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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스코인
게시물ID : panic_1011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1
조회수 : 139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01/24 12: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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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스코인



채굴

셀 수 없이 많은 소비자, 생산자, 상품이 얽혀 돌아가는 세상의 살림살이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 돈에는 기축통화와 암호화폐가 있다.


드디어 자신의 농장을 갖게 된 토마스 커먼스는 돈을 먼저 고르기로 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황금, 백은, 구리로 만든 동전이나 조가비를 쓸 수는 없으니 결국 기축통화와 암호화폐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역사발전을 무시하고 그냥 당장 편하게 가기로는 일천한 역사밖에 없지만 대세인 기축통화를 쓰면 된다.


기축통화. 한 국가 정부의 중앙은행이 그 가치를 보장한다는 법정화폐다. 하지만 글자 그대로 가치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가치를 보장한다고 선언했을 뿐, 실은 양적 완화와 같은 갖은 마술로 그 화폐의 가치를 가장 주도적으로 변동시키는 축이 바로 정부 자신이기 때문이다. 법정화폐 가치의 불안정성은 시시각각 변하는 각 정부의 법정화폐들끼리의 환율이 제멋대로라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어느 한 기축통화의 안정성이 아니라 모든 기축통화의 생래적 불안정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축통화는 대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가치의 출렁임은 깊이, 잘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당장 몸과 마음은 편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될 터였다. 그렇게 벌어 비행기 블랙박스보다 더 튼튼한 금고에 넣어두어도 신뢰의 상징인 은행 계좌에 넣어두고 한 푼도 쓰지 않아도 통화량 팽창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 가치는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현상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두 눈 꼭 감고, 아니 두 눈 벌겋게 뜨고도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갓 스물이 된 젊은이 토마스는 그걸 견딜 수 없었다. 기축통화도 결국 빅뱅의 산물인 것은 인정하겠지만, 대우주도 아닌 것이 끝없이 팽창한다? 그건 아니라고 봤다.


"우주나 팽창하지 지구가 팽창하는 건 아니잖아."


토마스는 친구 로버트에게 말하곤 했다. 로버트 오언도 토마스처럼 대서양과 애팔래치안 산맥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산록 지대에 정착한 동갑내기 친구였다. 그는 양과 말을 키우는 목장을 구입했다. 땅에 걸맞는 생산활동을 직접 해야 한다는 법 덕분에 농장이나 목장은 비교적 싼 값에 구입할 수 있었기에 그들 두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달러 대신, 그 많은 암호화폐 가운데 뭘 골라야 하지? 암호화폐 대부분은 결국 사라질 거라던데.."


카우보이 모자가 썩 잘 어울려 벌써 목장주 티가 나는 로버트가 물었다.


"기축통화로 사고팔 수 있는 암호화폐 빼면 그렇지도 않을 걸."

"달러로 사고파는 것 아닌가? 암호화폐 거래로 일확천금 한 사람들도 꽤 많다던데."

"암호화폐를 돈으로, 즉 상품 거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상품으로 거래하는 거지. 그래도 화폐로 친다면 암호화폐의 장점을 다 포기하고 달러의 머슴이 되겠다는 것으로, 그 정도면 이미 암호화폐의 탈을 쓴 기축통화라고 해야겠지."


토마스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새 세상은 새 돈에 담아야 한다는, 담을 수밖에 없다는 '빗스코인'의 철학에 동의한 것이다. 기축통화 체제를 유지한 채 새 세상을 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상화폐 구조, 만들기

빗스코인. 자유-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진영에서 개발하여 인터넷에 스며들어가 있는 암호화폐였다. 상온 초전도체 양자컴퓨터로 구성된 인터넷에서는 암호화폐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전기 에너지 비용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빗스코인은 '스타워즈'의 우주 전설 속에서 주로 음악가, 과학자, 엔지니어로 등장하는 고도의 지능을 갖춘 평화 종족 "빗스"에서 이름을 따온 암호화폐로서, 그 어떠한 중앙집중형 발행, 규제, 통제 없이 누구나 자유로이 쓸 수 있는 화폐 시스템이었다.


일정량의 재화를 생산하여 빗스코인 경제권에 투여한 경우, 그러니까 빗스코인만으로 사고 파는 대상으로 지정할 경우, 그 가치만큼 빗스코인을 벌 수 있었고, 그 보유 빗스코인으로 빗스코인 경제권 안에 있는 상품의 구매 대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빗스코인이 다른 암호화폐와 다른 지점은 그 채굴이 잠정적으로 특정한 생산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기축통화를 비롯한 다른 화폐로 빗스코인을 사고 파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된 세상을 위해서는, 돈은 상품의 거래를 매개하는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 곧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철칙 때문이었다. 화학 반응 전후에 변함 없이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 촉매처럼.


벌기, 가상화폐 품목 1

"이제 우리는 빗스코인 경제 공동체의 일원이 된 거야."


토마스가 로버트에게 말했다.


"영영 달러를 쓸 수 없게 된 건가?"


로버트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빗스코인 공동체 구성원의 달러 사용 여부는 철저하게 당사자 재량이라는 점을 로버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공기처럼 익숙했던 달러의 세계에서 빗스코인이란 별도의 산소통을 메고 대기권 전체를 향해 작은 반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낯설다는 반응이었다.


모든 것을 시스템으로 말하는 빗스코인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후적으로 강제하지 않았다. 심지어 위폐 단속을 위한 감시기구도 없었다. 위조화폐가 걱정이라면 위조할 수 없는 화폐를 만들면 된다는 식이었다.


빗스코인 채굴, 즉 빗스코인을 버는 직접적인,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은 재생가능 에너지 생산이었다. 토마스의 농장에도 로버트의 목장에도 해 아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표면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농장과 목장 위에 떨어지는 햇빛은 모두 수확되어 빗스코인 수입으로 바뀌었다. 햇빛은 태양전지를 통해 전기의 형태로 또는 식물의 엽록체를 통해 포도당의 형태로 수확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농장과 목장을 드나드는 시냇물도 바람도 모두 재생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으로 활용되어 빗스코인으로 환산되었다.


암호화폐의 역사 초장기에는 빗스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의 실체가 재생가능 에너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부가 암호화폐를 합법적인 유일 거래 수단으로 허용한 산업분야였기 때문이다. 물론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통제하려는 정부가 자발적으로 암호화폐를 합법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재생가능 에너지와 같이 밀도가 낮은, 즉 정부나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돈이 안 되는 에너지 산업 부분을 떼어줌으로써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암호화폐 경제권을 허용하는 시늉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암호화폐 경제권에게는 정부로서는 전혀 의도하지도 않은, 예상하지도 못한 신의 한 수, 킬러 어플리케이션이 되어 암호화폐 경제권의 빅뱅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먼저 정부가 땅 짚고 헤엄치는 고수익의 에너지 산업이라고 움켜쥐고 있던 핵발전이 최단 수만 년, 최장 수백만 년 가는 방사능 오염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이 드러나면서 탈핵으로 이어지고, 재생불가능한 화석연료를 태우는 화력발전 또한 그 가공할 여파가 수만 년 가는, 어쩌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의 주범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과 함께 에너지 산업에서 퇴출되면서 재생가능, 지속가능 에너지는 행성 지구에 사는 고등생명체 지구인들이 사용하는 유일한 에너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확고한 합법적인 물질적인 기반, 곧 안정적인 채굴 광산을 확보한 암호화폐는 다른 경제분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서도 빗스코인은 그 경제 공동체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녹색 경제, 녹색 정치, 녹색 철학을 구현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빗스코인 공동체, 빗스코인 경제권은 재생가능 에너지 산업에 이어 재생가능 에너지와 환경친화적인 중간기술을 적절한 수준에서 활용하는 농업, 어업, 목축업, 수공업을 그 채굴 광산으로 추가하였다. 의식주, 에너지, 환경 관련 생산 활동으로 직결되는 육체 및 정신 노동으로 빗스코인을 채굴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빗스코인을 채굴할 수 있는 농사 짓기, 나무 심기, 가축 키우기, 베 짜기, 흙벽돌 만들기, 집 짓기 등은 마침 4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의 전면에 나서게 된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작정한 치밀한 계획과 노림수의 결과라기 보다는 다분히 빗스코인으로 제 살길을 찾아나선 구성원들의 유연한 집단지성이 발휘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이들이 빗스코인 경제권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없어졌다구요? 빗스코인 공동체로 오세요."


그 좋은 예가 바로 토마스와 로버트였다.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농장과 목장을 시작하여 자립한 경우였다. 모든 일자리는 로봇과 인공지능들에게 돌아가 있는, 모든 정보는 인터넷에 들어가 있는 세상에서 대학교란 곳에 진학할 이유가 없었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존재하지도 않는 직장을 잡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대학교육, 졸업장 그 자체나 취직시험 준비과정으로서의 대학교육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의미가 없어졌던 것이다.


빗스코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기본소득 화폐, 지역 화폐, 자선용 화폐에 이어 심지어 인터넷 게임용 화폐로 그 영역을 순식간에 넓혀갔다.


"오랜만에 운동 하고 나니 기분이 좋은 걸."

"이런 곳이 생겼는 줄 몰랐네."


토마스와 로버트는 시내에 들른 김에 헬스 클럽에서 운동하고 상쾌하게 씻고 나오는 중이었다.


"두 시간 열심히 달리고 밀고 잡아당기고 했으니 한 1천 킬로칼로리 정도 빠졌겠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몇 빗스코인 벌었는지로 계산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군. 아주 좋은 생각이야."


두 사람이 두 시간 동안 땀 뻘뻘 흘리며 회전 또는 왕복시킨 그 모든 운동기구에는 발전기가 들어 있었다. 헬스클럽 안에서 그냥 돌아가는 트레드밀이나 제자리 자전거는 한 대도 없었다. 심지어 그냥 들어올려졌다 내려지는 '죽어있는 무게'라 불리는 아령 조차도 가속 운동을 전기로 바꿀 수 있는 태엽 장치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생산된 에너지들은 빗스코인으로 환산되어 이미 식별되어 있는 사용자의 빗스코인 계좌에 입금되었다. 뱃살은 얇아지고 지갑은 두둑해지는 셈이었다. 두 사람은 이중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쓰기, 가상화폐 품목 2

비행은 즐거웠다. 토마스의 농장 넓이는 160 에이커. 산록 지대답게 대부분이 울창한 숲이지만 시냇물도 있고 그 주변으로 목초지도 있어 무척 다채로웠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농장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시냇물은 서산으로 많이 기운 햇빛에 반짝이는 동안 양과 소떼가 풀을 뜯으며 우리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무척 한가로웠다.


토마스는 비행을 좋아했다. 허공에 떠 있는 느낌 그 자체가 좋았다. 낮게 떠서 바람 따라 흐르는 열기구 같은 비행이 특히 좋았다. 너무 높으면 고소공포증보다도 지상의 물체들을 잘 볼 수가 없어 비행의 흥이 나지 않았고 너무 빨라도 마찬가지였다. 고도는 10 미터 정도, 속도는 초속 5 미터 정도. 딱 산들바람 타고 날아다니는 느낌이랄까.


위 아래가 투명한 강화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고 통짜 원형 날개 속에 장착된 프로펠러 여덟 개가 달린, 한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초소형 드론의 시험 비행이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이나 농장 위를 떠돌아다녔다. 농장의 경계 안에서 10 미터 높이에서 자유롭게 떠돌도록 한 채 위아래가 탁 트인 조종석에 앉아 열심히 땅 위를 내려다 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편안함에 나중에는 졸기까지 했다.


새로 산 드론이었다. 대금은 빗스코인으로 지불했다.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빗스코인으로밖에 살 수 없는 인기 상품 중 하나였다. 빗스코인 경제권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열혈 빗스코인 전사들의 열심이었다. 어떻게 보면 빗스코인을 만들어낸 자유-오프소스 소프트웨어 진영의 문화가 고스란히 이식된 듯했다.


그렇게 빗스코인만으로 사야 하는,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 또는 정부통화로는 아예 살 수 없는 상품들의 가짓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기본적인 의식주.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인 의식주는 이윤을 위한 장사나 투기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게 한 분야였다.


가상현실 섹스. 백억을 향해 가고 있는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인구 폭발을 동반하지 않으며 사회적 도덕적 물의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인간 본능의 관리 도구로 도입되었지만, 사람들을 빗스코인 경제권으로 유인하기 위한 최고의 낚시라는 비난도 받는 분야였다.


마리화나. 진정한 마약이 사라진 상황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유사 마약 역시 가상현실 섹스처럼 오해받고 있는 품목이다.


열혈 빗스코인 전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오직 빗스코인!" 상품의 가짓수를 늘리기 위해 연구와 투쟁을 병행하고 있었다. 토마스가 즐긴 드론은 연구의 결과였고 마리화나는 투쟁의 결과였다.


"빗스코인은 착한 생산, 윤리적인 소비의 지름길!"


열혈전사들의 주장이었다.


신세계

빗스코인은 새 세상을 열었다. 정부통화의 강제적인 유통으로 왜곡되었던 경제와 정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배 꼬이고 뒤틀렸던 인간의 정신을 바로잡는, 진정한 암호화폐였던 것이다.


마약.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었다. 특수한 의료 상황 말고는 마약을 찾는 파괴된 영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무기.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었다. 무기를 휘둘러 빼앗을 수 있는, 또는 무기로 울타리 치고 지켜야 하는 '그런 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섹스.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었다. 흰긴수염고래로부터 벼룩까지, 삼엽충에서 신인류까지 사고팔아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러움이 있을 뿐.


. 경제활동의 한 측면을 재는 도량형, 보이지 않는 저울이 되었다.


"빗스코인은 저울이다."


토마스가 야간 비행을 하는 동안, 밤하늘에는 천칭자리가 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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