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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보신탕 집
게시물ID : panic_929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수컷수컷
추천 : 18
조회수 : 4429회
댓글수 : 21개
등록시간 : 2017/04/01 17:38:25

#1

이사를 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타지입니다. 외롭겠지만, 그와의 이별을 잊기에는 적당한 거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2

가진 돈이 많지 않아 상가 건물의 2층에 세를 들어갔습니다. 1층에는 “임대문의”라고 써져 있습니다.


#3

1층에 가게가 들어왔습니다. “맞춤영양식”이라고 하는데, 실은 보신탕 집입니다.


#4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고양이 가족을 만났습니다. 고등어 무늬의 어미와 점박이 새끼 2마리, 어미의 무늬를 꼭 닮은 고등어 무늬 3마리였습니다. 그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고양이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알레르기 때문에 만지지도 못했지만요.


#5

몸이 가렵습니다. 손에 상처가 났습니다.


#6

길고양이 가족을 다시 만났습니다. 점박이 2마리가 안 보입니다. 어미는 전보다 사람을 경계하는 눈치입니다.


#7

지금 살고 있는 곳에 큰 불만은 없습니다. 보증금도 비싸지 않고 월세도 감당할 만한 수준입니다. 다만 가까이 있는 주택 단지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수면을 방해합니다. 안 그래도 잠이 모자란데 말입니다.


#8

몸이 또 가렵습니다. 병원에서 연고를 처방받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반찬 몇가지를 샀습니다. 반찬가게에서는 하얀 말티즈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매우 귀엽게 생겼습니다. 티없이 까만 눈동자가 마치 그를 닮았습니다. 나는 그의 강아지처럼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얼굴을 좋아했습니다.


#9

요즘은 잠을 푹 잡니다. 주민 민원이라도 들어온 걸까요. 주택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줄었습니다.


#10

길고양이 가족, 아니 고등어 새끼 한 마리만 만났습니다. 어미는, 다른 형제자매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새 많이 자라서 이제는 꽤 덩치가 커졌습니다. 몸이 다시 가렵습니다.


#11

그에게 사준 명품 지갑의 할부가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그는 보살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새 카드 청구서의 금액이 불어나 있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안녕입니다. 참, 아직 정장과 구두 할부가 남았군요.

#12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전단이 동네 곳곳에 붙어있습니다. 반찬가게의 그 말티즈입니다.


#13

처음으로 1층 보신탕집 주인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장사가 생각보다 잘 되는 모양입니다. 찾는 사람이 있는 걸 보니, 개나 고양이 고기를 먹으면 보신이 되는 걸까요? 문득 그가 다시 생각납니다. 그에게 개고기라도 먹였었다면, 그가 나를 좀 더 열정적으로 사랑해 줬을까요? 그와의 관계에서 그는 받기만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게 다, 어쩌면 보신탕을 먹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난 매일 아침 그에게 녹즙을 직접 갈아서 주고, 비타민과 영양제도 꾸준히 챙겨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나에게 해 준 사랑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고양이들이 나보다 더 사랑받는 듯해 보였습니다.


#14

몸이 또 가렵습니다. 손에 밴드를 붙였습니다.


#15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을의 개나 고양이들이 자꾸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16

그와의 추억이 깃든 사진들을 정리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사진 속의 그는 내가 사준 옷과 입고 내가 사준 신발을 신은 채 그의 고양이들과 함께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은 그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17

1층이 시끄러워서 밖을 내다보니, 반찬가게 주인이 1층 보신탕집 주인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반찬가게 주인이 대뜸 찾아와서 보신탕집 쓰레기를 뒤졌습니다. 애완용 목걸이를 찾아내지 뭡니까. 목걸이에는 반찬가게 주인이 키우던 말티즈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보신탕집 주인은, 자기는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은 개나 고양이를 직접 잡지 않고, 그런 걸 하는 도살장은 따로 있고 자기는 고기만 납품받아 조리해서 파는 게 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경찰이 오고 보신탕집 주인은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18

혼자 남은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비쩍 말라있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나는 준비해 간 간식 캔의 뚜껑을 따서, 바닥에 놓아둡니다. 고양이가 조심조심 다가옵니다. 어미를 잃은, 형제자매와 헤어진 슬픔과 공포, 기억조차 굶주림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따뜻한 음식이건, 사랑이건, 굶주림은 견딜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양이가 캔에 입을 가져다 댑니다. 쥐고 있던 끈을 당깁니다. 철컹! 하며 우리가 닫힙니다. 나는 우리채 집으로 가져옵니다. 고양이는 날뛰지만 소용없습니다. 고양이를 꺼냅니다. 햘큅니다. 밴드로 가린 상처가 더 벌어졌습니다. 그래도 손의 상처보다 벌써부터 피부가 가려워 옵니다. 얼른 끝을 내야겠습니다. 도마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식칼로 내리칩니다. 탕! 너무 쉽게 머리와 몸이 떨어집니다. 머리는 멀리 던져버리고 몸은 쓰레기봉투에 담아 보신탕집 앞에다 버려놓습니다.


#19

보신탕집 주인은 가게를 닫아야 했습니다. 그의 가게에서, 동네 개나 고양이들을 불법으로 도축했다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20

그는 진짜 이기적인 새끼였습니다. 주는데로 받기만 하고 섹스도 자기 편할 데로만 하고. 자기 선물뿐 아니라 자기가 키우던 고양이들 간식도 내가 사주길 요구했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그에게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는데 그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키우던 고양이들, 그 망할 잡것들은 그에게 어떤 사랑도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그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정말 싫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싫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은 건 다 그 요물들 때문입니다.


#21

집을 내놓았습니다. 집주인도, 그런 흉흉한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며 순순히 보증금을 돌려주었습니다. 보신탕 집 주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나로서는 일이 수월하게 풀린 셈입니다.

이번에는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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