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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악마의 질문
게시물ID : panic_1014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1세기인간
추천 : 7
조회수 : 124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05/14 22: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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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살릴 것이냐, 천명의 목숨을 살릴 것이냐?”

  악마의 말이 전 세계에 울렸다. 악마는 사람들에게 놀랄 시간도 주지 않고는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시간은 넉넉하다. 다음 달까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고 와라.”

  갑작스러운 악마의 등장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질문은 섬뜩했다.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살릴 것이냐, 천명의 목숨을 살릴 것이냐?’

  “물론 생명을 저울질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명보다는 천명을 살리는 게 옳지 않을까요?”

  “그럼 그 한 명은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천명을 죽일 순 없잖습니까?”

  사람들의 의견은 천명을 살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명을 살리려고 천명을 선택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다만, 질문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 할 건지만 물어보는 건지, 진짜 누군가를 죽여버리는 건지, 질문의 당사자인 한 명과 천명도 지목되는 건지, 아니면 무작위로 선출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좋은 단서가 등장했다. 한 방송국에 이상한 제보가 잇달았다.

  “제 아들의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생겼어요.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손에 잡히지 않아요.”

  “교도소에서 일하고 있는 간부입니다. 일부 죄수들의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생겼습니다. 특히 죄질이 나쁜 죄수들 위주로 생겼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런지, 요즘 환각이 보입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이상한 고리가 제 머리 위에 보여요.”

  검은 고리? 각종 언론들의 추측성 보도에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는 검은 고리로 도배되었다. 악마가 질문을 던진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악마의 등장이 큰 파급력을 가져오자 정부는 이에 대해 입장을 밝힐 필요성을 느꼈다. 관련 전문가가 정부의 입장를 발표했다.

  “아마도 악마가 말한 천명은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들은 ‘지목’당한 거죠. 물론 악마가 말한 한 명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전문가의 주장에 동의했다. 하지만 악마가 말한 한 명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들 중에 그 한 명이 있는 것일 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 주일이 지났다.

  “이제 일주일이 남았습니다. 악마의 등장은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정부도 아직은 어떤 입장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현재 팔백여 명을 찾았고…”

  대통령은 직접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보다도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대통령의 머리 위였다. 대통령의 머리 위에 하얀 고리가 있었다.

 

 

  “악마가 말한 한 명은 바로 대통령입니다. 대통령과 천 명 중 선택하라는 겁니다!”

  아주 그럴듯한 추측이 나왔다. 대통령의 목숨이냐, 시민의 목숨이냐. 꽤 어려운 문제였다. 시민이 한두 명도 아니고 천 명이나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죽이기도 애매했다.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인데…

  분명 사람들은 천 명의 목숨이 한 명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 한 명이 대통령이 되자 말이 달라졌다. 어쩔 수 없는 이치였다.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고작 천 명 사라진다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또 다르게 말했다.

  “천 명을 살려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말을 바꾸네요. 그쪽 지지자들 특징입니까? 대통령이면 국민을 위해 일해야죠. 그럼 천 명을 위해 희생당할 각오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을 싫어하는 언론들은 악마에게 지목된 천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여론을 모았다. 악마에게 지목된 사람들이 절규하는 표정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대통령의 실책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론이 천 명을 살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초조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고심 끝에 여론을 바꿀 방법을 모색해냈다.

 

 

  ”정부의 조사 결과,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들 중 10% 이상이 사형수입니다. 정부는 악마와 그들의 연관성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있는 게 우연일 리가 없었다. 악마가 그냥 무작위로 골랐겠는가? 대통령을 좋아하는 언론들이 반응했다.

  “성폭행 전과 9범 손동욱의 머리 위에도 검은 고리가 있습니다. 검은 고리는 악마랑 연관이 있는 겁니다.”

  “검은 고리는 타락한 천사라는 뜻입니다. 악마가 굳이 검은 고리로 지목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들을 전수조사해야 합니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악마로 몰았고,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악마로 몰았다. 하지만 결국, 대통령을 살려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저도 머리 위에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밝혀서 죄송합니다.”

  사람들은 욕을 퍼부을 준비를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전직 대통령이었다.

 

 

  전직 대통령과 999명을 살릴 것이냐, 현직 대통령을 살릴 것이냐.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은 같은 당이었다. 게다가 서로를 지지했었다.

   사람들은 현직 대통령보다는 전직 대통령을 더 지지했다. 애초에 전직 대통령 때문에 현직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 건 너무 차가워 보였는지, 다른 명분을 가져왔다.

  “생명을 가지고 저울질하는 게 옳지 않더라도 한 명보다는 천 명의 목숨이 소중합니다. 천 명을 살려야 합니다.”

  이쯤 되면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게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여론은 천 명을 살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현직 대통령은 또 고심했다…

  “제가 차마 공개하지 못했던 게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모 대기업에서 뇌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반드시 심판합시다!”

  여론이 한 명을 살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자 전직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 아들이 어디 기업 다니시는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현직 대통령은 공기업 사장에게 자기 아들 취업시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반드시 심판해야 합니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마치 대선을 보는 듯했다. 999명의 검은 고리가 있는 사람들은 아예 논외였다. 사람들도 그들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한 달이 지났다. 악마가 다시 찾아왔다.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 누가 죽을지 전국민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방송사들은 시청률을 기대하며 관련 프로그램들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한데, 악마의 말은 허무했다.

  “음… 그냥 그 질문은 없던 거로 하지. 그럼 이만.”

  그게 끝이었다. 모두가 죽지 않게 된 것이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실망했다. 



  사실 악마는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냥 요즘은 사탄보다 인간들이 더 하다길래 한 번 들러봤다. 그는 깨달았다.

  ‘당분간 이 나라엔 안 와도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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