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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기관
게시물ID : panic_1011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13
조회수 : 2197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20/03/06 12: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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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흔적기관



엄마가 아기를 직접 낳는다.. 현대 인류라는 포유류에게는 일종의 외부 흔적기관이라고 할 만했다. 백 년에 한 쌍 나올까말까한 그런 부부가 나타나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저는 외과의사이지 산부인과 의사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병원은 물론이고 의과대학에서 산부인과가 없어진 지 오래이고요."


후박사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후 의사로서 그토록 당혹스러운 상황은 처음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체내 임신으로 아이를 직접 낳는다는 말인가? 주치의로서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주관해야 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막막하기만 했다.


"십억이나 되는 인류가 하나같이 인공수정과 인공자궁 시스템을 통하여 지금까지 인구 정책을 잘 꾸려왔습니다. 왜 그런 어렵고 좁은 길을 선택하신 건가요?"


그는 의사로서, 그리고 인류를 구성하는 동료 시민으로서 정말 궁금한 대목을 물었다. 앞으로 2년 동안 펼쳐질 온갖 응급 상황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냥.. 자연스러운 임신과 출산을 해보고 싶어서..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온갖 짐승들도 제 몸으로 새끼를 낳고 키우는 데 같은 짐승이고 동물인 우리 인간들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요? 더우기 만물의 영장이니 만큼 그 또한 제일 잘 해내야 한다고 봅니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새끼로 태어나게 하자는 뜻도 있구요."


남편은 우물쭈물했지만 아내는 후박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 짐승.. 동물들도.."


오히려 후박사가 눈길을 피해야 할 정도의 열기였다.


그는 인류조화위원회의 강력한 인구조절 정책을 떠올렸다. 그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인구 조절이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필수불가결한 유일한 해법이라는 데에 전인류가 동의한 지 오래였다. 19세기 초입에 10억이었던 인류가 20세기 중반에 두 배가 되고 21세기에 들어서서는 70억을 넘어서며 백억이란 상징적인 숫자를 넘어 폭발하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도입된 게 바로 인공수정-인공자궁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인구조절 정책이었다.


"임신과 출산은 야만적이거나 동물적인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대자연과 신의 축복이지요."


아내 현주영이 딱 부러지게 말했다. 남편 구준영은 아내의 말에 말없이 고개 끄덕였다.


"하지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니란 점, 잘 아시겠지요? 의료적으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습니다. 애초에 자연스러운 임신과 출산을 원하시니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요."


후박사는 그렇게 현주영/구준영 부부와의 면담을 끝냈다. 의학도서관 서버 저장장치 깊숙한 곳에 처박혀 먼지, 아니 지난 백 년 동안 한번도 읽힌 적 없는 극소 자기장을 뒤집어쓰고 있을 산부인과 관련 자료를 뒤적여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백 년만에 뜬 의학계의 희귀 사례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자부와 기대 또한 컸다.


ㅁㅁㅁ


"딸이네요."


후박사는 현주영/구준영 부부와 함께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요즘 백 년 전 자료에 묻혀 살고 있는 후박사에게도 그 흑백 사진은 감동적이었다. 인공수정 단계부터 성비를 정확하게 반반으로 맞추는 인류번식 시스템에서는 있을 수 없는 확률, 그들 부부의 표현에 따르면 대자연, 심지어 신의 섭리에 따른 성의 결정이었다. 3개월밖에 안 된 태아의 흑백 사진이 그 어느 진귀한 무지갯빛 보석보다 더 영롱하게 보이는 듯했다.


"..."


현주영/구준영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흑백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화면에 떠 있는 그 흑백 사진을 찍어낸 초음파에 원래 팔음계가 있었고 그 중 한 음계는 그냥 귀로 듣지만 나머지 칠음계는 일곱 색깔 무지개로 바꾸어 눈으로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태아와 산모의 건강 상태를 검사하는 후박사는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그리고 태아의 부모에게는 말할 수 없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의문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태아라고는 하지만 태어날 날이 가까워지는데도 인공수정-인공자궁 시스템으로 태어난 신생아와는 너무나도 다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피부였다. 태아의 피부가 너무 밋밋했던 것이다. 의학도서관 서버에서 찾아낸 옛 자료들과는 일치하기에 기형은 아닌 게 분명했지만 달라도 너무 달랐다.


ㅁㅁㅁ


아기가 태어난 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매끄럽고 보드랍기 그지 없는 피부였다. 초음파로 보았던 그 피부 그대로였다. 의사인 그로서도 현실에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신생아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기는 너무 예뻤다. 아기의 엄마 아빠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보기에도 꼼지락거리는 갓난아기에게서는 꼭 집어낼 수 없는, 말로설명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과 예쁨이 햇살처럼 퍼져나오는 것 같았다.


특히 그 피부는 너무 매끄럽고 너무 부드러워 스치기만 해도 생채기가 날 것처럼 연약해 보였는데,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벌써 퇴원하겠다고요? 백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후박사는 강보에 꽁꽁 싸맨 아기가 누워 있는 작은 요람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현주영/구준영 부부를 선 채로 내려다 보았다. 백일이 아니라 태어난 지 사흘이었다.


"어떤 응급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데도요? 법정 입원일수, 백일. 아시잖아요?"


아기의 엄마와 아빠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후박사에게 그들은 요람을 가운데 두고 또아리를 튼 커다란 비단뱀 두 마리처럼 보였다. 실제로 아빠의 두 팔은 요람을 감싸고 있었고 엄마의 두 팔은 아기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수억 년 진화해 온 인류의 고유한 생명력을 신뢰하기로 했습니다."


엄마 현주영의 단단한 말이었다.


"백일까지는.. 다른 신생아들과는 아직 많이 다른데.. 걱정도 안 됩니까?"


후박사는 어느새 절박한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설명해줄 수 없는 진상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특히나 작고 연약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작은 요람 속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의 모습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는 특히 그랬다.


"다른 신생아들과 다르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기형아로 태어났다고 해도, 평생을 기형아로 살아가야 한다고 해도..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는 좋아요."


아기 부모는 완강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답답한 나머지 후박사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가 급히 얼버무렸다.


"백일잔치.. 우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인공수정-인공자궁 시스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 왜냐 하면 의사인 그 자신조차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었기 때문이다. 인공번식 시스템은 몸밖에 있었지만 현대 인류에게 제2의 장기나 마찬가지였다. 오장육부 사이 그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단단히 숨어있는 블랙박스였고, 숨기고 싶은 치부였고,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진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ㅁㅁㅁ


한 달에 한번씩 진영을 볼 수 있어서 후박사는 너무 행복했다. 진영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게 또다른 매력이었다. 양파 같은 매력, 프랙탈 같은 사랑스러움이라고 할까.


자신의 주변 공간을 플랑크 스케일까지 잠식해들어가는 아름다움의 자장?


자기가 현존하는 지금여기라는 특이점을 중심으로 시공간을 극한으로 왜곡하여 매력의 지평선 안쪽에 들어온 모든 시간, 공간, 인간을 자신의 안쪽에 가둬버리는 블랙홀 같은 매력?


엄마 현주영의 품에 안긴 진영이는 선녀라면 꼭 선녀라고 할 수 없었고 천사라면 기어코 천사라고 할 수 없었다.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시킬 수 없는 아름다움, 규정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태어난 지 칠개월이 되었는데도 갓난아기 피부 그대로였다. 그 연약한 무방비가 사랑스러움의 원천이라고 후박사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서.. 그게 걱정과 불안의 이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백일만 되어도 단단해지는 인공수정/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신생아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이다.


"!.. -~!.."


진영이가 음악 같은 목소리로 말이 아직 안 되는 괴성을 질렀고 동그란 눈으로 웃고 조그만 입술로 웃으며 엄마 품 안에서 팔다리를 물방개처럼 버둥거렸다.


엄마도 웃고 아빠도 웃고 후박사도 웃었다.


각자의 두개골 안에, 온 몸의 말초신경 모세혈관 끝까지, 온 우주에 박하 향이 폭발하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ㅁㅁㅁ


인공번식 시스템의 인공수정과 인공자궁은 인구조절 정책의 산물이 아니었다. 백억이 십억으로 줄어든 가파른 내리막길 인구 곡선 그래프에서 인공번식 시스템은 인구 곡선을 위에서 짓누르는 추가 아니라 실은 밑에서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다.


인간의 자연 번식 능력은 극도의 환경오염으로 무너진 지 오래였다. 인공수정과 인공자궁이 긴급히 개발되었고 투입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환경오염은 번식능력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살아있음' 그 자체를 위협했다. 방사능은 심근계와 중추신경계를 공격했고 공기오염은 허파를 파고들었고 중금속과 인공화합물은 뼈대와 신장을 파괴했다.


세대를 이어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인공자궁에 들어갔다 나와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심장과 허파와 신장을 인공장기로 갈아끼워야 했다.


태어난 지 백일이 되기 전에 그 모든 인공장기 이식을 마치는 것이 인류조화위원회의 결정사항이었다. 인류의 원초적인 불행과 트라우마, 원죄를 유아기의 무의식에 무단투기하기로 한 비겁한 이었다.


진영이의 건강하고 멀쩡한 심장을 도려내고 인공 심장을 달았다.

뽀얀 우윳빛 왼쪽 가슴에 흉측한 수술 자국이 독지네가 지나간 자리처럼 새겨졌다.

아빠 구준영은 극도의 신경에 걸렸다.


진영이의 건강하고 멀쩡한 폐를 도려내고 인공 허파를 달았다.

뽀얀 우윳빛 양쪽 가슴에 커다란 수술 자국이 구렁이 모양으로 길게 남았다.

엄마 현주영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진영이의 건강하고 멀쩡한 콩팥을 도려내고 인공 신장을 달았다.

뽀얀 우윳빛 배에 커다란 수술 자국이 검붉은 빛을 띠며 꿈틀거렸다.

아빠 구준영은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다.


"환경오염을 일차적으로 차단하게 될 것입니다."


후박사는 마지막 수술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영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환경오염에 팔 개월 동안 노출된 진영은 인공장기 이식과 피부이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영이의 건강하고 뽀얀 우윳빛 피부를 모두 벗겨내고 강인한 인공 피부를 이식했다. , 다리, 몸통, 머리를 나누고 팔과 다리는 좌우로 다시 나누고 몸통은 앞뒤로 더 나누어 피부를 벗겨냈다. 갓 구운 식빵처럼 드라왔 천연 피부를 죄다 벗겨내고 그 자리에 방사능과 중금속과 인공화합물에도 끄덕없는 파충류 가죽의 질감과 튼튼함을 가진 인공 피부를 영구적으로 입혔다.


진영의 퀭한 눈빛 엄마 현주영은 정신줄을 완전히 놓아버렸고, 아빠 구준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팔 개월의 짧은 행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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