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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괴담] 꽃밭에 가자(2020)
게시물ID : panic_1024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환상괴담
추천 : 13
조회수 : 98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21/08/30 23:30:58

달력 한 장이 찢겨나가고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반복되는 하루하루… 지긋지긋한 교대 근무.

출장 갈 일 없이 자리만 잘 지키면 되는 일자리지만 그만큼 갑갑한 곳이다.

8평짜리 작달막한 당직실만이 내 인생에 허락된 성공의 전부인 것 마냥,

그 많던 친구들도, 재밌었던 추억들도 모두 허깨비처럼 사라져 부질없다.

하지만 이 일상을 벗어날 순 없다.

이것이 내 사명이다.

전업주부인 아내와 초등학생 두 아들, 나까지 도합 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책임감이

나를 이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당직실로 밀어 넣었다.

그래. 가족을 위해서야, 가족을 위해서.

그러니까 오늘도 참는거야.

근무일지에 기계 계통 점검 결과 특이사항이 없다는 상투적인 문구를 써넣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숫자를 찾을 필요도 없이 최근 통화목록에 가득한 아내의 번호를 찾아 대충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 ... 여보세요. "

바싹 마른 목소리로 대충 전화를 받는 아내.

그 바람에 나까지 힘이 빠진다.

저번에도 이런 태도 때문에 5분만 하고 끝날 전화가 15분을 넘어가고야 말았다.

참고 지나가면 고쳐지지 않기에 그때 그때 이야기를 해서 합의점을 찾자는게 내 지론이지만

일단은 참는다. 나 역시도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아내의 불만을 접수해놓은터라 초장부터 입씨름을 하기는 싫다.

" 어. 자기야. 낸데, 뭐하고 있노? "

" 애들 아침 먹였지. 오늘 일요일이라 좀 늦게 먹였다. "

" 식사 매일 똑같은 시간에 해라고 뉴스에 나왔다더라이가. 어릴 때 습관이 진짜 중요하다. 애들 칫솔질은 시켰나? "

" 어. 시켰다. "

이 사람이 무덤덤하기는. 좀 다정하게 말해주면 덧나나...

그냥 그저 그렇게, 건성건성, 가장 힘 빠지게…

" 아래위로 꼭꼭 잘했나? 이빨 뒷면에도 잘 닦이고, 이 사이사이도 중요하다.

위에서 아래로 해가지고, 음식물 같은 거 안 끼게, 충치 안 생기게 자기가 옆에서 지도 잘 해줘야 된다. "

" 아... 여보,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왜 그라는데 자꾸. 이런 것까지 매일 전화로 꼭 얘기해야 되나? "

뭐라고? 전화로 꼭 해야 되냐고?

알아서 한다고? 지금 내가 간섭이라도 한다는 뜻인건가?

" 아니, 자기. 방금 그 말은 내 귀에 이상하게 들린다. 꼭 내가 간섭한다는 소리로 들리네,

내딴에는 집에 애들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신경 쓰는 건데 당신이 호응을 못 해주면 안 되잖아.

애들은 꼭 당신만 키우는 게 아니고 아빠인 내도 이렇게 신경을 같이 써야 두루두루 고른 방향으로 자라는 거지. "

" 누가 관심 가지지 말라더나, 꼭 전화로 이렇게 아침부터 해야 되느냔 말이지.

명령조로 멀리서 선수 감독하듯이 말하면 듣는 나는 답답하다이가. "

답답하다고? 명령조로 시키듯이 말한다고?

대체 뭐가 답답하다는거야, 우리 자식들 칫솔질 잘 시키자는 말도 못 한단말야?

" 자기 내 말이 전달이 잘 안 됐는갑네. 내는 잘 해볼라고, 우리 아이들이니까 부모인 우리 둘이

관심과 행동을 하나로 해보려고 노력 중 인거고. 물론 충분히 감시받는다고 여길 수도 있지.

있는데, 자기 진짜 관리 감독이 뭔지 아나? 이곳 근무할 때 한 달에도 몇 번씩 윗사람들이 근무 잘하고 있는지 와가지고

이거는 했냐, 저거는 했냐, 왜 이거는 이렇냐, 저렇냐ㅡ, 그게 진짜 관리 감독이다.

내는 그냥 자기하고 우리 가족하고 앞으로 맘 맞춰 잘 살아볼라고 다독이는 마음 밖에는 없다. 진짜다. "

그 와중에 격하게 내쉬는 아내의 한숨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꾹 참고 돌아올 답변을 기다린다.

" 어. 알았다. 칫솔질 잘 시켰다. 나도 당신 일하니까 귀찮을까봐 전화 안 하지만 내딴에는 신경 많이 쓰고 있다.

칫솔질 당신이 시키라는 대로 잘 시킨다. 당신만 매일 매일 이렇게 칫솔질 시켰냐 안 시켰냐 꼭꼭 시켰냐 혀는 닦였냐

확인 전화하니까 그렇지, 나 하루도 빼먹은 적 없이 잘 시켰다. 난 이렇게 꼭 아침부터 전화가 와서 뭐했나 뭐했나,

꼭 가르치듯이 이러면 엄마인 나를 못 믿어서 이러나 싶고 별로 기분 안 좋다. "

" 자기야, 그런 건 절대 아니다. "

" 응. "

" 잘 해보려는 거다, 내도 근무하면 피곤하고 집에 가면 바로 누워 자고 싶지만 우리 가족 잘 살아보려고

하루라도 비면 그 날에 애들하고 나가서 놀아주고, 어디든 데려가서 좀 체험도 시켜주려고 하고, 이렇게 일하러 나와서도

집에 관심 가지고 애들 습관도 어릴 때부터 잘 보듬어보려고 하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 응. 알겠다. "

" 그래… 알아주니까 고맙다. 당신도 좀 쉬어라… 주말인데 애들 조용히 놀라 하고…

당신도 집안일 하면 피곤한데 오전에 좀 쉬어야지… "

" 응. "

" 그래… 끊을게, 사랑해. "

현장을 둘러보며 체크리스트에 따라 담당 기계를 점검하고 당직실로 돌아오니 이마에서 흐른 땀이 비 오듯 떨어진다.

시간이 벌써 저렇게나 됐나. 오전 일과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출근, 점검, 서류, 점검, 서류, 퇴근, 출근, 점검, 서류, 점검, 고장, 수리, 점검, 퇴근...

내 인생 제대로 굴러가는지 점검할 시간도 빠듯한데 이러다 내가 고장나면 나는 수리 어디서 받나?

딴 생각에 잠겨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본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초등학생 스마트폰 중독 통계에 대한 뉴스가

주요기사로 실려있다. 기사를 끝까지 읽는다.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집에 전화를 건다.

- … ♪♬♬♬♬

" 여보세요. "

아까 그렇게 서로의 어려운 부분을 알아주자고 했는데 또 퉁명스럽게 받네.

아니. 아니야. 신경쓰지 말자. 더 따졌다간 나만 진상 남편 되는 지름길이다.

" 어. 자기. 애들 혹시 주말이라고 지금 스마트폰 게임 하고 있는 거 아니가? "

" 어. 쿠키런 하고 있다. "

뿅뿅거리는 전자음 소리와 익숙한 음악. 또 그 카카오톡 게임인가.

" 지금 하고 있으면 언제부터 했노? 오래된 거 아이가? "

" 한 사오십 분 했겠지. "

" 어? 안 된다, 딱 십 분만 더 하고 끄라고 해라. "

전화기 너머로 아내가 '아빠가 게임 십 분만 더 하고 끄란다'고 하자 아이들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아 왜에' '아빠가 끄래' '좀만 더' '꺼라 아빠한테 혼나기 전에' '아~…'

다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 끄라고 했다. "

" 지금 애들 놀러 와있나? 와 이래 집이 시끄러운데? "

" 어. 동석이하고 현섭이. "

" 현섭이? 현섭이 엄마 그거 인간 아니더라이가. 애들도 부모 따라간다.

현섭이는 잘못이 없지만 우리 애랑 놀면 우리 애들도 현섭이한테서 배운단 말이다.

동석이는 가끔 와도 되는데 현섭이 글마는 안 된다. 오늘 둘이 같이 왔다니까 좀 있다가 둘 다 보내라. "

" 놀러 온 걸 쫓아보내나? "

" 우리 집이 뭐 놀이동산이가? 애들 지금 스마트폰도 삼십 분만 시키야 되는 거 주말이라고 십 분 더 하게 해주는 거다.

평일 같았으면 바로 혼냈다. 스마트폰 그거 때문에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란 말이다. 애들이고 어른이고 그거에 맛들려가지고.

애들 영어단어는 외웠나? 30일 스케줄표 앞에 있더라이가. 그거 따라서 매일 진도 나가야 된다. "

" 친구들이랑 노는데 지금 점심도 먹기 전에 애들이 영어 단어부터 외울라고 하겠나. 안 외웠다. "

" 에이. 그러면 안 된다. 동석이 현섭이 둘 다 집에 바로 보내고 애들은 영어 단어책 외우라고 해라.

아빠 집에 오면 쪽지시험 본다고 하고. 점심은 뭐 먹을 건데? "

" 애들이 기생충인가 뭐 영화에 나오는 짜파구리 끓여달라던데. 유튜브에서 요즘 유행이라고. "

" 짜파구리? 얄궂은 짜파게티랑 뭐 섞은 그거? 간단하게 먹더라도 밥이랑 반찬을 먹어야지. 영양이 중요한데 짜고 칼로리만 높은 그런 거 먹으면

한창 키 크는 성장기에 별로다. 차라리 계란후라이를 하나 해가지고 비벼 먹거나 해라. "

" … "

" 어. 와 말이 없노. "

" … "

" 듣고 있나? "

" …어. "

" 대답을 해줘야지. 말하는 사람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것도 아니고. "

" …응. "

" 그래. 아무튼 그렇다. 그렇고. 게임은 하지마라하고, 짜파게티는 먹더라도 과일이나 달걀 같은 거 간식으로 먹여서

영양 보충하고, 놀러온 애들은 점심 먹이기 전에 어디 가봐야 한다 하고 각자 집에 보내라, 딴 집 애들도 똑같은 입이라고 오면

우리 애들 먹일 간식도 자기들 똑같이 나눠먹여야 하는데 하루 이틀이지, 과일이나 과자 우리 애들 먹이려고 좋은 거 사는건데

입이 더 붙으면 막상 우리 애들이 얼마 먹지도 못한다. 알겠나. "

" 알았다. "

" 그래… 끊는다. 점심 먹고 나면 영어단어 좀 외우라고 해라. "

짜파게티가 뭐야, 짜파게티가.

일주일에 라면은 한 번이면 되지, 언제는 신라면, 언제는 불닭볶음면,

애들이 해달라고 한다고 주에 두세번을 그렇게 먹어서야.

안 된다고 안 하면 두세번이 아니라 네다섯번도 해먹겠다 아주.

그렇다고 내 도시락에 반찬 하나 더 실어주는 것도 아닌데.

난 뭐 짜파구리인가 뭔가 영화에 나와서 유행하는 건지 뭔지 몰라도

도시락에 마른 반찬 몇 개 싸와서 전자레인지도 없는 당직실에

쭈그려 앉아 허겁지겁 먹고 일하는데, 나야 그렇다치고 세 가족이

집에서 오순도순 따뜻한 밥 한 상 차려먹는게 그렇게 어렵나,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뭘 먹더라도 직접 해서 먹여야지...

일요일이라고 라면 먹나, 무슨 짜파게티 요리사 광고 찍나.

아. 그만 그만.

나 혼자 또 열내고 있네.

가족을 위해서라지만 내 맘 같지 않네.

- … ♪♬♬♬♬♬♬

스-흡!

침을 닦았다, 반쯤 먹은 도시락 뚜껑을 일찍 닫은 채 의자에 기대어 막 잠이 들려던 찰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내의 전화다.

" 어, 여보. 나야. "

" … 지금 바쁘나? "

" 아니, 오후 일과 시작하기 전에 잠시 눈 좀 붙이려고 기대있었다. 전화가 와서 일어났다.

놀러온 애들은 갔나? "

" … 응. 애들 보내고. 고등어 구워서 밥 해먹이고. 애들은 지금 영어공부시켜놨다. "

" 잘했다. 당신이 수고가 많네 정말로… "

" 난 당신 마음 알아주고 맞춰주려고 노력하는데 갑자기 내 좀 서럽더라. "

이건 무슨 뜬금포야.

" 왜? 무슨 일 있었나? "

" 자기야말로 내 맘을 몰라준다이가. "

" 무슨 소리고, 결론부터 말하지말고 천천히 이유를 말해봐봐. "

눈 좀 붙여야 오후에 버틸텐데..

보나마나 쉬는시간은 다 지나갔네.

"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다 맞는 말이긴 하지. 애들 잘 키우려고 하는 말인 줄은 내도 안다,

근데 있다이가, 하라는 대로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애들하고 투닥거리고 돌아서면,

당신은 교대 근무한다고 집에 잘 없지, 나 혼자 아침부터 애들 학교 보내는 전쟁 치르고,

그속에 내 생활은 없고, 잠시 있다가 또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 보고,

애들 돌아오면 또 밥 먹이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또 애들 뒷바라지에 치이다가 애들 재우고 나면,

그냥 바보처럼 드라마 하나 멍청하이 보다가. 그러다가 자려고 하면,

가끔 내 꿈이 뭐였더라, 그런 생각이 난다. 내도 분명히 꿈이란게 있는 사람이었는데. "

하루 24시간 7일, 집에 신경쏟는 거 쉽지 않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어. 하고 싶은대로 사는 사람은 또 어딨어.

육남매 칠남매 키우던 우리 어머니들은 그럼 사람 아니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뭐 꿈이 없어서 그렇게들 아등바등 사셨나?

그건 아니지. 아니잖아.

" 자기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배부른 소리다.

딴 집은 맞벌이가 보통이다. 자기가 나가서 한 달에 백만 원이라도 벌어서 보태면

우리 집도 숨통이 좀 트이는데, 아직 습관도 덜 든 초등학생 둘을 키우니까 나도 당신 굳이

나가서 일하라는 부탁 안 하는 거다. 내 월급 받아봤자 지금처럼 입이 네 개면 저축은 꿈도 못 꾼다.

그래도 애들 학원 두 개씩 보내고 가족들 밥 세 끼에 간식도 먹고 하잖아. 청소? 빨래?

물론 가사노동도 노동이지. 그래도 당신은 누워서 낮잠이라도 잠시 자는데 나는 이 기계들 한 번 고장이라도 나면 알람 꺼야지,

직접 기계 사이로 기어들어가서 뜯어고쳐야지, 그 난리를 치고도 쉬라는 말 한마디 못 듣는다.

행여나 전화 올까 눈치 보며 의자에 기대서 맘 놓고 자는 것도 아니고 눈만 감고 쉬는 척만 한다.

난 그래도 당신 청소 빨래 끝나면 늘 낮잠 좀 자라고 그렇게 말 한마디 해주는데, 당신은 당신이 당연히 전업주부로서 해야 할

청소 빨래를 가지고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까 난 그 말이 더 서운하다. "

" 왜 자꾸 당신은 당신 생각만 하는데. 당신 힘들다는 거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이가.

그냥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면 안 돼? 당신 나가서 돈 벌려고 일하는 거에 대해서 나 편해 보이고,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그냥 내 생각 좀 해주라고. 당신 보내고 나면 애들 챙기고 애들 챙기다가 또 당신 챙기고,

나 아가씨 때 꾸미고 하던 반의반도 나한테 신경 못 쓰고, 양치질, 애들 학교 준비물, 밥은 뭐 하지,

장은 뭘 보지, 청소에, 빨래, 다림질, 세금 내러 가야지,

집안일 할 때는 힘들고, 안 하더라도 낮에 멍하니 있으면 내가 뭐 할 수 있는 게 없다.

텔레비전도 그 시간대에 뭐 볼 게 있는데? 예능프로 재방송 보고 그순간엔 하하 웃어도 돌아서면 서글프다.

여보, 나도 여자고, 나도 사람이거든. 나도 꿈이 있었으면 좋겠다. "

" 여보 나 슬슬 점검 돌러 가야 된다. 짧게 말하자.

애들 좀만 더 크면 그때 당신도 일하러 가면 되지. 그래준다면야 나 반대 안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애들이 습관이 안 돼 있다. 애들 스마트폰 한 시간 하는 거 봤다이가.

지금 애들 습관만 좀 잡아놓고 중학교 때 학원 개수 늘리고나면, 애들 알아서 저녁에 왔다 갔다 하면

그때 돈 더 들고 하니까 여보가 같이 맞벌이해주면 나는 너무 좋지. 좋은데, 그 대신에 지금은

당신이 좀 노력해줘야 된다. 그게 우리 가족 행복해지는 길이다. "

" 왜 이렇게 답답한 소리만 하는데, 내 마음을 알아주라니까. 맞벌이도 좋고 이거저거 다 좋은데,

나 이렇게 살려고, 밥 해주고 청소해주는 가정부로 살려고 인생 사는 사람은 아니잖아. "

" 자기야. 나도 가족 먹여 살리려고 8평 당직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서,

알람 울리면 미친듯이 뛰어가서 기계 뜯어고치면서 하루하루 전쟁처럼 산다.

근데 다른 집도 다 비슷하다이가. 나도 힘들고, 당신도 힘들듯이, 모든 집이 다 이렇다.

자꾸 시작점부터 다른 몇몇 잘 나가는 경우에 대고 비교하니까 힘들게 여겨지는 거다. "

"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내 마음을!

남도 그렇다, 모두다 그렇다, 아니 남이 아니고 나! 나! 내가 힘들다고,

당신 가족인 내가 힘들다고, 남이 힘든 게 뭐 어쨌는데? 남이 우리랑 똑같이 힘들다고?

그러든가 말든가 그건 남 얘기고, 당신 아내인 내가 힘들다고, 날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마음 달래달라고! 당신 이해한다 이해한다 기계처럼 말해도 나 이해하려는 마음 전혀 없다이가,

누가 뭐 사모님처럼 모셔 달래나? 다들 밥아줌마로 사는데 왜 너만 유난떠냐는 식으로

얘기하지 마라, 당신 밥아줌마 아니라고, 당신도 꿈이 있을 수 있고, 아직 꿈을 가져도 되는

한 명의 여자라고, 그 말 해달라고! 당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챙긴다고 하면서 정작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는 하나도 모르잖아.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애들이 진짜 좋아하는 건 하나도 하지 마라,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시켜라, 시켜라, 시켜라!

내가 좋아하는 건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싫어하는 건 해라, 해라!

하고 싶은 대로 못 하는 거 이해할게, 당신하고 살려고 결혼한 거니까.

근데... 요즘 진짜 별로다. "

왜 소리를 질러,

집에 관심 가지고 조금이라도 애들 교육에 도움되려고 조언한건데,

자주 못 들어가는 대신에 이렇게라도 같이 키워가려는 방식인건데,

무슨 바람이 또 분건데,

여행 못 가서? 넓은 아파트 못 가서?

딴집에 비해서 텔레비전이 작아서?

꿈, 꿈이 뭔데, 뭐였는데,

결국 나랑 사는 거 구질구질하다,

아득바득 궁상떨며 먹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싫다, 나 때문이다, 그 말 하고 싶은거야?

" 아 그럼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던가! 진짜 당신 내가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하네,

당신 마음 몰라줘서 미안하다, 뭐 도무지 알겠어야 말이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봐라,

나는 마음 몰라주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건 내가 안 말릴게. 나 이제 진짜 점검 가야된다. 끊는다! "

" 여보, 내 말은…! "

근무를 마치고 귀가했다.

쌀쌀맞게 맞이할거란 예상과 달리 평소보다 더 밝게 반겨주는 모습에 당황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멀리 놔둔 채 영어 단어장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쪽지시험을 쳐보자 생각보다 높은 점수에 내 기분도 좋아졌다.

밥 먹자마자 시키기 전에 스스로 칫솔질을 하러가는 아이들.

전화로 다투기는 했지만 집에 오니 나무랄 데 없는 화목한 집이다.

바르게 자라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엄마 아빠.

불협화음이 있을지라도 그런 조율이 있기 때문에 화음을 찾아가는거겠지.

다들 이렇게 사는거겠지.

우리 가족 힘들지만 잘 하고 있네.

" 우리 아들들 영어단어도 잘 외우고 아빠가 오늘 기분이 너무 좋다.

짜파구리인가 뭔가, 그거 안 먹고 싶나? "

" 짜파구리요? 괜찮아요. "

" 왜, 아빠가 먹지말래서 삐졌나? 너무 자주 먹으면 안 된다는거지,

야채랑 이것저것 넣고 해가지고 먹으면 라면도 꼭 나쁜 건 아니니까 먹자.

아빠랑 같이 슈퍼마켓 가서 사오자. "

" 네... "

" 근데 너네 안 덥나? 긴팔옷을 입고 있노. 이리 날 더운데. 반팔로 갈아입어라. "

" 이게 더 멋있어요. "

" 천지도 모르고 이 날씨에 긴팔 옷 입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흉본다. 갈아입으라니까. "

" 긴팔 입을래요... "

" 이 자슥이요. 네가 그러니까 네 동생도 따라입는다이가. "

" 하나도 안 더워요. "

" 괜히 고집부리다가 땀띠 나도 아빠 탓 하지마라. 아빠는 너희가 어떻게 하고 지내는지 멀리서도 훤히 다 보인다.

어른들은 뒷통수에도 눈이 달려있다고 아빠가 누누히 그랬제.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보인다 보여! 그럼 얼른 댕겨오자. 아이스크림도 사줄게. "

" 엄마, 가도 돼요? "

" ... 다녀온나. "

" 여보, 애들 반팔 없나? 갑자기 애들이 긴팔을 이래 입어샀노. 커서 안 맞거나 한거면 새로 하나 사서 입혀라.

애들이랑 마트 다녀올건데 자기는 아이스크림 뭐 먹을래? "

" ... 나는 됐다. 청소기 한 번 돌리고 일찍 자려고. 짜파구리 사온다고 했나. 끓여주고 잘까. "

" 아니, 내가 끓여서 애들이랑 먹을게. 오늘 많이 피곤한갑네. 어서 쉬어라. "

조금 삐뚤빼뚤 가고 있지만 우리 가족 잘 가고 있네.

스마트폰도 적당, 가끔은 이렇게 간식도 해먹고...

양치질 잘 해, 영어단어 잘 해, 오늘 고생한 아내는 일찍 쉬게 배려해주고,

나는 퇴근했지만 애들과 소통하는 시간 보내고.

딱 하나 아쉬운 건 여름에 긴팔옷 입은 녀석들,

봐, 이런 거 놔두면 애들 어디 가서 좋은 소리 듣겠냐구.

그러니까 소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게 맞아.

내 말이 맞아.

우리 가족 잘 하고 있어.

굉장한 알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현장으로 곧장 달려가 기계를 점검했다.

다행히 큰 고장은 아니었기에 일은 적당한 선에서 수습되었다.

당직실로 돌아와 안전모를 벗으니 부재중 전화가 있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세 통씩이나… 전부 아내의 전화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하자는대로 잘 따라와 주어 걱정 없었는데.

일부러 전화도 전보다 적게 했는데, 웬 전화지.

설마 애들이 다치기라도 했나.

- … ♪♬♬♬♬♬♬♬♬

" 어, 여보. 전화했었나. 알람이 울려서 기계 고친다고 못 받았다. "

" 응… 지금은 다 끝났고? "

" 다행히 별일 아니더라. 왜? "

" 아니… 그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당신은 일하느라 바쁜데 자꾸 집에서 당신한테

신세 한탄 비슷하게 해봤자 당신한테 한풀이하는 거 같고, 그래서 내가 당신 힘든 줄 뻔히 알면서

내 힘든 이야기만 계속 하는 건 아니라고 반성도 많이 했거든.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

" 뭔데. 말해봐, 말을 흐리노. "

" 나… 대학교 다시 다니고 싶다. "

" 어, 어디? 학원? 자격증? 취업하게? "

" 아니, 대학교. 대학생들 다니는 대학교. "

" 대학은 무슨 대학. 당신 대학 나왔잖아. "

" 맞벌이를 앞으로 할 수도 있으니까 나도 나름대로 알아봤지.

근데 나 대학교 때 배운 미용기술은 어디 쓸데가 없더라, 이제 난 내 화장도 잘 안 하는데

남 꾸며주기엔 손도 많이 굳었고 그런 거 이제 와서 막내부터 하기도 그렇고…

우리 계모임에 맞벌이하는 사람들은 다 관공서에서 공공근로 같은 거 사무직 쪽으로 한다던데,

나도 그런 쪽으로 알아봐서 액셀이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거 따서 그쪽으로 갈 수도 있는 거고. "

몹시 확신에 차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아내.

" 자기야, 그건 자격증 학원 다니면 초등학생도 일주일이면 딴다.

한 달에 상시시험 몇 번 있으니까 한 달이면 두 개 다 충분히 딴다.

그런 다음에 바로 취업하면 되지, 간단히 문서작업 보조하는 자리 가는데

뭐 대단한 건 요구 안 하거든, 그냥 성실하게 다니기만 하면 되는데…

만약 전문대를 다닌다고 쳐도 이거저거 합치면 돈이 일년에 오, 륙백은 그냥 들어간다.

돈 백만원 들여서 자격증 딴 다음에 바로 취업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버는 돈으로는 대학교 학비 대고나면 생활비가 모자라다. "

" 그럼 그 돈은 내 앞으로 대출 내고, 내가 취업해서 벌어서 천천히 갚을게. "

" 말이 되나? 지금 우리 저축할 돈도 없는데 괜히 빚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

" 내가 알아서 할게. 나도 의미 없이 누워지내는 것보다 이렇게 다시 공부하고,

일해서 그 돈 갚고 하면, 당신 말대로 백만 원이라도 벌어오면 숨통 트이잖아. "

" 당신 지금 제사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우리 생활 여유로운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집에 있기 싫어서 탈출할 핑곗거리 찾는 걸로 보인다. "

" 나도 꿈을 좀 가지고 살잔 거지. 내가 다 계산하고 인터넷으로 홈페이지 들어가서

다 알아봤다. 만학도전형이란 게 있거든, 멀리 안 가고 전문대 몇 개 중에 골라봤는데

시내 가기 전에 전문대 하나 있더라이가, 거기 등록해가지고 2년 배우고,

열심히 하면 장학금도 탈 수 있다는데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내가 대출 내서 일하면서 갚으면

일이 년이면 되잖아, 하다가 잘 풀리면 무기계약직 같은 쪽으로 될 지 아나. "

" 애 둘 딸린 서른 훌쩍 넘은 컴퓨터 만학도 주부가 자잘한 업무 몇 개 했다고 정규직 시켜주는 줄 아나?

그리고 뭐 서울대 나온 것도 아니고 전문대 나와서 컴퓨터 자격증 몇 개 있다고 그렇게 쉽게 뽑아주는 게 아니다.

당신 모를만한 것도 아닌데 지금 완전히 허깨비에 홀린 것처럼 현실 감각이 없네. 왜 그라노 대체. "

" … "

" 생각해봤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하고싶다는거지,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 같다.

우리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당신 공부하고 싶은 걸 말릴 권리는 없지, 근데 간단히 학원에서,

그것도 아니면 집에서라도 컴퓨터 자격증은 충분히 딸 수 있고,

어차피 그 자격증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빚까지 내고 싶어 하고,

대학에서 돈 내고 시간 들여서 배워야겠다고 하고, 당신 솔직히 빚내서 대학 다닌다는 게,

어디 스무 살짜리들이 남들도 다 가니까 자기도 먹고 살려면 졸업장 필요하다 싶어서 다니는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

그냥 집에 멍하니 있는 거 염증 느끼고, 나 이렇게 다시 대학 다닌다고, 대학 나와서 멋지게 워킹맘 취업했다고,

그런 상상 속에서 마구잡이로 결정한거잖아. 지금껏 못한 거 손해본 거 같고 그래서 이 바람이 분거잖아.

그거 다 한때다. 다른 쪽으로 풀어보자. 자기 취업해서 돈 벌어오는 건 나 찬성한다니까? "

" … "

" 왜 또 말을 안 하노. "

" … "

"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 … ♪♬♬♬♬♬♬♬♬♬♬

- … ♪♬♬♬♬♬♬♬♬♬♬♬♬

- … ♪♬♬♬♬♬♬♬♬♬♬♬♬♬♬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 … 전화기가 꺼져있어…

" 이 사람이 진짜… "

에라.

모르겠다.

- … ♪♬♬

" 어, 여보! 왜 전화를 안 받았노. 애들 집에 왔나? "

" … 애들 꽃밭에 데려다 놨다. "

" 꽃밭이라니. "

" 당신보고 애들한테 관심 없다고 했던 거 기억나나. 아니라고 했제. 근데 관심 없더라. 그래서 매일 매일 꽃밭에 데려갔었는데… "

" 잠깐만 자기야, 이해가 안 된다. 무슨 말이고? 공원? 저번에 우리 같이 간 곳? "

" 이제는... 아예 꽃밭에 데려다 놨다. "

" 아니면 작년에 나비생태공원? 자기 무슨 소리하노? "

" 애들은 내가 데려다 놨고, 나는 나 알아서 할게. 당신 맨날 나 알아서 하라고 잘하잖아. 알아주는 건 없으면서. "

" 자기야, 지금 일방적으로 말하면 상호소통이 안 된다. 혹시 아까 내가 당신 다그친 거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내가 미안하다.

나도 사람인지라 감정 조절이 잘 안 된 거고, 이해해줄래… 지금 나 집에 들어가고 있다. 나 월차 썼다.

놀러도 가고 하자, 당신 옷도 사줄게, 지금 애들 어딨노, 같이 있나? "

" … 왠지 자기란 말이 서글프네. 나 진짜 당신 사랑해서 결혼했다. "

" 자기야 나 월차 냈다니까, 나 휴가 간다니까 웬일로 보너스도 주더라, 나 선물 들고간다. 안 궁금하나? 보면 깜짝 놀랄걸? "

" 우리 사귈 때 선물 많이 줬었는데… 기억나네… 그땐 당신이 내 맘 너무 잘 알아줘서 꼭 마음 읽히는 줄 알았다. "

" 왜 발음이 몽롱하노, 자다 깨서 그런 거가, 아니면 졸려서 그런 거가, 자기야. 나 지금 집 다 와 간다니깐? "

" 서둘러서 올 필요 없다. 오빠… 애들 꽃밭에 있고… 나도… "

전화는 이어졌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차 문을 열어젖히고 집으로 달려갔다.

소란을 떠는 통에 차에서 쏟아져나온 전문대 입시 팜플랫과 학용품 세트가 주차장을 굴렀지만

그런 걸 주워담을 시간은 없었다.

차 키를 그대로 놔둔 내 차를 누가 털어가든 말든.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 여보! "

문을 두드려도,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어 바로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른 뒤 집에 들어섰다.

" 헉, 헉, 헉… "

꽃밭,

알록달록한… 꽃밭…

아하하하하…

정말 꽃밭이구나,

보라색 꽃… 노란색 꽃… 빨간 꽃… 파란… 꽃… 초록…

꽃… 밭…

" 으흐흐흐… "

언제부터였던 걸까, 온몸을 뒤덮은 형형색색의 피멍 자국…

정말 꽃밭처럼 온몸을 피멍으로 장식한 내 아들 둘이 나란히 누워 거실을 알록달록하게 수놓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신에 꽃잎이 잔뜩 물들어있다.

" 흐흐흑 흐흑 "

실성해버릴 것 같은 정신, 반씩 섞여나오는 울음과 헛웃음,

광기 어린 내 시선이 마침내 반쯤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천천히 향했다.

" 흐흐흐… "

힘없이 늘어진 얇고 하얀 손목이다.

내가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내 사람의 물들인 손톱이다.

마침내 나는 주저앉고야 말았다.

나도… 꽃밭에 가야지…

월차를 냈으니 가족여행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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