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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게임의 연속
게시물ID : panic_1010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1
조회수 : 78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1/21 11: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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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게임의 연속




리만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1억원 입금."


화면 속에 또렷이 떠 있는 문자였다. 그는 자신의 은행 계좌 잔고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장장 18시간의 게임을 끝낸 빨간 토끼눈으로 습관처럼 온라인 뱅킹 사이트에 접속했던 것이다. 과연 앞으로 며칠 동안 더 굶지 않고 게임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차였다. 그런데 처음 보는 숫자와 문자의 낯선 조합이 그의 시린 눈동자를 사정없이 찔러오고 있었다. 30초 동안은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 점 하나 영 하나 빈칸 하나에도 벌벌 떠는 은행도 실수할 때가 다 있네."

맨 처음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월말 마감 직전의 은행 서버 못지 않게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그의 머리는 무수한 다른 가능성으로 가지 쳐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납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찾을 수가 없었다.


"제발.."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어 밤새 게임 하면서 먹다 남은 식어빠진 피자 조각을 집어들었다. 앞니에는 차갑고 어금니에는 딱딱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면서도 우적우적 씹었다. 그는 어느새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제발 현실이기를, 은행 서버의 착오라면 딱 1년 동안만 제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기를 빌었다.


"제발.. 제발.. 제발.."


막노동판에서 구르며 한번도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해본 적 없는 그는 '1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자신의 은행 계좌와 어떤 상관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터였다. 결국 그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듯 바닥에 깔려 있는 이부자리로 내려와서 잠이 들었다.


리만수는 허공을 밟는 느낌으로 회의실을 빠져 나왔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마천루 밖으로 빠져 나갔다. 뒤돌아선 그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마천루 꼭대기를 찾아보았다. 자기자신이 조금 전에 저 높은 곳에 있는, 전망 좋은 회의실에 있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취직이라니!


메타 엔지니어링 그룹. 세계 굴지의 기업이었다. 대학에서 무슨 전공이었는지 스스로도 얼른 생각나지 않을 정도인 만년 백수 그에게 메타 엔지니어링이라니! 그가 아는 그 회사는 온라인 게임 서비스 회사였다. 물론 전 세계에 수백 개의 초중고대학교와 기술 학교를 소유한 교육기관 지주 회사이기도 했다. 학교란 학교는 모두 인터넷 가상 공간으로 옮겨간 지 오래였기 때문에 교육은 온라인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는 마침 주말 저녁, 그는 친구 류수재를 불러냈다.


", 축하한다! 메타 엔지니어링이면 최고지!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데?"

"그걸 잘 모르겠어. 게임 개발이라고 하던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동네 친구란 사실 말고는 리만수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친구였다. 이름처럼 수재, 천재였다. 최고 명문 메타대학교 경제학부를 나온 그는 졸업하자마자 이름만 대면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투자회사에 취직했으니 리만수가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그런 수재였다. 류수재는 우물쭈물거리는 리만수에게 의혹의 눈빛을 보냈다.


"게임 개발? 네가 컴퓨터공학과였던가?"

"아닌데. 게임 개발에 꼭 프로그래머만 필요한 건 아니래."

"혹시 게임 테스터 아냐? 게임 하면 또 너잖아."


류수재의 눈에 이번엔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리만수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가 고등학생 때부터 컴퓨터 게임에 미쳤던 것은 사실이었다. 대학 입학과 졸업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게임에 발목이 잡혀 살아왔던 것이다. 게임이 아니었더라면 더 좋은 대학에 갔을 것이고 게임만 안 했더라도 류수재처럼 번듯한 직장에 일찌감치 들어가 있을 터였다.


리만수는 류수재와 헤어져 낮의 환희는 온데간데없이 우울한 기분이 되어 자신의 벌집방으로 돌아왔다. 류수재의 말대로 자기가 메타 엔지니어링에서 과연 일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만년 백수인 그는 실로 게임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세계 최고 회사 가운데 하나인 메타 엔지니어링이라니... 자신이나 회사 가운데 어느 한쪽이 무엇에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만수와 메타 엔지니어링,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그래, 궁금한 게 뭔가?"

"제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메타 엔지니어링의 기술이사가 맑은 안경 너머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네, 우리 회사 온라인 게임 사이트에서 만렙 모으는 게 취미라며?"

".."

"리만수씨의 업무는 바로 그냥 그대로 쭈욱 게임을 하는 거야."

"하루종일이요? 게임을 테스트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게임 테스터란 직업이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기술이사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화면에 뜬 게임을 하는 거야. 하루종일. 가끔씩은 며칠이 걸리는 대형 게임, 대형 프로젝트가 되겠지. 매번 전혀 새로운 게임들인데 어때? 가능해?"

"혼자 하는 게임인가요? 아니면 다른 플레이어들과 함께 하는 게임인가요?"

"주로 혼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컴퓨터를 상대하는 것이니 둘이서 하는 게임이라 할 수 있겠네. 테트리스 같은 전설적인, 하지만 구닥다리 게임일 수도 있고 최신 롤플레잉 게임일 수도 있으며, 가상 사회의 소셜 네트웍일 수도 있고. 우리 게임 서버가 리만수씨 화면에 뿌려놓는 게임들을 그냥 하면 돼."

"그건 어렵지 않네요."

"다만, 게임에도 마감일이 있다는 것,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꿈은 거기까지였다. 자신의 소원 목록이 잠자는 동안 자가 증식, 자가 운동을 일으킨 결과 롤플레잉 게임 하나를 자체 제작한 모양새였다. 열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게임만 한 뇌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잠 속에서도 꿈을 게임 화면으로 착각하고 정교하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억원 입금."


눈도 뜨지 않은 채 의자에 기어올라가 자판을 건드렸는데, 서서히 밝아지는 화면 정중앙에 여전히 그 문제의 문자가 떠 있었다. 비몽사몽을 헤매던 그의 눈과 뇌가 한 순간에 또렷하게 깨어났다.


그것은 아주 허무맹랑한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무슨 마천루에 가서 기술이사란 캐릭터를 만나고 한 적은 없었지만 게임 테스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대여섯 개의 게임을 넘나들며 만렙 사냥에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주행하던 중 느닷없이 화면에 나타난 팝업 창에 뜬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때 그는 게임에 몰입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팝업 창마저 게임의 일부로 인식하고 드자마자 속독으로 읽어내고 싱글 같은 더블 클릭으로 돌파했던 것인데. 그게 불과 한 달 전쯤이었다.


"그럼, 이게 진짜??"


그러고 보니 지난 한 달 동안 테트리스 게임도 여러번 한 적이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가 한 게임들을 그가 선택한 것 같지도 않았다. 게임 자체를 워낙 좋아하는 그로서는 아무 게임이든 정신없이 즐긴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을 뿐, 달리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은행 잔고가 바닥이 나서 메타 엔지니어링 계좌로 자동이체되는 돈이 없어 일어난 현상이겠거니 했을 수도 있었다.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게임 이외의 것들은 그에게 사소한 일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시야와 의식은 반구형으로 배치된 열한 대의 화면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버렸다. 중앙의 커다란 화면 한 대, 중앙 화면의 사방에 두 개씩 배치된 작은 화면 여덟 대,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꺾어야 볼 수 있는 백미러용 화면 두 대.


친구 류수재를 만나보고도 싶었다. 은행에 문의를 해보고도 싶었고 메타 엔지니어링에 직접 찾아가 알아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고 은행 서버의 착오라면 그 또한 그대로 더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생은 꿈 같고 한 편의 롤플레잉 게임 같은 것, 현실과 비현실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속 편한 결론이었다.


하루 18시간의 게임은 계속되었다. 나머지 6시간은 대부분 잠 자는 시간이었다. 잠과 꿈은 어제의 게임을 복기하고 내일의 게임을 구상하는 중요한 게임 도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대인 관계나 생리 현상 같은 다른 모든 활동은 18시간의 게임 시간 동안에 해치웠다.


1억원이 좋긴 좋았다. 그는 오랫동안 눈독 들이고 있던 게임 보조 장치의 나머지 반쪽을 구입했다. 이제 그는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손가락도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않은 자리에서 먹고 마시고 쌀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장치들은 우주선 조종석을 닮은 좌석을 중심으로 후반구 형태로 배치되어, 열한 대의 화면이 배치되어 있는 전반구와 맞붙어 완전한 구체를 이루었다. 그는 직경이 2미터 되는 공 속에 들어가서 18시간 동안 내내 게임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 너 되게 좋아 보인다."


결국 류수재를 만났다. 난데없는 1억원 입금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백수에게 그런 말, 실례 아닌가?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하지만."

"아니야. 진짜야. 여유 속에 묻어나는 약간의 긴장감까지.. 리만수, 마침내 사랑에 빠진 건가?"

"실없는 소리.. 너는 어때? 직장생활은 재미 있고?"


늘 자신만만하던 류수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리만수는 덩달아 괜한 불안감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어렸을 때부터 늘 정상과 밝음의 좌표 구실을 했던 류수재의 그런 자신 없는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풍랑 속에서 닻줄이 끊긴 느낌까지 들었다.


"? 무슨 일 있어?"

"회사가 말이 아니야. 절반 정도가 벌써 잘렸어. 구조 조이지. 아직도 진행중.."

"지난번에 도입한다던 그 무슨 인공지능 시스템을 드디어 들인 건가?"

"그것도 아니야. 우리 회사 업무의 대부분인 컨설팅, 회계 같은 계산 능력을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 구입한대나 봐. 일종의 클라우드 컴퓨팅 개념인데 인공지능 시스템 같은 기계는 절대 아니라고 하니 어디 딱히 하소연할 데도 없어. 현재 노동법상 일정비율의 인간을 고용하게 되어 있으니까 인공지능을 빌미로 직원들을 이렇게 마구 자를 수는 없는 거거든."

"투자회사 컨설턴트 일을 인공지능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한다는 거야? 혹시 노동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정의를 살짝 바꾸어 버린 것은 아닐까? 튜링 테스트 통과하면 인간으로 치기로 한다는 둥.. 걔들 꼼수 장난 아니잖아."

"그건 아닌가 봐. 이건 사측 우렁 각시도 아니고, .."

", . 혹시 은행 계좌에 잘못 입금된 돈은 어떻게 처리되냐?"

"계좌에 잘못 입금된 돈? 그런 건 애초에 없어. 각 나라 정부가 주먹구구로 종이돈 찍어대던 옛날 이야기일 뿐이야. 블록체인 암호화폐.. 돈으로 장난치거나 실수할 일은 이제 없다고 봐야지."


리만수의 일상은 일단 평온을 되찾았다. 무한한 게임의 세계로 되돌아 갔다. 고통스러운 손목 터널 증후군이나 류머티스 관절염에서 자유롭지 못한 손발을 휘둘러 삽질을 해야만 뭐라도 돌아가는 현실 세계에 비해, 모든 게 손바닥 뒤집듯 손가락 튕기듯 쉬운 게임의 세계는 그 자체로 위로이고 행복이었다.


"1억원 입금."


리만수는 뚫어지게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한 번 일어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두 번 되풀이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 그와 같이 특별한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또다시 1억원이란 큰 돈이 입금된 것이었다.


"? 어떻게? 누가?"


의혹이 구름처럼 일었다.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돈이라는 게 아무리 컴퓨터 저장장치에 홀연히 기록되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이건 뭔가 확실히 해놓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메타 엔지니어링 그룹 건물은 정말 한강변에 있었다. 그리고 회의실도 정말로 꼭대기 층이었다.


"한 달에 1억원씩 입금하신다고요? .. 왜요?"

"우리 회사 게임 사이트에서 게임 했잖아?"

"게임 했죠. 그런데 그냥 게임 한 거잖아요?"


기술이사는 꿈속에 나타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이었다.


"만수씨는 기본소득을 위한 최소한도의 기여를 한 거야. 그것도 차고 넘치도록."

"저는 회사에 나간 적도 없고, 그냥 집에서 틀어박혀 게임만 했는데.. 기본소득이라뇨?"

", 글쎄. 기본소득 받을 자격 충분하다니까 그러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성과급까지 받은 거라고, 만수씨는!"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메타 엔지니어링의 수퍼두퍼 인공지능은 세상의 모든 컴퓨팅 파워 수요를 게임으로 바꾸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게임만 했는데, 그게 어느 투자회사의 컨설팅, 회계 업무를 다 해치웠다는..?"

"그렇지. 인생은 게임의 연속이야. 인공지능과 함께라면."


리만수는 메타 엔지니어링 그룹의 기술이사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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