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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19) 시공간을 넘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마음
게시물ID : panic_929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복날은간다
추천 : 143
조회수 : 22636회
댓글수 : 76개
등록시간 : 2017/03/26 08: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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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거 알아? "

사내의 말은 소년을 실망케 했다. 
소년이 그를 어렵게 찾아온 목적은 살인을 부탁하고 싶어서였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 데스노트 알지? 그런 것처럼 네 손을 더럽히지 않고 멀리서 사람을 죽일 수 있어. "
" ... "

소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는 볼 일이 없었다. 
한데,

" 네가 정말로 간절하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 얘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
" ... "

사내의 말은 소년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소년이 다시 자리에 앉자, 사내는 빙긋 웃으며 새하얀 '종' 하나를 꺼내 들었다.

" 이 종은 사람의 '살의'를 형상화할 수 있어. 그것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상의 머리를 터트리지. 어쩌면 너도 뉴스에서 본 적이 있으려나? 미제사건들.. "
" 아...! "
" 당연히 간단하지는 않아. 우선은 대상을 정말로 죽이고 싶다는 강력한 마음이 있어야 해! 만약 그런 의지가 없이 어설픈 살의로 이 종을 흔들었다간, 역으로 자신이 목숨을 잃게 돼. 어때? 너는 그런 의지를 확실히 갖고 있다고 자신해? 정말 진심으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 "

사내의 질문에 소년의 눈이 뜨거워졌다.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새끼를 죽이고 싶어요! "
" ... "

사내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 어린아이가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한단 말인가?

" 무슨 일인지..물어봐도 될까? "
" ... "

굳은 얼굴의 소년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우리 누나는 지적장애인이에요.. "
" ... "
" 똑똑하진 못해도 착했어요. 하루 종일 배고픈 것도 참고서 나한테 아낀 빵을 건네던 누나였어요. 누굴 만나도 헤실헤실 웃으며 좋아하던 착한 누나였어요. "
" 음.. "
" 부모님 돌아가시고, 내가 우리 누나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랬는데..그러지 못했어요..! "

소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사람 좋아하던 우리 누나한테, 누구한테나 착했던 우리 누나한테, 그 새끼가 접근했어요. 자기 집에 가서 친구 하자고... 그 개같은 새끼가 우리 누날 강간했다고요! "
" 으음.. "
" 우리 누나한테 그랬대요. 말하면 네 동생 죽여버릴 거라고! 집에 가서 아픈 티 내지 말라고! "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바보 같은 우리 누나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렇게 괴로운데도 나 죽을까 봐, 진짜로 내가 죽을까 봐! 매일 같이 그 새끼한테 불려가서 당했어요. 그 사람 좋아하던 우리 누나가, 다른 사람들 눈도 못 마주쳤어요! "
" ... "
" 우리 집 부모님도 없고 만만한 거 아니까, 나중에는 그 새끼가 아예 우리 누나 데려다가 성매매도 시켰어요!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장애인이라 반값만 받는 거라고! 먼저 임신시키기 게임이라고! 당첨되면 우리 누나 팔겠다고! 그 개같은 새끼가 그랬다고요!! "
" 저, 저런 씹새...! "
" 우리 누나 싫다고 하면 때리고! 말 안 듣는다고 때리고! 감금해놓고 하루 종일 때리고! 개만도 못하게 사람 취급도 안 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우리 누나 죽었어요! 그 새끼가 우리 누날 죽였다고요!! "
" 아.. "
" 그런데 그 새끼 뭐라는 줄 알아요? 실수였대요! 우리 누나가 계단에서 미끄러졌대요! 자기가 우리 누나랑 사귀던 사이였대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이 서럽게 떨렸다.

" 그 새끼가 무죄래요... 무죄라잖아요... 우리 누나가 유혹했대요.. 우리 누나가 돈 벌고 싶어서 그랬대요.. 으윽.. "
" ... "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 그 새끼 내 손으로 죽이려 했는데..그러지 못했어요. 내가 너무 약해서..! 내가 형편없이 약해서, 그 새끼들 한 대 때려보지도 못하고..!  "
" 허... "

그제야 사내의 눈에, 소년의 몸에 남아있던 상처와 흔적들이 보였다. 

" 그 새끼가 자기한테 고마워하래요. 네 병신 누나는 평생 여자로 살아보지도 못할 거였는데 자기 덕분에 잘 놀다 갔다고! 자기보고 고맙다고 절을 할 거래요! "
" 이, 이런 씹새가?! "

그는 인정했다. 소년의 살인 의지는 확실했다.

" 그래, 내가 너라도 그 새끼는 꼭 죽이고 싶을 거다. "

사내는 진지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간단하지가 않아.. 아까 말했지? 역으로 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이 종은 결국, 마음의 싸움이거든. 네가 그 새끼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과 그 새끼가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의 싸움 말이야. "
" 저는 정말 그 새끼를 죽이고 싶다고요! "

소년은 확고한 듯 눈에 불을 켰지만, 사내는 소년을 진정시켰다.

" 알아 알아. 네가 진심인 거 다 알아. 하지만 그 새끼가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너만큼이나 강력할 거야. 오히려 그런 새끼들일수록 더 악착같지.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게 '개인전'이 아니라는 거야. "
" 무슨 말이에요? "

사내는 조금 안타까워진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사람의 마음이란 건 복잡하고 관계적이라... 그런 새끼의 목숨도 누군가에겐 소중하다는 거지. 가령 그 새끼의 부모님이나 친구들 같은... 그 새끼가 죽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주변에 많을수록 네가 불리해. "
" 하지만...! "
" 너는 어때? 너처럼 그 새끼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네 주변에 많니? 너는 네 편을 많이 가지고 있어? "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없어요.. 우리 할머니뿐이에요... 동네 사람들도, 어른들도, 경찰들도! 이 더러운 세상에 제 편은 없었다고요! "
" 아... "

사내는 안타깝게 고개를 흔들었다.

" 그렇다면 안 돼. 종을 흔들어봤자 네가 개죽음당할 뿐이야.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한다고, 그 새끼의 부모는 분명 그 새끼가 죽는 걸 절대 원하지 않을 거라고. 그것만으로도 네가 질 거야. "
" 아니 그런...! "

소년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사내는 미안한 듯,

" 네 사정은 안타깝지만...네 편이 너무 없구나.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네 얘기를 듣고 그 새끼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안 될 거야. 미안하다. 괜한 기대를 하게 했구나. "
" ... "

소년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사내를 더 미안하게 했다.

한데 다음 순간,

" 엇?! "

소년의 손이 번개처럼 '종'을 낚아채 갔다! 
놀란 사내가 말릴 새도 없이, 소년은 힘껏 종을 흔들었다!

' 쩡-! '

" 아, 안돼! "

소년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사내는 급히 종을 빼앗아 들며 빌었다!

제발! 그 새끼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없기를! 부모에게 버림받고, 친구들에게 미움받는 새끼이기를! 

하지만, 사내는 탄식했다.

" 아- "

종을 통해 전해지는 그 새끼의 편은 다섯이었다. 다섯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새끼의 죽음을 원치 않았다.
사내는 안타까운 얼굴로 쓰러진 소년을 보았다. 
왜 이 불쌍한 소년이 죽어야 하는가? 왜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아닌 이 불쌍한 남매가 목숨을 잃어야 하는가?

" 하아... "

안타깝게 한숨을 내쉰 사내는, 차마 소년의 머리가 터지는 걸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한데?

" 으...아저씨...? "
" ?! "

소년의 정신이 돌아왔다!

" 어, 어떻게?? "
" 그 새끼... 그 새끼 죽었어요...? "

놀란 얼굴의 사내는 곧, 눈을 부릅떴다!

" 그, 그래! 그 새끼가 죽었구나! 그 새끼가 죽었어!! "
" 아...아아...! "

소년은 격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서럽던 눈물을 쏟아내며 누이의 이름을 불렀다.

" ... "

사내는 복잡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소년의 마음에 상처가 아무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후에 소년은 물었다.

" 그런데 왜 제가 아닌 그 새끼가 죽게 된 거죠? 그 새끼의 편이 더 많았다고 했잖아요? "
" ... "

사내는 먼 곳을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 마음이란 것은 참 복잡하단다. 만져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지만, 참 복잡한 것이란다.. "
" 예? "

" 그 새끼를 살리고 싶은 사람은 다섯이었지. 하지만, 그 새끼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수백 명이 넘었어. "
" 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

사내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 아주 많았단다. '저런 새끼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주 많았단다. "

" 그들이 누군데요? "

" 그들은 지금도 보고 있단다. 그래, 보고 있지. "

사내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출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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