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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두 번째 달 - 26. 초록빛 바다
게시물ID : panic_1015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른이의꿈(가입:2012-12-31 방문:930)
추천 : 5
조회수 : 22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6/21 12: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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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록보관소’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기록보관소'의 몸통에 수많은 안테나를 만들어 붙였다.

블럭들은 나의 의도한 형태에 맞추어 움직여주었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순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블럭이 있음을 알아냈다.

이 블럭과 인접하고 있는 다른 블럭들 역시 움직임에 문제가 있었고,

이들 블럭 사이의 전류 전달 역시 원활하지 않았다.





확인 결과 이들 블럭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즉, 전류 전달이 불안정하다는 말은 이들 블럭들 사이에 작은 이물질이 끼어있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블럭의 물리적인 움직임에도 제약이 있다면,

이들 블럭들은 실처럼 얇고 긴 물질에 의해 서로 엉켜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블럭들 사이의 전압 손실값을 이용해 이물질의 크기를 계산했다.

블럭들 사이에 끼어있는 이물질은 약간의 전기 전도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 두께는 90-110 마이크로 미터로 추정되었다.





약 100 마이크로 미터,

즉 0.1 밀리미터 두께에 약간의 전기 전도도를 가지는 실처럼 긴 물질.

그것은 인간의 머리카락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나는 이들 블럭들의 과거 사용 기록을 확인했다.

이들은 나와 함께 우주 정거장에 들어갔던 블럭 중 일부였고,

트살을 정원으로 옮길 때 머리 부분을 받치고 있던 블럭들이었다.

아마도 트살을 정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트살의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뽑혔고,

뽑힌 머리카락이 블럭에 엉겨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보관소'에는 태양빛을 직접 받는 블럭과 그렇지 않은 블럭들 사이의 온도차는 최대 150 도가 넘는다.

그래서 블럭들은 150 도가 넘는 온도 변화에 따라 조금씩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열수축 또는 열팽창으로 외각의 블럭들이 움직이면,

이 움짐임에 맞춰 그 내부의 블럭들 역시 유기적으로 움직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블럭 사이에 간극이 생기면서 전력과 자료 전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특정 블럭에 강한 압축 응력이 가해져 블럭이 변형되거나 파손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임이 온전치 못한 블럭이 있다면 ‘기록보관소'에서 제거하는 것이 맞다.





나는 트살의 머리카락으로 엉겨붙은 블럭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37 개의 블럭에 저장된 데이터를 다른 온전한 블럭으로 옮겼다.

이들 블럭들을 우주 밖으로 튕겨내기 위해 ‘기록보관소' 외각으로 움직이던 중 전파가 들어왔다.

AuTX-3463의 요청이 담긴 메시지였다.

“지난 달 자료가 수신되지 않았음. 바쁜 일이 없다면 최대한 빨리 보내주기 바람.”





한달에 한번씩 나는 지상의 센서 기지국과 인공위성의 자료를 정리해서 AuTX-3463에게 보내주었다.

그런데 어제가 녀석에게 자료를 보내주는 날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약 30 분이 지나면 ‘기록보관소'는 지구의 그림자 영역에 들어간다.

지구의 그림자 영역에 진입하면 전력이 생산되지 않아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다.

30 분 동안 자료를 정리해서 녀석에게 보내주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엉켜붙은 블럭을 제거하는 일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나는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기록보관소'가 지구의 그림자 영역으로 들어가기 직전,

정리한 자료를 AuTX-3463에게 보내줄 수 있었다.





지구의 그림자 영역.

태양빛을 받던 ‘기록보관소' 외각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섭씨 100 도에 육박했던 외각의 블럭들은 어느새 영하 50 도까지 냉각되었다.





우주는 추운 곳이다.

인간은 추위를 느낄수록 더욱더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앞으로 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오래전 루오에스가 외로움을 느끼는 감정 능력을 삭제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지구의 그림자 영역을 지나는 시간은 약 3 시간 정도.

오늘따라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기록보관소'가 그림자 영역을 벗어나자 외각에 위치한 블럭들의 온도가 올라갔고,

전력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머리카락에 엉킨 블럭들을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행동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친구의 마지막 흔적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엉킨 블럭들.

이들 블럭이 다른 정상적인 블럭들과 섞여있으면 분명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않게 이들 블럭들을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한참이 지나 나는 ‘기록보관소' 몸통의 중심부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트살의 머리카락이 엉킨 블럭들을 위치시켰다.





우주 공간은 무중력 상태이다.

머리카락이 엉킨 블럭 덩어리는 ‘기록보관소' 중심부 빈 공간에서 다른 블럭들과 접촉없이 둥둥 떠있는 상태가 유지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기록보관소'의 중심부는 수백겹의 블럭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영하 50 도의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트살의 머리카락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온전히 남겨질 것이다.

‘기록보관소' 중심에 남아있는 친구의 흔적.

나쁘지 않다.

앞으로 트살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AuTX-3463에게 또 다른 요청이 들어왔다.

1. 지구에서 관측되는 산소 농도 자료를 24 시간마다 보내줄 것.

2. 우주 정거장이 착륙한 위치와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센서 기지국까지 거리를 알려주기 바람.





AuTX-3463은 우주 정거장이 지구에 착륙한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아는 것일까?

우주 정거장은 지구에 착륙하고 전파를 4 번 송출했다.

나는 우주 정거장이 4 개의 산소 생산 장치의 개방을 알린 시각을 확인했다.

그 시각 우주 정거장이 착륙한 지점은 목성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송출된 전파 강도 역시 그리 강하지 않았다.

녀석이 있는 목성까지 닿을 수 있는 전파가 아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답변을 보냈다.

1. 자료를 매일 보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데, 24 시간마다 자료 수신이 가능한 거야? 네가 목성에 가려지는 시간에는 전파 수신이 어려울 것 같은데?

2. 우주 정거장이 착륙한 장소는 가장 큰 대양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그곳에서 대기에 노출된 센서 기지국까지는 1020 km이고, 수중에 위치한 기지국은 270 km 정도임.

3. 그런데 우주 정거장이 지구에 착륙한 것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녀석의 답변이 돌아왔다.

“전파는 알아서 받을테니 우선 보낼 것. 가장 큰 대양의 정중앙에 착륙했다니 다행임. 지금 많이 바쁘고 더 바빠질 것임. 중요한 일 아니면 묻지 말 것.”





녀석의 답변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문득 녀석과 트살이 가끔씩 통신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트살은 늘 녀석과의 통신 기록을 모두 삭제했기 때문에,

나는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트살이 녀석에게 우주 정거장의 착륙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주일 후.

산소 검출을 알리는 자료가 수신되었다.

우주 정거장이 착륙한 위치에서 268 km 떨어진 수중 센서 기지국이 보내온 자료였다.

물에 녹은 용존 산소의 농도는 0.01 mg/L를 밑도는 아주 작은 값이었다.

하지만 산소가 검출되었다는 사실은 생명 반응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우주 정거장의 정원에는 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먼저 정원의 식물들이 만들어낸 산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주 정거장은 착륙 후 이틀 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우주 정거장 정원의 식물들은 짠물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바닷물의 염도는 지구가 멸망하기 전 바닷물 염도의 두 배에 가까웠다.

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이다.





혹시 우주 정거장의 산소 저장 탱크에서 산소가 누출된 것은 아닐까?

우주 정거장이 착륙한 위치와 센서 기지국 사이의 거리는 268 km이다.

물에 녹은 산소의 확산으로 268 km 거리에서 0.0089 mg/L의 용존 산소량이 검출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역시 우주 정거장의 산소 저장 탱크 역시 답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산소가 만들어진 것일까?

나는 인공위성의 망원경을 움직여 우주 정거장이 착륙한 위치를 확인했다.





초록빛 바다.

우주 정거장이 착륙했던 위치의 바닷물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나는 인공위성 망원경의 영상의 초점 거리를 바꿔가며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해류를 따라 초록색 띠가 만들어져 있었다.

대양의 중앙에서 시작된 초록색 띠는 어림잡아 폭이 2 km에 길이만 80 km에 달했다.





호수와 바다가 만들어지고 지난 2 년 동안 어떤 생명 활동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 전 우주 정거장이 지구에 착륙한 바로 그 위치에서 녹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그때서야 우주 정거장이 착륙 직후 보낸 메시지를 생각해냈다.

산소 생산 장치의 개방을 알려준 4 개의 메시지.





우주 정거장의 지하실에 위치한 산소 생산 장치는 유전자가 조작된 녹조 미생물로 가득찬 수조였다.

우주 정거장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따로 포집되어 이 녹조 미생물 수조로 공급되었다.

수조 속 녹조 미생물은 태양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며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변환시켰다.

그래서 녹조 미생물이 담긴 4 개의 수조는 산소 생산 장치라 불렸다.





산소 생산 장치의 개방은 수조에 담겨 있던 녹조 미생물을 바다로 방사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방사된 녹조 미생물은 해류를 따라 움직이며,

광합성을 통해 바닷물에 녹아있는 탄산염 형태의 이산화탄소를 소비하면서 동시에 산소를 생산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있다.

현재 바닷물의 염도는 70 g/L에 육박하고 있다.

이런 높은 염도의 물에서 어떻게 녹조 미생물이 큰 문제 없이 자랄 수 있었을까?

이렇게 높은 염도에서 미생물이 생존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설사 몇몇 미생물이 생존하더라도 높은 염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단 일주일 사이에 80 km에 달하는 녹조 띠를 만들수 있는 확률은 사실상 0에 가까웠다.  





비록 극히 낮은 가능성이었지만 트살은 애초에 이것을 노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 이후 우주 정거장을 바다 위에 착륙시켰고,

가장 먼저 산소 생산 장치를 개방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트살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대기 중으로 방출된 이산화탄소의 양이 상당했고,

지금도 이산화탄소의 방출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바다를 가르며 만들어진 초록색 녹조 띠를 자세히 확인했다.

녹조 띠의 길이는 81 km로 길었다.

녹조 미생물이 해류를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녹조 띠의 평균 폭은 고작 1.8 km에 불과했고,

무엇보다도 그 폭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즉, 녹조 미생물이 충분히 퍼지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역시 너무 높은 염도 때문이다.





나는 AuTX-3463에게 전파를 송출했다.

“좋은 소식이 있어. 바다에서 용존 산소가 검출되었어. 농도는 0.0089 mg/L. 그리고 우주 정거장의 산소 생산 장치에서 방출된 녹조가 자라고 있는 것도 확인했어. 그런데 바닷물의 높은 염도로 녹조 미생물이 빠르게 퍼지지 못하는 것 같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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