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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학] 기억을 따라 오는 여자
게시물ID : panic_886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달의뒷면
추천 : 39
조회수 : 192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6/20 21:35:51
기억을 따라 오는 여자

이야기꾼이란 건 참 얻기 힘든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때까지 보고 겪은 세계가 별세계가 된다.
이를테면 아무리 내가 똑같이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꾼들처럼 사람들을 무섭게 하거나, 즐겁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사촌 누나도 이야기꾼의 자질이 있었다.

사촌 누나는 온갖 수단을 써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게 정말 일탈과도 같은 즐거움이었다.

이제는 더이상 들을 수 없지만.
사촌 누나처럼 잘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이다.

중3 초여름, 사촌 누나는 마치 껍데기만 남은 힘없는 사람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내가 재촉하지 않아도, 심령 스폿이나 수상쩍은 곳에 데려가주곤 하는데
그때는 아무리 부탁해도 대충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들은 새로운 이야기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안색도 별로고, 눈 아래에 다크서클까지 쳐져 있었다.
어느 날 그 이유를 물은 나에게 사촌 누나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봄철부터 사촌 누나는 종종 어떤 꿈을 꾸게 되었다.
그건 꿈이라기보다 기억이었고, 어린 시절의 사촌 누나가
당시에 종종 놀러가던 공원의 모래를 쌓은 곳에서 혼자 노는 광경이 보였다.
몇 번이나 같은 꿈을 꾸던 중,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래 쌓은 곳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연핑크 옷을 입은, 검은 긴머리의 여자가 사촌 누나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여자의 존재를 깨달은 다음 날 밤, 꿈의 무대가 바뀌었다.
조금 자라서 초등학교에 막 입학해서 수업 참관을 하는 날 광경이었다.
뒤에 쭉 늘어 서 있는 학부형 사이에 누나의 엄마도 있어야 했다.
선생님이 시켜서 답을 맞춘 사촌 누나는 자랑스러움에 가슴을 쭉 펴고 돌아보았다.
하지만 거기 있던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공원에서 누나를 바라보던 여자였다.

그 다음 꿈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있었던 운동회 때였다.
사촌 누나는 반 대항 릴레이 경주에 나갔다.
출발하기 위해 폼을 잡고 반 친구가 달려와 바통을 주기를 기다렸다.
이제 곧 온다! 허리를 낮추고 자세를 잘 잡고 뒤를 돌아봤다.
달려온 사람은 공원에 있던 그 여자였다.
양팔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사촌 누나는 공포스러워서 도망치고 말았다.
순간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새하얀 피부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웃고 있었다.

다음 날 밤, 사촌 누나는 자기 전부터 어떤 예감이 들었다.
오늘도 그 여자를 꿈에서 보지 않을까. 확신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꿈 속의 사촌 누나는 중학생이었다.
기억대로, 연주부 연습에 참가했다.
고문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서 트럼본을 불 준비를 했다.
깊이 숨을 들이쉰 채로 사촌 누나는 얼어붙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그 여자였다.
미친 듯이 건반을 두드리며 얼굴을 사촌 누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이상하리만치 흰 피부, 가느다란 눈, 높은 콧날,
새빨간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크게 벌리고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입 안의 덧니가 보였고, 립스틱 때문인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길이가 들쑥날쑥한 검은 긴 머리가 여자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넘실거렸다.

땀에 흠뻑 젖어 눈이 떠졌고, 사촌 누나는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의 꿈 속에서 성장 과정을 되짚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 다음은 초등학생, 이번엔 중학생이었다.
어쩌면 그 여자는 내 기억을 따라오고 있는 게 아닐까.

그 가설은 맞았다.
잠이 들때마다 꿈 속의 사촌 누나는 성장했고, 여자도 어딘가에서 나타났다.
어떤 날은 고개를 들었을 때 계단 위에서,
어떤 날은 전철의 맞은 편 자리에서,
어떤 날은 교실 옆 자리에서.
사촌 누나는 이쯤 되어서 하나의 법칙을 더 깨달았다.
여자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 여자의 흰자위, 이와 이 사이에서 늘어진 타액까지도 똑똑히 보였다.

사촌 누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커피를 마시며 밤을 샜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ㅈ다. 여자는 잠시 자는 낮잠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결국 현실에 다가왔다.

여기까지 말해주더니 사촌 누나는 고개를 숙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몰입해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재촉했다.
재촉하던 나를 치켜뜬 눈으로 응시하더니, 사촌 누나는 천천히 웃었다.

"그러니까 현실까지 따라왔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던 사촌 누나의 입가에 덧니가 나 있었다.

사촌 누나가 언제부터 덧니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출처 http://occugaku.com/archives/27594646.html#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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