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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형의 스마트폰
게시물ID : panic_1010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보이지않는세계
추천 : 3
조회수 : 189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1/22 14: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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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내 이야기

 

형이 죽었다.
죽은 형이 남긴 것 중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몇 개의 보험증서와 전세보증금, 영국 B사의 최고급 세단차, 그리고 형의 스마트폰이었다.
우리 가족은 형의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른 뒤에 형이 남긴 유품을 서둘러서 나눴는데
사망보험금과 전세보증금은 부모님께 돌아갔고
형이 생전에 아끼던 차는 누나의 차지가 되었다.
나에게는 형의 고급 정장 몇 벌과 함께 그 안에 들어 있던 잠금이 풀리지 않는 스마트폰이 주어졌다.

 

"0 6 3 0
 형의 생일인데... 이건 아니다."

 

우리 집은 30년 가까이 지방에서 볼링장을 하고 있다.
IMF 전후로 여러 차례 크고 작은 고비들이 있었지만 고교 진학까지 포기하고 불철주야 볼링장에서 생활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부모님을 도운 형 덕분에 그 고비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더불어 형의 천부적인 사업 감각으로 우리 볼링장은 지역 클럽을 넘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볼러들로 인해 볼링장은 1년 365일 늘 항상 인산인해였다.
그렇게 볼링장은 나날이 규모를 확장해나갔다.

 

"0 6 2 7
 0 1 2 6
 0 4 2 8
 1 2 0 8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우리 가족의 생일인데... 이것도 아니다."

 

내가 대전에서 내려와 형을 대신해서 부모님을 도와 볼링장을 운영한지도 벌써 4년째다.
처음엔 형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도 됐고 직원들도 내 말을 잘 따라줘서 그럭저럭 할 만하다.
형은 죽기 직전까지도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허구헌날 매일같이 술에 취해 똑같은 레퍼토리로 부모님을 원망하면서 행패를 부렸다.
'엄마, 대체 왜 그랬어요? 제가 괜찮다는데... 제가 상관없다는데...
 제 아이를 가진 여자한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제 아이 맞다니깐요! 우리 튼튼이는 엄마 아버지 손자가 맞는데... 왜 그랬어요?
 제 아이 돌려주세요. 우리 튼튼이 지금 어딨어요? 어서 돌려주세요. 우리 튼튼이 내놔요. 빨리!'
벌써 5년도 넘은 얘기다.
형이 결혼을 하겠다면서 어머니 생신에 그 여자를 데려왔다.
엄청 예뻤다.
보는 순간 단번에 한예슬이 떠오를 정도로 진짜 너무 예뻤다.
속으로 '형 정도는 돼야 저 정도로 예쁜 여자를 만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부러웠다.
그 여자는 몸에 밴 자연스러운 애교와 함께 임신 3개월이라는 큰 선물을 부모님께 안겨드리면서 두 분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형의 결혼식 준비는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 그 결혼식 날짜가 언제였더라?
 왠지 그걸 것 같은데...!"

 

지역에서 최고로 호화스러운 결혼식장,
지역에서 최고로 높은 층의 펜트하우스,
주문 제작만 가능하다는 영국 B사의 최고급 세단차 등
만약, 그때 결혼식을 할 수만 있었다면 형은 부모님으로부터 그 동안의 노고에 걸맞는 합당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을 얼마 안남긴 시점에서 그 여자가 사라졌다.
형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그 여자를 찾아 미친 듯이 돌아다녔고
어머니와 누나는 그 사이에 형의 결혼식을 취소했다.
볼링장도 내팽개친 채 그렇게 꼬박 1년 동안을 그 여자만 찾아 헤매던 형에게 어느 날 그 여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더 이상 날 찾지 말아라' 로 시작된 그 여자의 얘기는 1년 전 본인이 우리 어머니와 누나로부터

어떤 일을 당했는지로 이어진 후 '나는 너희 가족을 평생 저주하겠다!' 로 마무리 되었다.
그 여자로부터 전해 들은 믿을 수 없는 얘기를 어머니와 누나에게 직접 확인한 형은
그 순간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있는 시간에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귓속에서 자꾸만 튼튼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면서...!

 

"그때, 형꺼 차번호를 그 날짜에 맞췄으니깐...
 형꺼 차번호가 0 9 1 6 이던가?"

 

그 여자는 술집 여자였다.
형이랑 만나기 전에 1년 정도 타지역의 고급 술집에서 접대부로 일했었다.
워낙에 예뻐서 VIP들만 상대하던 그런 여자였는데 1년 동안 일하면서 겪은 일들 때문에 신물이 나서 빚을 갚자마자

그만뒀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와 누나는 형 몰래 그 여자를 만나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그 여자에게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고 그 여자를 향해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고 집어던지면서

무자비하게 폭행을 하고 잘못했다고 비는 그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산부인과로 끌고 가서 억지로 애까지 떼어냈다.
다음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께서 '지역 사람들이나 네 형한테는 이 일이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된다!' 라고 하시면서
5천만원을 들고 그 여자를 직접 찾아가셨다.
그 후, 그 여자는 지금까지 우리 가족 앞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이거였다!
 0 9 1 6"

 

몇일 전, 형의 장례식장에서 형 친구들이 나누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누나와 형에 관한 얘기였다.
아버지의 신임을 잃어 볼링장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 형은 거의 하루종일 술만 마셔댔다.
부모님은 형의 알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때, 서울에 살고 있던 누나가 내려왔다.
지금 형에게는 무엇보다도 새롭게 할 일이 필요하다면서 누나는 형과 함께 지역에서 디저트 카페를 하겠다고 했다.
비용의 절반 정도만 부모님이 도와주시면 나머지는 누나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술에 취해 하릴없이 볼링장 근처를 비틀비틀 배회하고 있던 형을 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던 부모님은
누나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한 일에 형을 보살펴주는 일까지도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매출은 부모님 4 : 누나 3 : 형 3 으로 확실하게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카페 사업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카페는 밀려드는 손님으로 밤낮없이 바빴고 형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곧 형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6개월 뒤부터는 아예 카페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카페를 오픈한지 1년쯤 되던 날 형은 자살했다.

 

"형은... 왜 그랬을까?"

 

형의 친구들은 형이 카페를 막 오픈했을 때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계획과 부푼 희망으로

마치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형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많이 괴로워했었다고 했다.

 

"형을 괴롭게 했던 일... 그게 대체 뭐였을까?"

 

죽은 형이 남긴 것 중 나에게 필요했던 스마트폰의 잠금이 풀리면서 나는 그 답을
누나와 형의 메신저 대화를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형은 누나의 매출 조작을 발견했다.
누나가 절대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여러 개 확보한 형은 누나에게 그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누나는 형에게 사과를 하면서 그렇게 하겠노라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나는 틈만 나면 형을 끈질기게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괴롭혔고 결국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게끔 만들었다.
형은 누나를 원망했다.
하지만 형은 누나가 이런 일로 부모님으로부터 내쳐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형은 끝까지 그랬다.
그래서 형이
XX 새끼 인거다.

 

나는 누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누나는 내가 기획하고 설계한 판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120% 해낸 훌륭한 사냥개이자 체스말이였다.
후후

 

"그런데 이제 어쩌지, 누나?
 난 더 이상 사냥개도 체스말도 다 필요없는데...
 난 이미 왕을 잡았거든!"

 

내가 형의 스마트폰을 만지작만지작 거린다.

 


2. 누나 이야기

 

내 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 생전에 술독에만 빠져 살더니 결국 술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
불쌍한 놈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날 막내로부터 그 여자가 술집 호스티스 출신이였다는 얘기를 내가 듣지 않았다면
아니 그 얘기를 듣고도 엄마한테 얘기하지 않고
어쩔 줄 몰라하던 막내와 그 일을 비밀로 하자고 했다면
내 동생은 그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만약, 그때 그 아이가 태어났다면 지금쯤 '고모~ 고모~' 하면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겠지?!
후후~ 그 아이 정말 귀여웠겠다.

 

방금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운전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문자를 보내자 '너 당장 볼링장으로 와!' 라는 답문이 돌아온다.
응? 당장 볼링장으로!? 무슨 일이지?
카페 매출은 내가 동생의 차를 받는 조건으로 부모님 6 : 나 4 이렇게 나누기로 얘기가 이미 끝났는데...!
아! 막내가 또 실수를 했나?
으이구... 그 멍충이!
우리 막내는 순진하고 착해서 좋은데 일처리가 야무지지 못하다.
실수도 너무 잦고...!
에휴~ 조만간 볼링장 운영도 나한테로 넘어오겠네.
진짜 내 몸이 열 개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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