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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주워온 장롱 - 실화
게시물ID : panic_173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구구크러스터
추천 : 12
조회수 : 4506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1/07/18 21:32:48
벌써 12-3년이나 지나버렸군요.

98년에서 99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쯤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IMF의 여파로 경기가 많이 위축되어있었고

개인적으론 첫 직장에 수습기자로 간신히 입사하여, 하늘같은 선배들 눈치를 보며
 
거의 매일같이 철야에 가까운 근무(물론 퇴근을 해도 되었지만, 수습주제에 감히 그럴 순 없었던)를 하던 

때 였습니다. 회사가 광화문쪽이고 

자취하던 원룸이 부천이라 62-1번 버스(지금도 있나 모르겠군요)의 첫차를 타고 출근해서,

막차를 타고 퇴근하거나, 근처의 친구집에서 잠깐 눈 부쳤다가 얼른 목욕하고 출근하기를 매일같이 하던 그

때...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토요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서, 당시 경인방송에서 해 줬던 '박찬호선수' 경기 재방송을 

혼자 자취집에서 맥주 한캔하며 볼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행복을 예상하며

4시 반쯤에 집을 향해 가고 있었죠.

제가 살던 원룸은 다세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허름한 공동주택이라, 비슷 비슷한 빨간 벽돌집들이 모여 있

었고 가운데에는 어설픈 놀이터 겸 공원이 있었습니다. 한켠에는 주민들이 버리거나 방치한 물건들도 있었구

요. 겨울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저는 우산이 없었던지라, 조금이라도 집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맥주와 안주거리가 담긴 검정 봉투를 들고

놀이터를 가로 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왼쪽 어깨방향편에서 뭔가 환하게 빛나는 물건이 있더군요. 정확한 느낌으로는 마치 황금덩이가 쌓

여있는듯한... 암튼 살면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무엇인가 환하게 빛나고, 아주 근사한 물건이 저 편에 있는것으로 보였기에

당연히 그쪽을 바라보았고... 그 빛나는 물체의 정체는 바로 장롱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새것에 가까운 물건이었고... 한마디로, 집에 갖고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제가 경상도 출신이라, 비교적 소탈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렇게 길에서 장롱이나 버려진 물건을 함부로 주워온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횡재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그 큰 장롱을 들쳐 업게 되었고

(이삿짐을 잘 나르는 분들이 흔히 장롱을 등쪽으로 들쳐업은채로 혼자서 나르곤 하죠)

신기하게도 그다지 무겁지 않은 겁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그 큰 장롱이 하나도 안무겁게 느껴졌다니... ㅎㅎ

전 속으로 역시 비싼 물건이라 그런지, 무게도 가볍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비에 며리며, 옷이 젖는것도 잊은

채 장롱을 들쳐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반지하이긴 하지만 소박하게 만족스러웠던 원룸 입구에 도착해서,

 장롱을 집 안으로 집어 넣는데, 문 크기보다 장롱의 높이가 더 길어서 좀 힘이 들더군요.

 그래도 혼자 힘으로 이리 저리 눕혀가며, 집 안으로 진입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참 뿌듯하더군요. 앞서 말했듯 굉장한 횡재를 한 기분도 들고...

 동시에 온 몸의 힘이 다 소진된듯한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부슬부슬 내리긴 했지만,

 겨울비를 잔뜩 맞고 큰 장롱을 들고 와서, 집 안으로 넣느라 낑낑 거렸으니 당연히 힘이 빠질만도 했겠죠.

 우선 비에 젖은 머리를 감고 샤워부터 하고난 뒤, 오늘의 전리품인 장롱을 감상 및 배치하기로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런데... 욕실에서 나온 순간 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주저앉고 말았더랬습니다.

 
바로 제가 주워왔던 장롱이 엄청 낡은데다가, 큰 문짝은 반쯤 떨어져서 덜렁거리고 있었으며

 
곳곳에 크레파스 낙서와 과자에 들어있는 판박이 스티커들로 어지렵혀진...

 
말 그대로 쓰레기, 재활용 불가의 물건이었던 것이었죠.


 저런걸 눈에 뭐가 씌어서 룰루랄라하며 들고 온 내 모습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요즘 회사에서 너무 힘들어서 내가 정신이 잠깐 나갔나 싶기도 하고...


어찌되었건, 금세라도 낡은 틈에서 쥐나 바퀴벌레가 튀어 나올것 같은 저 낡은 것을 어서 버려야 겠다는 생

각에 다시 장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 들리더군요. 거짓말처럼 꿈쩍도 안했고

 마치 바윗덩이라도 되듯 전혀 들 수가 없었습니다.

 
참 신기하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고 믿기지가 않습니다.

물론, 그때는 제가 장롱을 들고 오느라 온 힘을 다 소진한 탓에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 약간은 무서운 생각도 들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사상의학에서 오링 테스트를 할때, 신기하게 손가락에 아무리 힘을 가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 처럼,

뭔가 불가사의한 이유가 있어서 들리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구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버리고 싶어도 지금 당장은 집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그 흉물을 그대로 방치한채 맥주 한잔을 했는데, 아주 기진맥진해 지더군요.

 그래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때 부터 제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3개월의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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