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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2
게시물ID : panic_1018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3
조회수 : 69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10/20 21: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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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2

 

   

 ㅁㅁㅁ
 


"키요토다카게 키요토."

 

원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 중요한 순간에 호흡이 흐트러질 뻔했다조선 총독 카게 탄의 손자불길처럼 치솟던 분노는 규조토 만난 니트로글리세린처럼 온몸의 모세혈관으로 퍼져나가 흡수되며 차갑게 식어버렸다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다행히 홀로그램 가면에 가려졌지만.

 

"리원봉이다."

 

채 흩어지지 못한 분노의 여파 때문인지 원봉의 입에선 조선 이름이 튀어나왔다상대도 가면 뒤에 숨긴 것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는다. 22세기 조선현실 세상에선 불법을 넘어 금기시되는 조선어와 조선이름은 나름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상현실 속 게임 방언과 가명으로 인기가 높은 탓일 터였다

 

온라인 전투는 게시판을 통해 조직되는 게 보통이었지만 동학혁명 200주년을 맞이하여 벌이는 동학혁명 전쟁 연작 시리즈는 쌍방이 각각 사전 모임을 갖고 협상 대표단을 선출하고 선전포고에 버금가는 프로토콜을 따르기로 했기에 한쪽 다섯씩 모두 열 명이 모인 자리였다.

 

협상이랄 것도 없었다동학혁명 전쟁의 결정적인 장면인 우금치 전투의 전체적인 틀과 판은 고증하여 복원하고 세부적인 전투 진행상황은 전투 참가자들의 재량에 맡기기로 했기 때문이다양측 군대의 편제와 무기체계첫 배치 장소와 시간 등은 고증한 대로이지만그 이후의 구체적인 전투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는 게임 참가자들의 게임 당일 어떻게 싸우느냐에 달려 있었다압도적으로 적의 편인 객관과 운명의 거대한 무게를 동학군 각자의 주관과 투지가 얼마나 견뎌낼지 어떻게 받아낼지가 관건이었다타임머신이 없어 영원한 시간의 감옥인 '지금', 200년 전 우금치의 현실 역사는 고정불변일지라도 그 200년 뒤에 벌어지는 가상현실 우금치 전투의 승패는 아직 열린 결말이라고리원봉을 비롯한 동학군 수뇌부들은 마음 속으로 애써 외치고 있었다.

 

"무라타 소총과 죽창의 대결너무 싱겁겠는걸."

 

키요토가 협상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기 동료들에게 한 말이었다동학 수뇌부는 앉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원봉은 고개를 들지도 돌리지도 않았다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한 모세혈관 속 피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ㅁㅁㅁ
   

온라인에서 농민과 동학교도 2만 명 모으기는 어렵지 않았다민족의 아픈 역사가 걸린 무거운 주제였지만 가볍게 생각하자면 또 한없이 가벼워져서 흔치 않은 딱 한 번의 대규모 온라인 전투 게임으로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전체적인 분위기는 처음엔 가벼웠다가 역사 학습과 군사 훈련이 진행되면서 점차 무거워져 갔다

 

조작이 느리고 번거로운 화승총에 속이 터졌고 적들의 무라타 소총이나 스나이더 총 그리고 개틀링 기관총 대응 훈련중에는 절망감에 빠졌으며 결국에는 분통 끝에 찾아오는 극심한 무력감 이겨내기가 사실상 훈련의 태반일 지경이었다화승총을 지급받은 이들은 그나마 나았다죽창을 든 이들은 그야말로 손발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야 했다화승총보다 몇 배나 긴 사거리 뒤에 숨어 보이지도 않는 적들이 쏟아내는 총탄 속에서 죽창의 의미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담했다전장은 황토와 초목이 우거진 산과 들과 언덕에서 초고속 중앙처리장치와 대용량 기억장치에 흐르는 무수한 전자들이 펼쳐내는 영롱한 가상현실 속으로 옮겨졌지만그리고 적어도 아군들은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일지라도 뼈아픈 역사와 처절한 전투를 학습하고 훈련받아 병법과 정신무장을 현대화했지만전투의 진행과 결과는 거의 한 치도 변함없이 되풀이되었다적들이 완벽한 전투 혹은 학살 시뮬레이션 게임을 마음껏 즐기는 동안 동학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두개골이 부서지고 심장이 터지고 사지가 찢겨 속절없이 스러져갔던 것이다그 광경이 너무 처참하여서 전투 참가자들과 일본 열도와 조선 반도 전역에서 생중계 방송을 본 시청자들 중 어떤 이들은 전투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신들의 컴퓨터 회로기판에서 혹시 핏물이 배어나오지 않는지 몇번씩이나 들여다보는 신경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철학자의 서재에서는 정신이 육신을 부리고 주관이 객관을 그려낼지는 몰라도적어도 전쟁터에서만큼은 무기 체계와 화력이라는 무미건조한 조건이 승패는 물론 생사와 영혼의 구원 여부까지 결정한다는 게 역사 모의실험곧 게임으로 증명된 셈이었다수백 배 차이나는 화력 앞에서 그 어떤 생명력그 어떤 정신력그 어떤 의미도 단 한순간도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전투전투적인 역사를 가상현실 속에서나마 일부 재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는 후문이다."


카게 키요토가 그들의 엉성한 활 만큼이나 축 늘어진 표현을 정색하며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았다그는 실제 전투에서 이긴 장군이나 지휘관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있었다전투 설계 단계에서 양측 협상 대표단이 만났던 것처럼 게임 프로토콜에 따라 전투 평가를 위해 리원봉과 동학군 대표단을 만나고 있는 오늘의 자리를 이백 년 전 11월 어느 날쯤으로 진정 착각하는 것 같았다.   

 

"승자도 패자도 역사에서 많이 배우겠지."

 

리원봉은 맞은 편에 앉은 키요토를 응시하며 그렇게 건조하게 말했지만바로 그때의 일련의 전투 이후 조선의 국운은 이백 년 동안 내내 가파른 내리막길이라는 현재진행형 사실이 그의 뒷덜미를 뻐근하게그리고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스마트 전투복 갖춰입은 정규군이 무명옷 마저 헐벗은 농민들을 학살한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데 왜조선은 역사 속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늘 그 모양이어야 하는데?"

 

리원봉 쪽 누군가의 말에 키요토가 곧바로 비아냥거렸다


"게임 속 말고 게임 밖에서 다시 싸운다고 달라질까?"


키요토의 자신만만한 조롱이 거듭 이어졌다리원봉은 자신들이 지금 조선총독부 건물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조선 열사 천만 명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이기도 한 그곳그의 부모님과 삼촌이 묻혀 있는 그곳무수한 조선 민중들의 선산을 파헤쳐 다시 파묻어버린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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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을 달렸다심장은 이미 한계를 넘은 상태가까스로 바위 뒤에 몸을 숨긴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아무도 뒤따라오지 않았다모두 당한 것이다거친 바위에 등을 대고 앉은 그의 눈 앞에 야산 자락이 잡목 숲 쪽으로 천천히 내려가 사라지고 있었다내리막길예감이 좋지 않다아니패배를 직감했다

 

"항복하라!"

 

위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벌떡이는 가슴을 오른 손으로 누른 채 잠시 갈등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심장에 걸렸던 과부하가 느슨해지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로 손이 내려갔다날카로운 고통다음 순간 그의 눈앞에 피에 물든 자신의 손바닥이 올라왔다

 

페인트볼로 시작했는데적이 열 명에서 다섯 명으로 줄어들자 고무탄이 날아왔다전투복을 뚫지는 못했지만 묵직한 충격이 뼈까지 전해졌다맞은 대원들은 몽둥이에라도 맞은 듯 나가떨어져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고무탄의 구경이 페인트볼과 다른 걸로 봐서그리고 고무탄의 위력으로 볼 때 적들은 탄환 뿐만 아니라 총 자체를 바꾼 모양이었다.

 

"이 놈들이 비겁하게!"


누군가 분노해 외쳤지만 그뿐이었다모의전투 훈련장이 조성되어 있는 산 전체가 텅 비어 있는 시간이었다게임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진행요원도 없었고 감시 시스템도 꺼진 상태였다그들은 연달아 날아오는 탄환을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내달렸다그리고 곧 그는 홀로 쫓기는 사냥감이 되고 말았다.

 

"마사키항복하라!"

 

키요토가 다시 외쳤다리원봉은 몸을 숨기고 있던 집채만한 바위 위로 기어올라가 바위에 붙어 자란 소나무 그늘에서 소리나는 쪽을 응시했다그의 대원 두 명이 열 명의 적들에게 잡혀 있는 게 보였다전투복 어느 곳에라도 페인트볼에 적중되면 총이 작동을 멈추어 게임에서 강제퇴장하게 되어 있었지만그들은 페인트볼에 맞았던 다섯 명을 포함해서 모두 페인트볼을 발사하는 공기펌프 총 대신 낯선 총을 들고 있었다

 

항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게임에 진 치욕도 치욕이지만굴욕을 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온 세상에 방영되고 영구 저장되어 틈만 나면 재방송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총을 들어 조준했다최후의 한 발은 키요토의 얼굴에 명중했다빨간 페인트는 그의 얼굴 절반을 물들였다그러자 키요토는 얼굴처럼 아수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페인트볼도 고무도 아닌 실탄이 발사되었다

 

리원봉은 한쪽 눈을나머지 대원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들을 잃었다그들의 시신마저 조선총독부 건물 지하에 감금되었다우금치 온라인 전투에 이어 오프라인 모의전투 게임에서도 조선은 처절하게 패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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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도 잃고 왼쪽눈도 잃은 리원봉은 한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지만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지독한 그 상실감을 떨쳐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눈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인공눈을 이식했다빛을 감지하여 전기 신호로 바꾸어 아직 죽지 않은 시신경에 전달해주는 장치는 소형 모터로 구동되는 조리개와 박막형 광반도체 망막을 바이오 폴리머 공 속에 담은 것이었는데언뜻 보기에 막 안와에서 적출해낸 눈동자 같았다

 

"적외선 감도를 높이고가시광선 쪽은 최소화해주세요."


"그러면 빛보다 열을 시각화하자는 것인데정상적인 경우와는 아주 다른 느낌으로 세상이 보일 겁니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그림 보여주지 않는 세상보이는 것 덜 보고 보이지 않는 것 더 찾아보고 싶어서요."


인공눈은 이식해준 의사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그는 정말 세상이 꼴보기 싫은 상태였다또 어차피 가상현실에 접속하고 나면 컴퓨터 속 세상은 그의 오감 따위는 가볍게 건너뛰어버리고 뇌와 직접 연결할 터이긴 했지만.

 

당장의 고통이었던 눈 문제가 해결되자그 동안 등한시했던 본업으로 되돌아갔다게임 같은 것은 잊고 입체 인쇄술에 깨어있는 시간 거의 전부를 쏟아부었다삼촌 어깨 너머로 얼렁뚱땅 배웠던 것들을 이론과 기초부터 탄탄하게 쌓아올리고 입체 프린터의 소재부품장비에다 잉크까지 직접 설계제작 해낼 수 있는 정도로 자신을 갈고닦아나갔다


일제가 강요한 입체 인쇄의 한계곧 금속의 결핍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지우회할 것인지가 당장의 도전이었다입체 프린터를 설계 단계부터 뜯어고쳐야 했고 금속 알갱이를 나노 단위로 설계하고 가공해야 하는 난제들이 수두룩했다총독부가 허가한애들 장난감 총이나 만드는 폴리머 잉크 전용 프린터로 부품을 찍어내어 진짜 총과 탄약을 인쇄할 수 있는 진정한 입체 프린터를 조립해낼 수 있을까이를 테면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 입체 프린터거칠기 짝이 없는 무쇠 알갱이 잉크로 곱디 고운 황금가루 잉크를 '인쇄'해내는 그런 마법같은 입체 프린터모든 마법을 현실로 만드는 과학이란 연금술을 믿는 그에게는 단순한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리고마지막으로 리원봉은 의열단 단원이 되었다삼촌의 동지들이 보증인이 되어 주었다일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물리쳐야 하는 적이었다온라인 게임모의전투 게임으로 그걸 할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우리 군대를 온라인으로 연결하고 모의전투로 훈련시켜야 하겠지만적과는 결국 오프라인에서 강철과 화약으로 살과 뼈와 피로 맞부딪혀야만 했다그래야만 이 땅에서 그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일제를 끝장내는 그날까지!"


리원봉은 삼촌의 동지이제는 그의 후견인이자 동지가 된 리완일의 손을 움켜잡았다벌써 여섯달 전만주에서였다. 22세기의 초연결 사회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촘촘한 초연결 감시망으로도 그와 함께 진화하는 의열단의 은밀한 초연결 활동을 일제도 완전히 봉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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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물의 표면 뿐만 아니라 이면까지 꿰뚫어 보는 그의 왼쪽 눈이인쇄물의 겉면과 단면을 한꺼번에 성형하는 입체 인쇄술과 식민지배에 고통받는 민중의 낯빛과 체온을 실시간 감지해야 하는 의열단 활동에 모종의 도움을 준 것일까

 

삼촌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십년이 그렇게 흘러갔다그새 철없는 십대였던 리원봉은 이십대가 되었고어느 모로 보나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각종 규제를 탑재한블랙박스로 주어진 입체 프린터를 천형처럼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조선 인쇄공으로서그는 예술 작품 수준의 혁신적인 제품을 찍어내고 있었다자체가 예술인 입체 프린터로 무장한 일본의 대형 입체출판 회사들을 포함그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가 인쇄공으로서 전세계의 인쇄공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널리 명성을 드높인 계기는 바로 '만물도감'이란 오픈소스 운동이었다존재하는 모든 형상모든 물건모든 인공물의 입체 인쇄 설계도면 모음집을 일반에게 무료공개하여인터넷만큼이나 중요한, 22세기 세상의 하부구조의 하나가 된 입체 인쇄의 혜택을 누구나 누릴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그 정신에 동조한 수많은 인쇄공해커예술가들이 자기들만의 공학적 지식과 미학적 감각을 동원하여 개발하고 만물도감에 올려놓은 설계도면의 가짓 수가 백만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폭발적인 그 증가 속도에 주목한 호사가들은 가상현실판 천지창조라느니인공 빅뱅이라느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곤 했다

 

"총탄을 조립하는 게 아니라 한번에 찍어낼 수 있다는 건가?"

 

"총알과 탄피와 장약을 동시에.."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화약을 어떻게 인쇄한다는 거지?"

 

"정밀한 화학반응 경로를 따라가 화약으로 거듭나는 특수 잉크 쯤.."

 

"그렇다면 현장에서 총과 총탄을 찍어내서 장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네?"

 

"총탄이 장전된 상태의 총을 바로 찍어낼 수도 있겠지요."

 

원봉의 말에 리완일은 대낮에 도깨비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입체 프린터야말로 없는 곳이 없으니총과 총탄은 무소부재저격은 여반장?"

 

주름이 깊게 패인 리완일의 얼굴은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기묘한 빛으로 붉으락푸르락 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특수 잉크가 화약으로 변하는 반응은 시간이 좀 걸린다는.. 그러니까 잉크가 마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얼마나?"

 

"특수 잉크에 따라그리고 양에 따라 다르지만, 45구경 탄의 경우 30분 정도.."

 

"총탄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폭탄도 찍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 설계도면이 만물도감에 올라가 있다면 보안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민감한 설계도면들은 암호화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열단 무기조달국장 리완일과의 비밀 회합은 그렇게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에 부푼 상태에서 마무리되었다리원봉이 그 동안 갈고 닦은 입체인쇄술이 의열단의 투쟁전술과 만나 예측불허의 결과를 예고하는 순간이었다두 가지 술법이 한데 어우러질 때 어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까여태 니트로글리세린으로 포화된 규조토 마냥 딱딱하게 굳어 있던 리원봉의 가슴이 십년만에 다시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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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흐린 하늘눈도 비도 내리지 않는다그가 가장 싫어하는 날씨였다하루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오후 2시의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축 처져있고 축축하게 젖어있는 듯한 공기의 질감이 그의 긴장감에 칙칙한 물감을 두텁게 입히는 느낌이었다

 

텅 빈 채 버려져 있는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 들어서며 그는 난데없는 외로움까지 느껴야 했다리완일의 억센 손아귀가 아쉬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오른 쪽 어깨를 잡고 주물렀다만주에서 비밀리에 상경하여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있는 리완일은 지금 원봉의 거처이자 연구소이기도 한 과천의 공장에 숨어 있었다

 

"리원봉 동지행운을 비오."

 

이미 모든 시설을 의열단 총본부가 있는 만주로 비밀 이전한 뒤라 휑한 원봉의 사무실에서 리완일은 원봉의 어깨를 힘차게 잡아주었던 것이다

 

"거사 후 오늘 밤 만주행 열차에..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걸 괜히.. 어쨌든 만주에서 봅시다."

 

그리고 떠나온 길리원봉은 광장 한 가운데에 홀로 서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소스라치게 놀라 휘저은 손에 다행히 가방의 손잡이가 닿았다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다시 가방을 끌고 광장을 마저 가로질러 조선총독부 정문으로 들어선 그는 심호흡을 했다.

 

가방과 그의 몸이 보안 검색대 탐지기를 통과하여 보안 요원 앞에 섰을 때에야그는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지하 백층에 냉장되어 있는 삼촌의 싸늘한 시신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보안 요원은 가방을 열고 아예 해체할 기세로 나사 하나까지 샅샅이 검사했다가방 안에 든 세 개의 상자도 하나하나 열어 안팎을 면밀하게 들여다 보았다보안 요원은 그렇게 한참 시간을 들인 다음에야 그에게 말없이 가방을 넘겨 주었다

 

"미야모토 마사키카게 키요토 면담 차 왔소."

 

그는 백층에 있는 키요토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일층에 있는 수많은 접견실 가운데 하나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원봉에겐 뜻밖이었다조선 총독부의 최고위직들의 방이 모여 있다는상징적인 숫자의 백층유인원의 손가락 개수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별 의미 없는그야말로 주먹구구의 숫자놀이십진법에서 유래한 상징을 찾는 인간들의 오랜 버릇에 뜬금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1층 보안 검색대에서 100층 키요토의 사무실로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동안그의 마음은 한가한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차분히 가라앉았던 것이다.

 

조선군 총사령부 로봇군단 군단장카게 키요토문 옆에 붙은 금색 명패가 요란했다가상현실 게임에서 잔뼈가 굵은 키요토를 제대로 파악한 그의 할아버지는 그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셈이었다

 

현대 군 편제의 핵심인 로봇 군대무인 전투는 가상현실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현란한 손가락질로 게임 속 캐릭터를 조종하던 철부지 게임중독자가 실제 전장을 누비는 전투 로봇을 조종하는 전투 로봇 조종사가 되는 데에는거의 아무 것도 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그 기준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인물인데다가 그의 할아버지는 종신 총독그야말로 게임 안팎에서 만렙을 장착한 키요토는 아름다운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마사키오랜만이군."

 

키요토가 원봉에게 손을 내밀었다십년 전보다 키가 십 센티미터는 더 자란 듯일본 사람 치고는 당당한 체구였다정말 날마다 유격 훈련을 뛰는 진짜 군인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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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는 건축재료가 가능케한 초고층 초현대 건축의 특징을 집대성한 조선 총독부 건물높이 솟은 만큼 중요해지는 주변 풍경을 두 방향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석방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동남쪽 구석에 위치한 키요토의 사무실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은 도쿄 중심가의 풍경에 크게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단하군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왜소한 황거에 비할 바가 아닌 걸키요토 그대는 고층빌딩의 숲을 눈 아래로 굽어보고 있으니 말이야."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키요토가 자랑이나 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이끈 남쪽을 향한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통창 앞에 선 채 혼잣말처럼 말했고키요토는 그런 원봉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얼굴에 다시 웃음기를 떠올렸다.

 

"구석방이 조선 전통가옥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어감상 그렇게 썩 대접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나 또한 명색이 조선총독부에서 구석방이나마 차지한 것도 모두 덴노의 은덕이라 해야 하겠지특히나 경복궁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빌딩에서 말이야하하하!"

 

키요토는 그들의 특이한 어법으로 비비꼬아 말하고 있었다키요토의 할아버지의 총독부와 덴노의 궁내청 사이의 긴장은 일본 제국 신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터라 그의 말 끝 웃음소리에는 덴노를 언급한 문장을 뒤따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움이 묻어있음을 원봉은 느낄 수 있었다.

 

"선물을 가져왔다고?"

 

원봉과 함께 나란히 서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키요토는 갑자기 창을 등지고 돌아서서 자기 집무용 탁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앉았다

 

원봉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마치 대청제국 전성기 황제가 썼을 법한 턱없이 요란하고 큰 집무용 탁자 앞에 놓인 응접용 무릎 높이 유리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놓인 긴 의자에 앉았다유리 탁자 위에는 그가 가지고 온 상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그 상자를 보자마자 원봉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키요토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을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적어도 15분은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선물을 증정하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안전하게 총독부를 빠져나갈 때까지 상자 속 물건은 겉보기와 다름 없는 선물로 남아있어야 했다그리고 나서 선물은 곧바로 폭탄으로 숙성할 것이고 함께 형성된 기폭장치와 전지가 하나로 연결될 터였다.

 

"곧 제국 최대의 명절인 덴노탄조비내가 그나마 일가를 이룬 게 입체인쇄술삼종신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네."

 

"역대 천왕 빼고는 진품을 본 적 없는 삼종신기를 만들었다실패할 수 없는 모사품카타시로의 카타시로겹 모사품이 되는 것인가고맙네 고마워하하하!"

 

기술적으로는 선물 증정이 끝난 시점인데도 여전히그 위험한 선물이 선물을 받는 사람인 키요토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인 자신에게 더 가까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지난날의 얽힌 인연을 건설적으로 풀어나가는 단초를 마련한 것앞으로 잘 지내보자구그럼 난 이만."

 

"잠깐!"

 

키요토는 일어서려는 원봉을 손짓으로 제지하며 대신 자신이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떠나기 전에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키요토가 그 커다란 집무용 탁자를 돌아나와 응접 공간의 머리맡에 놓인 안락의자에 와서 앉았다

 

원봉이 세 개의 선물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그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고 보안 요원 두 명이 밀대 위에 커다란 스테인리스 상자를 밀고 들어왔다그들은 별말없이 원봉이 가져온 세 개의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연기 같은 증기가 넘쳐나는 그 스테인리스 상자 안에 집어 넣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리원봉은 심장은 갈빗대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 벌떡거렸다.

 

"액체 질소라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겠지."

 

키요토의 비웃음을 신호로라도 한 듯다시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발자국 소리는 원봉의 등 뒤에서 잠시 멈췄다가 유리 탁자의 끝을 돌아 그의 정면에 있는 의자 뒤에 섰다원봉은 때늦은 자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개를 들 필요도 없었다.

 

"마사키 그대를 나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사람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군."

 

원봉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아직 서 있는 그 인물을 올려다 보았다

 

의열단 무기조달국장 리완일막상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고 나니 짧은 그 순간에도 분노와 경악으로 폭주와 얼어붙기를 반복하던 원봉의 심장은 오히려 평온을 되찾았다.

 

리완일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잠시 만난 원봉의 시선이 키요토를 향했다.

 

"마사키그대가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단 말이다십년 전 동학난 우금치 모의 전투 때도 말하고 싶었지만..."

 

키요토는 두 팔을 안락의자 팔걸이에 올리고 상체를 뒤로 젖히고 요란하게 다리까지 꼬며 만면에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전투를 요약하는 숫자의 진실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동학군 2일본군 200, 그리고 조선 관군 3200. 우리 일본군이 소총조선군은 기관총어때아직도 조선은 조선인들의 것이야 한다고 생각하나?"

 

조선 백성 이천만리원봉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그 대신 기고만장한 키요토에게서 뜨거운 시선을 거두어 다시 리완일의 눈동자를 차갑게 들여다보았다그의 왼쪽 눈알이 위잉 하는 소리를 냈다.

 

벌써 200조선은 언제나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인가그 건물 지하 백층 냉동 독방에 갇혀 있는 삼촌의 시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픈 냉기가 그의 심장을 냉각시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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