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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문의 마지막 목표
게시물ID : panic_517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구름완전자
추천 : 2
조회수 : 161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30 23:19:55

우리 가문의 목표

 

우리집안은 대대로 섬에서 살았다. (목포 신안군에 있는 작은 섬이다) 우리집안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내륙으로의 진출. 그것을 위해 할아버지, 아버지, 나는 어쩌면 일생을 바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도 노력은 했었다고 하는데, 내가 생생하게 얘기를 들은 것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뿐이니깐.

 

먼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625 상이군인이었다 한다. 또 할아버지의 동생은 병역기피자로 한 곳에 정착하지 아니하고, 섬들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살았다 한다. 할아버지의 동생은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사이 객사했고, 할아버지는 625를 마치고 섬에 들어와서 이곳 저곳 다른 섬들과 목포를 돌아다니며 야매치과의사질을 하다가 폐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

625때 떠듬떠듬 배운 영어로 미군하고도 얘기했었고, 처음 섬에 마늘농사를 지을 줄 알던 그나마 깨어있는 사람이라던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 서울로 가서 사는 게 꿈이라 하셨지만, 운명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던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할아버진 결국 기껏해야 전라북도, 전라남도의 시골마을들을 돌아다니다가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다음은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섬에서 가장 똑똑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가 우리 할아버지를 625유공자 뭐 어쩌고에 신청하지 않는 바람에 지원받을 길이 없어서 학업을 포기했었다고 한다. 물론 자세한 내막은 있을 테지만 아무튼 할머니가 625 신청을 안했다고 다른 친척이 그러는 걸로 봐서 그런가보다.

우리 아버지는 중학교는 목포에서 다니다가, 이대로는 어차피 집안에서 지원도 받을 수 없고 학업도 유지하기 힘드니 서울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한다. 그래서 그렇게 서울에서 공장 일을 배우다가 드디어 80년대 후반에는 스스로 공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우리 가문의 소원인 서울에 정착하는 것이 이루어질까. 그러나 사업이 필 때에,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셨을 때에, 결핵을 선고받으시고 결국 3년 뒤 돌아가셨다. 허 참. 공장 일을 할 적에 뭘 깎는 일을 하셨다던데, 그 때에 폐 병을 얻은 것이 그만.

 

그리고 그 다음은 나. 아버지가 어쨌든 서울로 진출에 성공! 하려는 듯 보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심과 함께 어머니는 나를 이끌고 다시 목포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나는 목포에서 공부를 하고,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의 친정이 대전에 있고, 내 일이 대전으로 옮긴다 한 들 별로 힘들 건 없기에 대전에 옮겨서 자식도 하나 낳아서 오순도순 살았다.

 

그리고 나는 우리 가문의,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우리 가문의 목표를 내 아이에게 해 주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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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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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넌 할 수 있지?”

 

--

 

“202171일 밤 1246분에 임종하셨습니다.”

 

의사가 이런 일은 많이 겪었단 듯, 아주 능숙하게 슬픈 척 하면서 말한다.

 

지금 우리 아버지는, 목포에서 대전으로 올라와 나를 낳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결국 우리 아버지도 실패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사인은 폐암. 도시로 나가려던 우리 조상들은 50살이 되기 전에 단명했으며, 폐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의 유언. “아들아 넌 할 수 있지?”

 

과연 나는 할 수 있을까? 우리 가문의 목표를 나는 이룰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팩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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