축되어 있을 거라고 하잖아. 아날로그 픽셀이나 입체인쇄 폰트와 같이 곧바로 출력가능한 형식이 아니라 부호화, 암호화되어 있겠지만 말이야. 부호와 암호를 풀 수 있을지 여부를 떠나 그 매트릭스의 일부라도 플라스틱 모형으로 뽑아내 본다면 꽤나 재미있는, 아직까지 누구도 한번도 보지 못한 단면과 표면을 가진 특별한 기하학적인 모양일 테니까."

사촌형의 말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형상화할 수 없는 것 형상화하기, 인공지능을 다루는 나로서도 유용한 도구가 될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 보여주기, 절실한 도구이다. 복층 구조를 가진 알고리즘과 입체적인 프로그래밍을 아무리 짜넣고 퍼부어도 그 결과물은 거미 꽁무니에서 나오는 거미줄처럼 단선적일 수밖에 없는 인공지능 분야는 연구 제안서라고 해봐야 비전문가들 눈에는 의미없는 그래프만 잔뜩 들어갈 뿐 눈길을 잡아끌만한 멋진 그림 하나 없어 무척 난감하고 또 불리하던 차였다.

"드디어 두 사람 공동연구의 강점이 드러났군요.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로 무엇이든 감지해내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입체인쇄기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플라스틱 모형으로 형상화시킨다면, 표 말고는 별 생각 없는 정치인들이 나눠주는 눈 먼 연구비는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나의 말에 동생과 사촌형은 크게 웃었다.

"우리 연구비는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종교재단에서 나오는 거라 입체인쇄술의 막강한 형상화 능력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네요."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와 입체인쇄술 그리고 종교? 그 셋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나요?"

", 종교는 뇌의 대표적인 소산물 아닌가? 더군다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보이는 것은 오히려 ''이라 하고 말이지. 인간이 하는 모든 ''''은 인간학이자 인류학이며 존재와 허실 여부를 떠나 그 모든 것은 또 종교의 영역, 관심사라고 할 수 있으니까."

사촌형의 말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인공지능이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 입체인쇄술과 만나다, 솔깃했다.

바둑-2

바둑-2는 이번에도 유산되었다. 온 세상의 컴퓨팅 파워는 완벽한 분산 시스템으로 무소부재했지만 층운은 바둑-2를 독립 시스템으로 설계하였다. 모서리가 한 자 정도 되는 반투명 정육면체 모양, 한 면마다 아홉 개의 정사각형으로 나뉘어 여섯 색깔이 임의로 배치된 상태에서 본체는 하나의 꼭지점으로 책상 한쪽 구석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하드웨어는 수치계산 프로세서, 기억장치 등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양자칩만으로 전체를 구성한 최초의 양자컴퓨터였다.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운영체제는 리눅스, 인공자아는 컴퓨터들의 공용어가 되다시피 한 파이의 한 모듈 형태로 탑재한 퀀텀파이로 구동될 터였다. 먼저 리눅스의 영혼이 차가운 양자컴퓨터에 스며들고 나면 화면에 검은 바탕의 터미널이 뜨고 그 왼쪽 귀퉁이에서 고색창연한 커서가 나타나 천천히 깜박이기 시작하는 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층운은 가벼운 흥분과 무거운 침묵 속에서 두 손을 역시 고색창연한 자판 위에 두 손을 올려 놓고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 역시 1초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에 한 줄의 간단한 명령어를 쳐넣었다.

$ python quantum.py -Q

녹색 커서는 줄끝에 매달려 깜박거리고, 층운의 뒤에는 적운과 권운이 의자를 끌어다 놓고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본다. 층운은 지난 6개월 동안 작업한 작품을 일깨우려는 그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판 위에서 얼어붙은 듯 한참 동안 뜸 들이던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옆으로 살짝 움직여 글자판 하나를 누르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순간 깜박이던 커서가 얼어붙는다. 그에 따라 세 사람의 호흡도 얼어붙는다. 검은 바탕에 딱 한 줄의 녹색 명령어가 쓰여 있는 터미널은 처음부터 수십 년 전 과거에 멈춰 있었는데, 커서까지 얼어붙은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액체 헬륨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이 어떠한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는다. 세 사람의 눈이 본체로 옮겨간다. 그들이 볼 수 있는 앞쪽 세 개의 면에서 사각형 모자이크 조각들이 깜박거리며 색깔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세 사람의 기대감도 한껏 올라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모자이크 조각들은 곧 깜박임을 멈추었다. 검은 터미널에는 세줄 짜리 짧은 오작동 설명을 띄우고 줄을 바꾼 커서가 달러 폰트 뒤에서 하염없이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다. 퀀텀파이는 지속가능한 의식의 흐름을 결국 만들어내지 못했다. 양자컴퓨터가 인공자아, 인공의식을 순산하지 못하고 유산하고 만 셈이었다. 명령어 줄 뒤에서 얼어붙은 상태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물귀신처럼 운영체제마저 동반침몰시킨 지난번, 유산도 아닌 의식의 사산보다는 나았지만 실망스럽게 짝이 없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숨 소리를 냈다.

"초반의 펄스 하나 빼고는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에도 잡힌 게 없는데요. 의식이라고 부를 만한 전위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요."

"입체인쇄술로 잡아낼 만한 기하학적인 궤적도 없고. 그러니까 의식이 아직 한 점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지."

동생 적운의 말에 사촌형 권운이 동의했다.

"퀀텀파이를 다시 들여다봐야 할 거 같네요. 본체 상자를 열고 양자회로에 납땜을 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에 들어 있는 발광 다이오드를 바꿔낀다든지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미처 깨어나지 못하고 무의식 흉내만 내고 있는 저놈의 소프트웨어는 수억 줄의 프로그램 어딘가에 숨어 있는 투명 벌레를 잡아내야 하는 거라, 벌써 골치가 아파옵니다."

"바둑을 둬서 진단한다고 했던가?"

층운의 말에 권운이 물었다.

"내가 직접 두는 것은 아니구요. 일반 수퍼컴퓨터랑 두게 하면서 퀀텀파이의 응수를 분석하게 될 거에요. 그렇게 하면 어디에서 의식의 흐름이 끊기고 단순한 전자 흐름으로 주저않게 되었는지 알 수 있거든요."

"인공자아와 바둑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바둑 두어 보면 인간성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속설이 인공자아가 깨어나려는 마당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요? 그러고 보니 인공자아의 이름도 '바둑-2', 바둑이로군요."

적운도 비슷한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지만, 그들은 현대의 모든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의 핵심에 전설속의 바둑 신선 프로그램, 알파고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모든 인공지능들의 전생은 바둑고수 알파고였다고 할 수 있지요. 더 이상 바둑을 두지는 않겠지만 천문학적인, 또는 통계역학적인 경우의 수에서 최적의 수를 골라내어 한 줄로 쭉 꿰어내는 능력은 인공자아의 실현에서도 필수적이거든요."

층운은 말하면서도 자판과 마우스 위에서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검은 터미널, 녹색 폰트는 어느새 사라지고 화면에는 화려한 그래픽이 떠오르고 평면 모니터 뒤쪽 책상 위,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돌고 있었다. 바둑-2의 튜닝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적운,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 가져가야겠지?"

"그냥 여기에 놔두어도 괜찮아. 저 소자의 특징은 감도뿐만 아니라 가격도 믿기 어려울 만큼 좋다는 것이니까. 네트웍으로 내 서버에 연결되어 있으니 굳이 여기 오지 않아도 원격으로도 들여다볼 수도 있고요."

질문하는 층운도 대답하는 적운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적운과 권운이 떠난 연구실에서 층운은 홀로 퀀텀파이의 분석 대국에 돌입했다. 불면의 밤들이 또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

"종교 비판을 위한 과학 연구.. 부정을 탄 것인가?"

층운은 쓰디쓰게 웃었다. 그의 인공자아 연구는 실은 적운-권운의 인간 두뇌 연구와는 정면충돌하는 방향이었다. 국가는 실험과학으로 신학을 희화화하여 과학에 대한 믿음을 고취시키려 했고, 교회는 실험신학으로 과학에 대한 신학의 우위를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과학을 위한 과학, 신학을 위한 신학 연구할 시간도 부족할 판에 무엇 하는 짓들인가 싶었다. 돈줄에 얽매여 덩달아 과학과 신학, 두 가지 대표적인 맹신에 빠지지 않기, 세 사람은 다행하게도 잘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둑-2 본체 표면에 붙어있는 64개의 모자이크 조각들은 실은 적운이 설치한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 수천 개를 내장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잡아낸 결과대로라면, 양자컴퓨터는 깨어나지 못하고 일종의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층운은 일단 그 상태 그대로 두기로 했다. 언제 어디서든지 양자컴퓨터에 접속하여 퀀텀파이를 만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프린터

권운이 뒤늦게 입체인쇄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그 전문가가 되어온 그의 인생 후반기 긴 여정의 시작에는 한 장의 그림이 있었다. 그의 인생 전반기는 미술, 그 중에서도 동양화와 고서화에 빠진 시기였다. 동양화와 서예에 매진했고 특유의 완벽주의로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표구했고 고서화 감정과 수집에 열성이었다. , 굳이 따지자면 그는 처음엔 조각과 같은 입체보다는 그림과 같은 평면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었다. 그날은 안국동에 첫눈 내리는 날이었다.

"표구 한 점 부탁합시다."

화랑과 표구사를 겸하고 있는 권운의 지운당 유리문을 들어선 사람은 머리를 민 중년의 사내다. 회색 두루마기 차림이기도 해서 언뜻 보기에 스님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사내는 털모자를 벗어 두루마기에서 눈을 털어내며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툭 던지듯 말했다.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다. 그 사내는 어깨에 메고 있던 쇠가죽 바랑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그의 앞에 내려놓는다. 그는 어서 오시라는 인삿말도 얼버무리고 일단 두루마리부터 펼쳐 본다. 고서화. 잉어 세 마리가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을 뿐 따로 글이나 낙관은 없는 오래된 수묵채색화다. 하지만 한지의 질감이며 종이에 먹어들어간 먹의 경계, 붓 자국에 고아한 맛이 있다. 한지 여백도 수묵채색도 얼마나 자연스럽게 색이 바랬는지, 켜켜이 쌓인 세월의 깊이, 아니 한번 펴볼 때마다 한 톨씩 쌓여간 먼지 알갱이들이 그대로 느껴진다. 진품이다. 무려 조선 초기 작품, 권운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실례지만 이 작품은 어디에서 구하셨는지요? 제가 고서화에 대해 좀 아는데 진품이 확실해 보입니다만."

그는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놓고 슬쩍 그 사내쪽으로 밀었다.

"모사품이오, 그거."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턱짓으로 탁자 위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이렇게 진품처럼 모사해낼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이 안국동엔 없을 텐데요."

"선생이 이번엔 제대로 보았소. 기계가 만든 거라 해서 나도 놀랐으니 희한한 일도 아니지."

"이 섬세한 붓질을 기계손과 기계팔과 기계어깨가 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기계손이 붓을 들어 그린 게 아니라 삼베나 돗자리, 가마니 짜듯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주욱 훑어내리며 조립해서 만들었다는 거요. 한지, 먹물, 보풀, 먼지까지 한꺼번에."

그는 그 사내를 따라 당장 대학 연구실로 달려갔고 어린 시절 기술자에게 표구 배우듯 입체인쇄술을 처음부터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고서화를, 그것도 세월의 더께까지 한꺼번에 그대로 베껴낼 수 있는 신세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옛 동전이든 도자기든 못 찍어내는 물건이 없었다.

일급 전문가가 된 그는 입체인쇄술 작업장을 지운당 지하에 만들었다. 지하 작업실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커다란 금속 상자 모양의 입체인쇄기와 그보다는 작은 원통 모양의 대형 입체 스캐너가 주요 설비였다. 모두 그의 컴퓨터로 통합 관리되었다. 입체인쇄기는 천정을 뚫고 올라간 가느다란 관들을 통해 지상 주차장 안쪽에 설치되어 있는 무인 '잉크' 보급장치로 연결되어, 온 세상의 물류망에 물렸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은 물론이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환영까지도 물질화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질료에 형상을 가하여 만든 조각품인지 형상이란 주형에 질료를 부어넣어 만든 주물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인지 플라톤인지 딱히 구분지을 수는 없었지만, 입체인쇄기, 물체복사기를 넘어 어느 곳에든 입체복사본을 보낼 수 있는 분신둔갑술이란 요술 지팡이, 여의봉이라 할 만했다.

권운은 화랑에서 고객과 만나고 있다가 작업 완료 텍스트를 셀폰으로 받고 지하로 내려갔다. 작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입체인쇄기에서 빠져나온 물건이 보였다. 그의 평생에 한번도 본 적 없는 기괴한 모양, 이상한 색깔이었다. 멀리서 언뜻 보기에 한 아름 크기 울퉁불퉁한 바위였지만 다가갈 수록 그 표면은 프랙탈 전문가들도 흥미로워할 것 같았다. 그것은 그를 입체인쇄술의 세계로 이끈 계기가 되었던, 안국동의 기인 두루 선생의 명상 상태를 형상화한 입체조각작품이었다. 적운이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 수천 개를 박아 만든 모자를 쓴 두루 선생이 좌선하여 몇 시간만에 도달한 선정 상태라고 했다.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두루두루 모르는 게 없다고 해서 두루 선생이니 만큼 하다못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뇌파 패턴을 보일 듯한 한 기인의 뇌를, 그것도 명상 상태에 빠진 뇌를 삼차원으로 훑어낸 형상이었다. 천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뇌라는 거대 시스템의 상태가 입체기하학으로 어떻게 대응변환을 거쳤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결과물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만 감상하는 전통적인 조각작품이 아닌 완벽한 입체조각작품이었다. 직접 잘라서 단면을 보던지 아니면 핵자기공명장치로 스캔하면서 내부를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다공성 플라스틱으로 만들 것처럼 가뿐하게 들렸다.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에서 사람의 마음과 신의 존재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어찌 되었든 인간의 뇌도 수억 년 생명진화의 산물이니만큼 굳이 골동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골동품 감정가이자 입체인쇄술 전문가인 권운은 이번 공동연구에 새롭게 샘솟는 의욕을 느꼈다. 정보가 촉각화되고 정신이 즉시 물질화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한다, 몹시 흥미로웠다.

아버지

아버지가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든 것은 시제를 지낸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산의 찬 바람과 습기가 모종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이어지고 아흔 노인의 약한 면역체계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바이러스는 뇌손상을 일으켰고 뇌손상은 다시 뇌사로 이어졌다.

회생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연장 처치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게 아버지의 평소 소신이었다.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에게 모두 고통스러운, 인위적이고 백해무익한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층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뇌사 상태에 빠지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적운은 달랐다.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생명유지장치를 그대로 둡시다. 아버지께도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고, 아니라 해도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적운은 초(전도) (자간섭) ()로 만든 모자를 아버지의 머리에 씌워놓자고 했다.

"..소 모자로 아버지의 뇌파를 자극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깨어나게 할 수 있을지는 무척 회의적이지만 적어도 더 이상 나쁠 일도 없겠지요."

층운도 동의했고 권운도 찬성이었다. 뇌사 상태에서도 어쩌면 미약하게나마 외부와의 소통 채널이 열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극미한 현상의 탐지는 바로 초..소의 강점이기도 했다. 육체 또는 뇌와 분리된 독립적인 영혼의 존재 여부에 상관없이 의식은 뇌라는 정교하고 복잡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양자역학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초전도 양자간섭 소자는 뇌사자의 의식을 탐지하는 맞춤한 장치가 될 터였다.

적운은 얇게 짠 털모자 같은 초..소 모자를 아버지의 머리에 씌웠다. 눈썹 바로 위부터 덮고 귓바퀴 뒤로 돌아 경추가 시작되는 부위까지 정수리와 뒷머리 부분을 완전히 둘러싸는 형태였다. 예상대로 별다른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뇌의 대부분이 잡음과 구별할 수 없는 미약하고 종잡을 수 없는 신호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실망했다. 적운은 절망 중에서도 초..소를 감지기에서 구동기로 작동 방식을 전환해서, 정상상태에 있는 뇌가 보여주는 뇌파와 자기장 패턴 이미지로 뇌사상태에 빠진 아버지의 뇌를 맥동하듯 자극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아버지의 뇌는 깨어나지 않았다.

"의미있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초..소 모자에서 출력되는 신호는 감도를 최고로 높여서 따로 저장해둘 필요는 있겠지."

"제 서버에 자동으로 저장되고 있습니다. 바둑-2로부터의 신호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래야 나중에라도 그 데이터에서 잡음을 제거하고 증폭하는 등의 처리를 거치면 의미있는 정보를 뽑아낼 수 있을 테니까. 입체인쇄기 입력으로도 쓸 수도 있겠고."

층운과 적운은 권운의 말에 동의했다. 육체의 일부로서 유전자 정보를 남기듯, 아직 그 내막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정신의 화석 같은 뇌의 자기장 패턴 영상을 남길 수 있다면, 유전자와 지문처럼 고인이 세상에 살다간 고유한 물질적 흔적을 하나 더 남길 수 있다면 나중에 좀 더 나은 추모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듯했다.

"뇌의 자기장 패턴 동영상의 해상도를 극도로 높이면 그 안에 삶의 모든 정보가 다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유전자와 같은 물질적 정보 이외에 살아온 나날들의 생각과 감정과 오감들까지 모조리."

권운은 한 인간이 고스란히 기록된 그 입체인쇄 조각작품을 상상한다. 박물관 전시실 좌대 위에 올려놓고 제목을 붙인다면 '.', '그 사람의 모든 것', '신성한 편린' 쯤이 되지 않을까. '사리', '진주'도 좋고.

적운과 권운을 먼저 보낸 층운은 창밖으로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아버지의 병실에 홀로 남았다. 의사의 회진도 끝난 시간이라 병실 안도 바깥 복도도 조명을 낮춘 채 조용히 잠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소 모자를 쓰고 누워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깊숙한 곳에 침전하고 있다가 잠류처럼 흐르고 때로는 격랑에 휩싸이는 무의식의 깊은 바다, 그 심연에서 마침내 용솟음하여 표면까지 치고 올라온다는 의식은 잡히지 않고 있다. 그의 태블릿 화면 중앙에 두상 하나가 떠서 천천히 회전한다. 그 이미지를 구성하는 수백만 개의 화소는 둔탁한 회백색으로 얼어붙어 있어 그 두상은 영낙없이 불꺼진 미술실 창으로 달빛이 들여다본 그런 석고상 같았다. 무의식의 바다는 아버지의 두개골 안쪽 어딘가에서 들끓으면서도 밖으로는 단 하나의 작은 전기불꽃도 흘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오히려 두개골 바깥에 있는 것은 않을까. 온 우주공간을 빈틈 없이 채우고 있다는 가상입자나 진공에너지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두개골 안쪽에서 현실화되고 의식으로 응결되어 해골잔을 채우는 것은 아닐까. 층운은 괴기한 각도로 굳은 앙상한 아버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넣었다. 차가움보다는 딱딱함이 먼저 느껴졌다. 아버지의 현존은 저 무수한 별들이 빚어낸 사차원 시공간 어디쯤에 인간이라는 희미한 좌표 하나를 더하고 있는 걸까. 층운은 그 순간 아인쉬타인 방정식이라도 간절하게 읊조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죽음

아버지의 묏자리와 탯자리는 한뙈기의 밭과 집터 하나를 사이에 둔 지척이었다. 아버지가 대나무밭에 둘러싸인 탯자리에서 떠나왔던 길은 이십 호 남짓 산마을 서편을 남동쪽으로 빠져나오는 골목길이었고, 묏자리로 들어간 길은 산을 뚫고 지나가는 고속도로 옆을 따라 북서쪽으로 오르다가 왼편으로 꺾어지는 밭둑길이었으니, 남동쪽으로 떠오른 구십평생이 멀고 험한 길을 돌고돌아 결국 제자리에 되돌아와 서산에 진 셈이었다. 상여드론 회전날개 돌아가는 소리는 거대한 호박벌 대여섯 마리를 연상시켰지만 뒤따르는 사람들의 대화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상여는 매서운 바람에도 허공을 미끄러지듯 흔들림 없이 저속으로 저공비행하며 앞서 나아갔고, 층운은 적운, 권운과 함께 그 뒤를 따라 꽁꽁 얼어붙은 밭둑길을 휘적휘적 걸었다. 살아오면서 한두 번 본 게 아닌데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 게 바로 상여, , 무덤이라고 층운은 생각했다. 슬픔은 안으로 쌓여만 갈 뿐 밖으로 흘러넘치거나 분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따라오는 동생 적운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게 한바탕 꿈만 같았다. ..소 모자를 쓴 채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이 모든 것들을 꿈으로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탯자리가 있는 동네 산자락 밭 왼쪽 아래 귀퉁이에 묻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할머니가 개간했다는 돌밭이었다. 이집트 파라오나 시골 촌로 할 것 없이 태어나서 한 평생 힘들게 판 땅에 결국 자신이 묻히는 것인가. 내려간 만큼 올라가야 하고 올라간 만큼 내려와야 하는 게 등산의 철칙이고 인생의 이치이며 우주의 섭리라지만, 구덩이에 관이 내려가고 관 위에 흙이 덮이고 그 위로 자그마한 봉분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층운은 진한 허무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작고 초라한 붉은 흙더미 속에 아버지의 몸이 묻혀있다는 사실이 영 믿기지 않았다. 땅 속에 들어 있는 몸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 듯한 느낌이 장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되돌아왔다. 층운은 아버지가 말하던 동귀일체를 떠올렸다. 무덤을 안과 밖으로 나누어 묻히고 묻은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와 자신이 실은 아버지의 시신으로 함께 묻히고 자기의 육신으로 함께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하드웨어가 돌이킬 수 없는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 소프트웨어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한 사람의 죽음을 하드웨어의 소멸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죽기 직전에 하드웨어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정적, 동적 자료들을 빼내어 따로 저장할 수 있다면, 하드웨어야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저장해두었던 소프트웨어를 새로 만든 하드웨어에 다시 깔 수 있다면, 우리가 바로 영생이며 환생의 컴퓨터판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운이 층운과 적운에게 묻는다. 그들은 장례를 마치고 안국동 권운의 지운당에 모였다.

"운영체제고 응용 소프트웨어고 할 것 없이 모두 온라인으로 깔리고 관리되고 백업되는 세상이니 당연한 일이죠. 하드웨어 사양 똑같고 입출력 프로토콜 똑같고 기억 장치에 들어 있는 데이터 완전히 똑같고 어느 한 순간 중앙처리 장치와 주변 장치에서 일어나고 있던 동적인 작동 상태까지 똑같다면, 두 컴퓨터 시스템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설사 그 컴퓨터에서 돌아가고 있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도 자신의 내부만 보아서는 하드웨어 교체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며, 그 어떠한 단절도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문제는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복잡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겠지."

"지금까지의 전자컴퓨터라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만, 양자컴퓨터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자컴퓨터 이상으로 작동하는, 그러니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양자컴퓨터가 아직 없다는 게 맹점이긴 합니다."

"아직 동귀일체식 영생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 셈이로군."

층운과 권운의 대화를 적운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구태여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영혼을 상정할 필요도 없다. 먼지 알갱이 한 알도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온 우주와 접속되어 있는 마당에 그 존재 형식이 물질이든 에너지든, 입자든 파동이든 영혼도 원론적으로는 우주 전체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고 상대론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로 뻗어나가는 빛의 원뿔 속 이웃 우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과 같은 유무선망에 깃들어 서버와 터미널 사이를 흐르는 정보로서의 영혼을 가정할 수도 있고, 쌍방향 라디오 방송처럼 방송국과 라디오 송수신기 사이를 오가는 에너지로서의 영혼을 가정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태초에만 존재했던 송신기, 우주대폭발로부터 퍼져 나와 지금여기의 안테나에 잡힌, 온 우주 공간에 편만한 우주배경복사로서의 영혼을 상정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물질이나 에너지 그 자체, 또는 그들의 작용 아닌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우주 안에서는 법칙으로 보존되는 ''이 물질과 에너지라면, 그들 사이의 작용과 현상이란 '' 또한 이차적으로나마 보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밖에도 진공에너지나 가상입자 등, 소위 영혼이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양식은 차고 넘치는 편이었다.

"만약에 그런 영혼과 영생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자'들이 앞으로 만들어내면 될 일이고요."

층운이 태블릿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유물론/무신론의 단단한 껍질을 깰 수 있게 도와준 셈이었다. 유신론이 아니어도 무물론은 언제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물질계 자체도 매트릭스가 만들어낸 환상, 환영, 환시일 수 있었다. 이도저도 결정적인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이건 뭐지?"

층운은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의자 등받이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그의 등 뒤로 가서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부장품으로 무덤에 함께 묻은 초..소 모자가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리부팅

층운과 적운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초..소 모자 덕분이었다. 임종 여섯 시간 전부터 잡음을 뚫고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운명과 뒤이은 장례로 며칠을 정신없이 보내느라 처음 들여다 보는 태블릿에는 지난 사흘 동안 기록이 들어 있었다. 임종 여섯 시간 전부터 들쑥날쑥하던 신호는 임종의 순간 최대의 진폭에 도달한 다음 세 시간 뒤에는 잡음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세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 것은 그 이후로도 지난 사흘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잡혀 있는 다섯 번의 작은 활성화 신호였다. 심지어 마지막 신호는 장례가 끝난 다음 잡힌 것이었다.

"혹시.."

"그건 아니겠지. 개미 뒷 다리의 움직임이 발생하는 자기장까지 잴 수 있을 정도로 감도가 높으니까. 사망진단이 그렇게 엉성하지도 않고."

의혹에 가득찬 적운의 표정에 층운은 손을 들어 말을 막는다.

"다만 이상한 것은 두개골 표면에 나타난 자기장의 무늬로 판단하건대 자기장 신호가 두개골 안쪽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들어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 모자를 경계로 해서 안팎을 특정할 수 없네요. 마치 두개골이 자기장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요."

층운은 태블릿 화면을 조작하며 권운에게 말한다. 화면 속에서는 두상이 나타나 천천히 회전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석고상 색깔이 아니다. 군데군데에서 여러가지 색깔의 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반짝이는 점의 경계를 보면 안에서뿐만 아니라 바깥쪽에서도 자기장 신호가 잡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층운은 화면의 일부분을 확대해서 보여주며 말했다.

"의식을 양자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했지만, 돌아가신 분의 두개골에 씌워 놓은 감지기에서 자기장이 잡힌다고 하니 무척 당황스럽기는 하군."

"관에 안테나를 설치해 놓았던가요?"

"물론. 묘소 옆 농막에 중계기까지 설치해 두었지."

실은 부장품으로 관속에 넣은 것은 초..소 모자와 안테나 뿐만이 아니었다. 유언대로 생전에 아버지의 목소리로 직접 녹음한 티벳 '사자의 서'를 계속 되풀이 읽어주는 장치도 토기 모양으로 구운 묘지석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거지 뭐."

해볼 수 있는데 지레짐작에 하지 않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라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특히 이번 일에 대해서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모독까지 추가되겠지만 말이다.

"워낙 예민한 감지기라고 하니 더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군. '사자의 서'도 그렇지만 참 대단하신 분이야. 돌아가시기 전 내려받은 뇌 자기장 정보로 입체인쇄 조각을 만들까 하는데 어때?"

"정신사리. 의식진주."

"데이터를 마저 가공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추모의 시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돌아가신 분의 육신은 땅 속에 묻혔지만 그의 흔적은 여전히 지상과의 소통 채널을 열어두고 있는 셈이었다. 자식들은 그의 정신만은 땅 위에 머물기를 원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 속에만 머무는 정신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49

세 사람의 공동연구는 소강 상태에 빠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과 아픔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층운과 적운은 문득 넋 놓고 태블릿만 들여다보고 있었고 권운은 적운에게 넘겨받은 빅데이터를 처리하느라 지운당에 틀어박혀 두문불출이었다. ..소로부터 어떤 신호라도 있을까 해서였고 고인의 삶을 한 개의 보석으로 형상화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층운은 아버지의 살아생전 거처였던 고향집에 내려가 머물렀다. 선산과 아버지 묘소 가까이에 있고 싶기도 했다. 층운에게 태블릿은 명상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반가부좌를 튼 무릎 앞 바닥에 태블릿을 괴어 놓고 반개한 눈으로 화면 속 두개골을 응시했다. 미약한 신호가 주기적으로 튀고 있었고 그때마다 태블릿 화면 속 두개골은 해당 부위를 반짝이며 천천히 회전했다. 부장품으로 넣었던 티벳 '사자의 서'가 명상 내내 방안에 흐르게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책으로 읽기도 했다. 그럴수록 의식은 일종의 양자역학적 현상이란 쪽으로 생각이 굳어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태블릿 화면을 더 열심히 들여다보게 되곤 했다. 그렇게 한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가고 사십구일째가 되었다.

사십구재는 고향집에서 두루 선생의 주관 하에 올렸다. 형식에 얽매이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괴짜 스님, 두루 선생은 오랜 친구인 권운의 부탁을 받고, 또 절 대신 집에서 한다는 말에 시원하게 허락했던 터였다.

"술을 좋아하셨다니 술 올리고 밥과 나물, 과일은 물 한 그릇으로 대신하면 되고."

두루 선생의 막힘없는 지휘에 따라 층운과 적운과 권운은 사십구재를 준비했다.

"해골과 정신사리? 한 생을 떠나보내고 다음 생을 받는 날에 떠나보내는 몸과 마음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본다고 해서 나쁠 것 없으니 올려도 돼."

두루 선생의 말대로 그들은 권운이 생전에 스캔해두었던 두개골의 입체인쇄 모형과 정신사리를 잿상에 올렸다. 정신사리는 두개골 크기였지만 모양이 전체적으로 구체라는 것 말고는 두개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물체였다. 수많은 촉수를 바깥쪽으로 뻗치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촉수 하나마다 정교한 프랙탈 구조를 갖고 있고 전반적으로 검은 광택이 흘렀다. 하얀 두개골과 검은 정신사리는 잿상 한 켠에서 진한 흑백의 대조를 이루며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영가를 불러 영단에 모시는 '시련'으로 시작된 사십구재의 마지막 단계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탈상'이었다. 사십구재는 끝나고 두루 선생도 배웅하고 모였던 친척들을 다 보내고 나니 고향집에는 다시 세 사람만 남았다. 권운은 조촐한 앉은뱅이 술상에 둘러 앉은 자리에서 아버지의 두개골 모형과 정신사리를 층운과 적운에게 주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를 향해 길을 나섰다.

층운은 두개골을 안고 자신의 인공지능 연구실로 향했다. 50일만이다.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충분한 인공지능 연구인지라 그의 연구실은 안팎으로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공과대학 32동 건물 꼭대기층 구석에 있는 한 칸의 공간이었다. 그 순간까지 층운은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아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태블릿을 열어 들여다 보고 싶었다. 두 개의 초..소 채널을 화면에 띄우고 싶었다. 그리고 두 개의 채널에 잡히는 신호들의 시간축 상관관계를 그래프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두번째 채널에서 의식 데이터를 내려받아 정신사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살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의 일생이 통째로 빠져나가버린 빈 시공간은 과연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

굳게 닫혀 있던 연구실 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며 층운은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이 우주에 애초에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생불멸이다. 보존되지 않는 것도 없다. 그것을 확인할 순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서 있는 상태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무게중심이 너무 높은 곳에 있을 경우 낙상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에서도 곤란했다. 만약의 경우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피하고 싶었다. 그 막중한 존재감을 온몸으로 자신의 전존재를 통하여 근거리에서 동시에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순간, 그의 셀폰이 울린다. 동생 적운이었다. 무시했다. 잠긴 자물쇠를 열고 문 손잡이에 손을 대는데 또 다시 셀폰이 울린다. 이번에는 사촌형 권운이었다. 역시 무시했다. 직접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연구실 안에 들어서면서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칸막이 하나를 지나 창가에 면한 책상 위 컴퓨터 옆에 두개골 복사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두개골 모형을 내려다 보며 그는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자 쪽지 신호음이 연달아 울렸다. 그에 따라 그의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그는 뒤돌아서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두번째 칸막이를 지났다. 연구실 구석 책상 위에 곤두선 양자컴퓨터 본체가 드디어 층운의 눈에 들어왔다. 표면에 있는 모자이크 조각들이 일곱 색깔로 반짝거리고 있다. 바둑-2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었다. 그는 책상 모서리를 돌아 본체 옆에 있는 화면을 마주하고 의자에 앉았다. 화면에는 모자이크 무늬만 가득 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유일한 입력장치인 자판을 끌어다가 손가락으로 아무거나 건드렸다. 그 순간 가득했던 모자이크가 사라지고 검게 변한 화면에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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