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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奇談 - 네번째 기이한 이야기 (4)
게시물ID : panic_621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곰
추천 : 21
조회수 : 153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2/24 12:35:57
내일은 글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오유인은 크리스마스에 항상 바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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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바리가 일어섰다. 은정의 영은 다소 진정이 된 듯 울먹임이 얼마간 그친 상태였다. 하지만 해원의 일은 이제야 시작 단계인 셈이었다. 그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은정과 눈높이를 맞췄다.

  “은정씨.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은정이 고개를 들었다. 흐린 눈동자와 반투명한 얼굴 뒤로 창문이 보였다. 바깥에서 누런 가로등 불빛이 살짝이나마 비쳐 들어와 불 꺼진 방 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는 질문을 던졌다.  

  “은정 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나요?”

  아니요

  은정은 잠시 생각하다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단지

  “단지......?”

  단지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은정의 영은 머뭇머뭇 대답했다. 막연한 대답이었지만 해원은 감이 잡혔다. 은정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무언가로부터 빙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이 집 어딘가에 깃들어 있는 그 영의 짓이었다고 한다면 일단 논리적인 설명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우선 왜 은정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 집이 귀신 들린 집으로 불린 건 벌써 삼 년 전부터였다. 그 동안 여러 사람들이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도망가다시피 떠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죽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집에 처음 와 보았다는 은정이 갑작스럽게 귀신에 씌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저승으로 가지 않고 삼 년이나 이승에 머무르면서 멀쩡한 사람에게 빙의되어 자살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힘을 지닌 영이라면 결코 만만할 리 없다는 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해원은 살짝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해원이 몇 가지 질문을 더 해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은정의 영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한참 잠들어 있다가 비몽사몽간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해원이 눈앞에 서 있었다는 것뿐, 그 사이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원은 더 이상 묻기를 그만두었다.

  “그래요, 은정 씨. 고생 많았어요.”

  은정은 말없이 해원을 보았다. 해원은 마음 한 켠이 짠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은정 씨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육신을 잃은 영혼은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올바른 이치예요. 은정 씨는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나야 해요.”

  은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해원은 스스로의 말이 참으로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이치니 원칙이니 하는 빛 좋은 말을 주워섬기면서 정론을 논하는 것은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의 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하지만

  은정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없으면 우리 엄마 어떡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눈물 자국 위로 새로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턱을 지나 떨어진 눈물은 땅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엄마 보고 싶어

  은정이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바리가 그녀를 토닥이며 눈짓하자 해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셔오지요.”


  
  이런 일에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 해원의 지론이었다. 은정의 영에게 몇 가지 물어본 해원은 거실로 나와 바로 은정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어 번 울리더니 바로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도 아직 자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해원은 다짜고짜 한가운데 직구를 던졌다.

  “늦은 시간에다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돌아가신 따님에 관한 일입니다.”

  “예? 무슨 일이죠?”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따님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옷이 곰이 그려진 티셔츠였지요?”

  “예? 그, 그게 무슨......”

  해원은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셨을 때 따님이 좋아하던 참치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셨고요.”

  전화기 너머에서 혼란스러운 침묵이 출렁거렸다. 해원은 내처 계속했다.

  “정말 실례가 많습니다만, 혹시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싶어서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무당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실은 따님께서 어머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요.”

  말도 안 되는 접근법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믿음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해원은 전화를 끊었다. 해원은 저간의 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이쪽의 주소를 알려 주었고, 은정의 어머니는 바로 그쪽으로 가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집은 멀지 않았기에 은정은 집에서 학교에 다니던 터였다. 은정이 울고 있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기도 뭣해, 해원은 현관으로 나와 하릴없이 그녀의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십 분쯤 지났을 무렵,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서자마자 운전석 문이 폭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컥 열렸다. 수척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해원을 발견하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네놈이구나, 이 미친 사기꾼 새끼가!”

  아차. 해원은 혀를 찼다. 중년 남자가 은정의 아버지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십중팔구 슬픈 일을 당한 아내에게 사기를 쳐서 돈이라도 뜯어내려는 소악당을 응징하러 온 것이리라. 곧 차 반대편의 문이 열리더니 중년 여성이 당황한 얼굴로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해원은 얼른 집 안으로 도망갔다. 중년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그를 쫓아왔고 그 뒤를 다시 중년 여성이 쫓아왔다. 해원은 거실을 지나 방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은정의 영은 멍한 눈으로 해원을 보았다. 그는 싱긋 웃어보였다.

  “약속대로 부모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좀 화가 나신 것......”

  “거기 서, 이 새끼야!”

  고함소리와 함께 우당탕거리며 중년 남자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우뚝 섰다. 잠시 사이를 두고 중년 여자가 허겁지겁 뒤따라 들어오더니,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것처럼 멈추었다. 은정의 영이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



  “좀 얌전하게 모셔올 수는 없었어요?”

  바리가 힐난하듯 속삭였다. 은정의 부모들이 들어오자 그녀는 급히 다시 몸을 숨긴 채였다. 해원도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수상한 놈으로 의심받을까봐 걱정하긴 했지만 저렇게 화를 내실 줄 누가 알았나.”

  그들은 방해되지 않게 방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은정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은정의 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은정의 아버지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시 바리가 속삭였다.

  “그나저나 이런 자리에 끼어 있을 때면 참 난처해요. 그렇죠?”

  해원은 동의했다.

  “맞아. 하지만 네가 여기 없으면 아예 이야기도 못 할 테니...... 어쩔 수 없잖니.”

  영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 영과 이야기하는 것은 영의 힘이 강해 이승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예컨대 영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매개체 역할을 한다면, 평범한 사람도 영을 보거나 심지어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바리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해원은 조심스레 은정의 아버지에게 다가가 팔을 두드렸다. 은정의 아버지는 흡사 혼백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모습으로 해원을 돌아보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 아까 그......”

  “처음 뵙겠습니다. 이해원이라고 합니다.”

  해원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은정의 아버지도 당황한 듯 마주 인사를 하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색해하며 허둥댔다. 해원은 웃음을 참으며 부러 점잖게 말했다.

  “아까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해받기 좋은 일이니까요.”

  “그게 참......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고는...... 아무튼 참 감사합니다.”

  은정의 아버지는 그제야 안심한 듯 머리를 긁었다.

  “허 참...... 그래도 이렇게 인사라도 하고 보내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예고도 없이 은정의 아버지 눈에서 갑작스레 굵은 눈물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해원은 못 본 척했다.

  “은정 씨는 곧 저 세상으로 떠날 겁니다. 생전에 못다 한 말씀 있으면 지금이라도 하시지요.”

  숨 한 번 고를 시간 동안 쉰 후 해원은 말을 이었다.

  “제가 이런 일을 하다 보니 갑작스레 가족을 잃은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런데 대부분 생전에 대화가 부족했던 것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십니다. 아주 대단한 말이 아닌,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그런 말들 말입니다.”

  은정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은정에게 다가갔다. 은정이 고개를 들었다.

  “딸.”

  아빠

  은정의 아버지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이분께 들었는데 너는 곧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더구나. 그 전에 이렇게라도 만나니 아버지는 참 뭐랄까...... 그......”

  말이 끝나지 않고 허공을 맴돌았다. 그는 당혹스러워하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아버지가 너랑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는 않은 것 같다.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퇴근도 늦는 편이고, 또 사회생활이라는 게 이래저래......”

  그는 다시 어색하게 말을 멈추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천장만 바라보다 급기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아버지가 말주변이 없네.”

  아빠는 원래 말이 별로 없잖아.

  대답하는 은정의 영이 살짝 미소짓는 듯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양손을 비비더니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은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사랑한다, 우리 딸.”

  나도 아빠도 엄마도

  “나도......”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다시 왈칵 울음을 터트린 사람은 은정의 어머니였다. 은정의 아버지가 가만히 손을 뻗어 아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은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해원에게 웃어 보였다. 반투명한 그녀의 몸에서 어쩐지 은은한 빛이 나는 듯했다.
  이제 가야 하는 거죠

  해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리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아련하게 무가(巫歌)를 읊조리는 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날 신원을 풀어 극락세전에 잘 들어가시라고 오구문 열어줘서 오구대왕문을 열어 오구시왕문을 열어 오구굿 잘 닦게......”

  점차 옅어져 가는 은정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그녀의 부모가 은정에게 무언의 작별을 고하고 있는 동안 해원은 안도감을 느끼며 몸을 벽에 기댔다. 비록 직업적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보람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은정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바리의 노랫소리도 멈추고 방 안에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해원은 망연히 텅 빈 공간만을 올려다보고 있는 부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환청처럼 은정의 마지막 목소리가 해원의 귓가를 살짝 스쳤다.
 
  우리 현경이 잘 부탁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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