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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게시물ID : panic_1012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1
조회수 : 85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4/14 09: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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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ㅁㅁㅁ


"마사키, 이제 그만 하고 잠이나 좀 자 두지?"


그는 거실 마루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아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현관 바닥 쪽으로 둔 채였다. 두 발에 착 달라붙는 가벼운 운동화가 믿음직스럽다. 일어서기만 하면 당장 마라톤 완주할 것처럼 종아리에 힘이 넘친다.


"알았어! 쪽발이들한테 또 졌네."


뜻밖에도 고분고분한 조카의 응대. 시간만 죽이는 철부지들의 이유 없는 총질은 아니라는 나름의 변명이다. 일어서서 운동화를 내려다 보는데 등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선 그의 코앞에 어느새 조카가 나와 서 있었다.


"삼촌은 일본 이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근데 오늘은 왠 일이야? 마사키라니."


조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삼촌이 화가 나서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리승일은 긴장 때문에 목소리가 굳었을 뿐, 조카에게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한 손을 조카의 어깨에 올리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일한 혈육. 특히 그를 많이 닮은 조카의 얼굴이 새삼 그의 눈에 들어왔다.


"총독부놈들이 국어전용법이다 뭐다 생난리를 치고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그렇다고 집에서까지 일본 이름을 쓸 건 없잖아. 집에서는 조선 이름, 밖에서는 일본 이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삼촌 본인이 그렇게 말했어."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조선총독부와 경무국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올해가 동학혁명 이백 주년이잖냐. 집에서든 밖에서든 일본어와 일본 이름만 쓰도록 하자. 조선어와 조선 이름은 우리 조선인들만 모인 가상현실 속에서만.. 알았지?"


"알았어. 동학혁명 때는 기관총이었다면 지금은 스마트 전투복인데 쪽발이들이 그런 첨단 게임 아이템은 조선사람들에게 아예 팔지를 않으니 어떻게 해볼 수가 있어야지."


조카는 자못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조카에게 웃어주고 나서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를 나왔다. 홀로 엘리베이터에 탄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무표정이 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서 들끓고 있는 증오와 긴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는 무표정이 딱이었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이백 년을 넘으면서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일본은 중국을 다 집어삼키지는 못했지만 만주는 확실하게 차지했다. 이백 년 넘게 조선과 만주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경영하는 그들은 동아시아의 절대강자였다. 오천 년 걸려 쌓아올린 조선 민족의 역사가 불과 이백 년만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희망의 불꽃은 꺼지기 직전이었다.


ㅁㅁㅁ


리원봉이 경무국 순사의 방문을 받은 것은 그날 밤이었다.


"미야모토 마사키? 함께 갈 데가 있다."


조선인 순사다. 그의 일본말은 물론 완벽했지만 그의 체격, 몸짓,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순사 복장이 썩 잘 어울리는 걸 보면 그 자는 인터넷 속 최신 가상현실은 물론이고 가장 오래된 개인 가상현실 공간인 자신의 꿈자리에서조차 조선말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그런 조선인일 터였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요 며칠 집밖에 나가 본 적이 없는데."


원봉의 뚱한 반응에 순사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그들의 전매특허인 고압적인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가 보면 안다. 빨리 채비를 서두르도록. 밖에서 기다리지."


순사는 그렇게 말하고 현관 문을 열고 나갔다. 번도 본 적 없는 순사의 예의바른 행동에 원봉은 잠시 멍청해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가 순사를 따라 들어간 곳은 광화문 앞 총독부 본관 백층 짜리 건물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속으로 욕을 한바탕 퍼붓고 나서 지난 일주일, 한 달, 한 해를 재빨리 복기해 보았다. 과거 역사를 테마로 한 가상현실 전쟁 게임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동학혁명군으로 싸운 게 그가 저지른 유일한 반일이었다. 반일은 조선인들에게는 인륜 너머 천륜을 거스르는 극악한 범죄였다. 살인보다 훨씬 더 무거운 죄로 다스렸다. 하지만 그것은 온라인 게임, 가상현실 속 이야기 아닌가. 게다가 일본인 청소년들에게도 인기 절정인..


고속 엘리베이터로도 한참 내려간 지하 공간에선 냉기와 함께 은은한 소독약 냄새가 배어 있었다. 몇 개의 문을 통과한 그는 한 기괴한 공간에 들어섰다. 맞은 편 벽은 바짝 다가들어 좁은 느낌이었지만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좌우 방향과 목을 앞뒤로 젖히자 눈에 들어온 상하 방향으로는 뻥 뚫려 소실점까지 멀어지는, 전체적으로 납작한 수직 허공. 가까운 수직벽과 멀어지면서 기울어져 소실선으로 수렴하는 두 벽, 절벽 중간에 좁게 튀어나온 바닥의 끝에서 올라와 있는 난간 뿐만 아니라 난간과 난간 사이에 뻥 뚫려 있는 허공, 그 너머의 벽면 할 것 없이 모두 하얗게 탈색되어 현실과 가상현실 너머 비현실과 비가상현실 속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앞에서 말없이 걷던 조선인 순사가 우뚝 멈춰 서더니 팔을 뻗어 벽면에 손을 짚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때서야 벽면에 그려진 네모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 세로가 석 자 남짓인 그 차가운 네모는 그를 에워싼 사방에서 치솟아 팔방으로 깎아지른 듯 멀어지는 수직벽 위를 따라 달리는 그의 멀어지는 시선 속에서 수천 수만 개로 무한 복제된다. 뒤돌아서 옆으로 휘둘러 보고 아래위로 훑어 보던 그가 의혹에 가득 찬 두 눈동자로 되돌아 서자마자 그와 순사 사이 벽에 그려진 네모 부분이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나왔다. 리원봉은 반사적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벽에서 튀어나온 길쭉한 사각기둥 모양 금속 상자 안에 아침에 집을 나섰던 삼촌이 누워 있었다. 그 상황과 그 광경이 너무나 초현실 같아 미야모토 마사키는 삼촌 미야모토 산세이가 뻣뻣이 누운 관 옆, 그 자리에서 꼿꼿이 선 채 얼어붙었다.


ㅁㅁㅁ


미야모토 산세이, 리승일은 의열단 단원이었다. 동학혁명 이백 주년을 앞둔 지난해부터 의열단은 매주 반일 폭력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는 쉰 번째 자원자였다. 작전 목표는 총독부 본관 건물에 들어가 폭탄을 터뜨려 시설을 파괴하고 총독부 관리를 폭살하기. 거사 준비는 완벽했다. 은밀한 점조직으로 전국에 깔려 있는 의열단 보급망을 통해 총과 폭탄이 그의 손에 쥐어진 때는 그가 총독부 건물에 들어가 검색대를 통과하고 막 모퉁이를 돌아선 뒤였다.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3층 사무실이 원래의 목표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욕심을 더 내고 말았다. 50층에 위치한 조선 총독 집무실로 직행했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자마자 경호원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경호 구역을 돌파하여 총독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오래 전에 총독과 목숨을 즐거이 맞바꾸기로 결심한 터라 그는 마지막 남은 생명력과 안간힘을 다해 플라스틱 폭탄을 총독 집무실에 던져 넣었다. 회심의 미소가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피어 올랐다.


뒤이어 마지막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리승일은 절명했다. 무심한 하늘은 그가 죽어가면서도 그토록 간절히 듣기를 원했던 폭음을 끝내 들려주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의열단 병기국은 결국 일제의 촘촘한 폭발물관리법을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철저한 단속 때문에 폭발물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제대로 조달받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낮은 품질의 대체 원료, 조악한 가내수공업식 생산시설, 표준화할 수 없는 공정과 같은 악조건 아래에서 병기국이 만든 각종 폭탄은 불발탄이기 일쑤였다. 의열단 전사들의 손을 벗어난 폭탄이 터질지말지는 더 이상 화학의 세계가 아니라 확률과 점술의 영역이 된 지 오래였다. 리승일 역시 죽는 순간까지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였지만 폭탄은 이번에도 터져주지 않았다.


"네 삼촌과의 공모 관계가 아직 입증되지 않았을 뿐, 앞으로 언제든지 널 잡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말도록."


조선인 순사는 마지막에 은근한 협박과 함께 본색을 드러냈다. 총독부는 폭탄투척 사실 자체를 보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삼촌의 장례도 불허했다. 시신 인도도 거부했다. 사실과 진실은 감추어서 의열단과 같은 불온반역 단체가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 명성을 쌓아가는 경로를 아예 틀어막으려는 속셈이었다.


조선총독부 앞에 선 리원봉은 아득히 높은 백층 꼭대기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이백층 지하를 꿰뚫어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그의 시선을 차단해버렸다.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백층 짜리 조선총독부 건물의 지하에 이백 층 짜리 공동묘지를 조성해놓은 셈이었다. 아니, 악독한 일제는 지난 이백 년 동안 살해한 조선 사람 천만 명을 차곡차곡 채워넣고 다진 기초 위에 초현대식 조선총독부 본관 건물을 올리고, 그것도 모자라 일년에 한 층씩 더 파내려가며 공동묘지를 늘려가는 중이었다. 리원봉은 그 거대한 지하 공동묘지,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열사들의 떼무덤 앞에서 일제의 끝모를 잔악성과 괴기스러운 악마성에 치를 떨었다.


ㅁㅁㅁ


리원봉은 불과 보름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확한 제자리는 아니었다. 광란의 총질 게임으로 즐기던 온라인 가상전투에서는 냉철해졌고 일을 제대로 배울 생각도 않고 뺀질거리는 도제로서 주변을 맴돌기만 했던 삼촌의 인쇄업은 어쩔 수 없이 물려받았다. 인쇄업은 가업이라 이어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인쇄. 활자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글자와 문장과 책의 낱장을 박아내는 평면 인쇄는 물론 아니다. 플라스틱 고분자부터 우라늄 원자까지 잉크로 쓰면서 삼차원 구조물을 찍어내는 입체 인쇄였다. 잉크의 다양성과 속단면과 겉표면을 한꺼번에 성형해내는 그 유연하고 경이로운 특성 덕분에 현대 일상용품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기간산업이 바로 인쇄업이었다. 어떤 천재 인쇄공이 입체 인쇄기로 핵폭탄까지 만들어냈다는 도시의 전설이 나돌아 원봉의 귀에까지 들어갔지만, 삼촌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옛날 방식으로 만든다면 수백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하는 최신 셀폰이나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요리법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는 칠면조/오리/닭 마트료시카 요리, 그러니까 닭 품은 오리를 칠면조로 포장해 핵자기 공명 장치에 넣고 좌표를 찍어가면서 전자파 렌즈 초점에 모은 마이크로파로 정교하게 굽는다는 요리도 한번의 스캔, 번의 적층으로 일거에 만드는데, 그까짓 핵폭탄 하나 못 만들겠어?"


끝이 없는 입체 인쇄기 실습에 지겨워져서 원봉이 그 도시의 전설을 꺼냈는데 삼촌의 대답은 명쾌했다.


"설계도만 있다면 핵폭탄 기폭장치 정도까지는 어렵지 않겠지. 핵폭탄 자체도 아마 그럴 거야. 네 말대로 세 새 마트료시카 요리도 일거에 찍어내는 입체 인쇄기를 쓰면 말이지. 그런데 문제는 잉크야. 방사능 오염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핵폭탄 제조용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어디에서 구할 거야? 무쇠 잉크, 알루미늄 잉크도 구할 수 없는 마당에.."


그랬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구입할 수 있는 잉크는 플라스틱류로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인들은 패션 단추나 찍어내고 프라모델 장난감이나 만들어 팔라는 것이었다.


"장난감 시장이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 장난감 가짓수는 또 어떻고. 모르긴 몰라도 온 세계 입체 인쇄기의 절반 정도가 아마도 장난감을 찍어내고 있을 걸."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가상현실 게임에서 스마트 전투복을 살 수 없었던 일을 상기하며 원봉이 분개할 때 삼촌이 한 말이었다.


그는 지금 바로 플라스틱 장난감들을 찍어내고 있었다. 삼촌에게 물려받은 수많은 장난감의 설계도면을 그대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는 않았다. 캐캐묵은 플라스틱 잉크만 허용된 그가, 온갖 잉크를 다 쓰는 일본인 인쇄공과 일본계 인쇄회사들과 경쟁하려면 새로운 디자인 밖에 활로가 없었다. 그 자체가 컴퓨터이기도 한 입체 인쇄기의 프로그래밍. 가상현실 게임의 비밀 해법을 찾던 열성으로 그는 갓 이어받은 가업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생분해 가능한 특수 폴리머 잉크. 조선인 인쇄공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플라스틱 잉크였다. 다양한 물리적 특성을 갖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은 금지 품목이었다.


"다른 플라스틱 잉크들은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음."


조선총독부 산하 산업자원부의 입장이었다. 물론 조선인 인쇄공들에게만 적용되는 환경보호 의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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