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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게시물ID : panic_932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선비로소이다
추천 : 22
조회수 : 141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7/04/26 23: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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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한 해가 저물면 엄마가 풀을 다듬고 물을 끓인다. 밥짓는 냄새에 슬쩍 반찬을 살펴보고 와구구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나가야지.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는 엄마 말에 대충 대답하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죄 풀이라 먹을 게 없네.  

하얀 하늘에 더 새하얀 달이 떠있다. 이제 곧 어두워지면 내 눈처럼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겠지.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에 나선다. 동네나 한바퀴 둘러볼까. 내 영역은 중요하지.  

가기 전에 우리 집 발바리며 황구와 인사나 하고 옆집 마당으로 가서 한가운데 앉아 털을 빗는다. 그럼 줄에 묶여서 바짝 약 오른 개들이 화를 내는데 그게 제법 쏠쏠한 재미다.  

 “나비야!!!” 

언니가 개 짖는 소릴 듣고 부엌에서 뛰어나온다. 언니는 쟤들보고 불쌍하다 하는데 먼저 시비 건 쪽은 내가 아니라고. 나만 보면 한입에 죽인다느니 물어버린다느니 하는데 이정도 복수야 쥐꼬리 정도지. 

또 혼나기 전에 냉큼 뛰어 아카시아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언니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껏 산 속으로 내달린다. 풀이며 나뭇가지가 와삭와삭 시끄럽댄다. 와하하. 바람 시원하다. 

나는 이 산의 주인이다. 지하와 지상의 왕이다. 밑으로 기는 것도 위로 나는 것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안 잡히는 것이 없다. 
쥐도 새도 도마뱀도 화려한 유혈목이에 두툼한 두더지까지, 고소한 참새에 콩새에 산비둘기며 박쥐며 기슭 너머 닭장의 닭들까지 모두 내 것이다. 
내가 등장하면 숨을 죽이는 것들을 모두 한번씩은 맛을 보았지. 
뿐인가. 나는 알아주는 안주인이다. 얼룩이 덜룩이 외짝이 잘린꼬리, 주변의 수코양이들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매번 법석이다.  

신나게 산 속을 누비는데 멀리서 불빛과 함께 자동차 소리가 다가온다. 아빠가 왔구나! 아빠라면 보러 가야지. 

나는 짠내 나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고양이 엄마는 우리 형제를 오래도록 서있는 트럭 짐칸에 낳았고, 밥 먹으러 나간 사이 차가 움직여 오래도록 달린 덕분에 지금의 엄마 아빠 손에서 자랐다.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맘마를 못 먹고는 떠나버렸고 남은 하나는 태풍 몰아치던 날 밖엘 나가 변을 당했다. 

고양이 가족은 모두 다 잃었지만 슬픔은 새로운 가족으로 남아준 사람들 덕분에 지탱하고 버틸 만 했다. 
날 제일 처음 안아준 것은 아빠였다. 형제들과 함께 아빠 손 위에 올라갔을 때를 기억한다. 아빠 손에선 쑥 냄새가 났다. 크고 따뜻한 아빠 손. 

엄마는 작고 가느다란 손을 가졌는데 그걸로 못하는 게 없다. 생선도 고기도 닭도 엄마 손을 거치면 엄청나게 맛있어진다. 벗겨낼 털도 가죽도 발라낼 뼈도 가시도 없고, 피 냄새는 간데없고 맛난 즙이 흘러나온다. 세련됐지.  

언니는 항상 날 안고 얼러준다. 노래도 불러주고. 작은 쥐를 잡아다 냉장고 앞에 놓고 언니를 부르면 그 안에 든 맛있는 것으로 바꿔준다. 

발바리와 황구는 어린 사람 손님들이 오면 도망도 못 가고 털을 쥐어뜯기는, 멍청하지만 착한 놈들이다. 이빨이 큰 친구들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얘들은 내 새로운 동생들이다. 

그런 아빠와 엄마와 언니와 발바리와 황구가 있는 집으로 가자. 

빠르게 산길을 내려가는데 오래돼 무너진 무덤가 그림자에서 뭔가 나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항상 그림자 속에 숨어서 일렁거리는 것들 중 하난데 저게 무슨 일로? 
옆집 개들이 와글와글 짖는다. 이번엔 내 탓이 아니다. 
밝고 따뜻한 집으로는 못 따라오겠지. 저건 어두운 곳에 있는 거니까. 

저건 참 고약한 것이다. 어둡고 습한 곳에 숨어서 남의 불행을 잡아채 먹으려 불행을 불러오는 것이다.  

내 그림자를 밟으려는 듯 어둠을 타고 빠르게 쫓아왔지만 난 잡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집으로 들어와서 아빠의 다리에 머리를 부볐다. 아빠는 항상 말린 뿌리 달여낸 냄새며 쑥 냄새가 난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언니를 졸라 치즈를 한 장 얻어먹고 잠을 청하는데 창고 쪽에서 발바리와 황구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언니의 뒤를 따라 창고로 뛰어들어갔는데 천장 구석에 날 따라온 고약한 것이 들러붙어 아른거리고 있었다. 
경계하는 건 잘 하는 일이지만 저건 저렇게 쫓는게 아니지.  원하는 걸 채워준다면 원래 있던 곳으로 갈 것이다. 
나는 옆집 마당으로 들어가 한가운데 앉아 개들을 약 올리기 시작했다. 이거나 받아먹고 떨어져라. 

편안하게 털썩 드러누워 기분 좋게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참에 갑자기 목덜미가 뜨끈해지며 공중으로 몸이 던져졌다. 고성, 할큄, 발버둥 끝에 나는 간신히 커다란 백구의 주둥이에서 벗어나 도망갈 수 있었다. 솟구친 털을 정리하는데 그것이 따라와 기쁘다는 듯 이지러지며 춤을 추고 있었다.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예감에 소름이 끼쳤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  


그것은 엄마의 어깨에 달라붙었고 아빠의 발목을 죄었다. 
그러자 어느 날 이상한 손님 둘이 와서 아빠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엄마는 드러누워 버렸고 언니는 눈물 흘리며 집안 여기저기 굵은 소금을 뿌려댔다. 그것은 소금을 피해 그림자로 들어가 파르르 웃는다. 재수없다.  


부엌에서 죽을 끓이는 언니 등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우리 집 창고 구석에 숨어서 나올 기미가 없다. 
엄마 아빠 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저것이 바라는 만큼 마음껏 불행을 겪고 있다.  
엄마는 더 이상 부엌엘 오지 않고, 언니는 시간 나면 운다. 황구 발엔 가시가 박혀 곪고 발바리는 옆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홍역에 걸렸다. 
나는 배가 살포시 불러와 예외인 줄 알았는데 입안이 온통 아파져 아무것도 못 먹겠다.  

합리적인 판단으로, 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기운을 아끼기로 했다. 
움직임은 최소한. 집 밖은 똥오줌 쌀 때나 잠깐 나가고. 
언니가 종이박스를 좋게 꾸며주어 거기서 콕 들어박혀 쉴 수 있었다.  

어두운 상자 안으로 그것이 들어와 어둠 속에서 날름날름 놀렸지만 난 꼬리를 퍼덕거리며 코웃음 쳤다. 

한참 그것과 실갱이 하고 있는데 갑자기 종이박스가 열리더니 언니가 날 안아 올린다. 
어라?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졌다. 
언니는 날 가방 안에 넣고 닫아버렸다. 
놀라서 펄펄 뛰는 나를 들고 어딘가 간다. 
차 문 열고 닫히는 소리. 부르릉 진동과 함께 나는 또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속박된 자유, 고양이 엄마와의 이별, 형제들의 죽음, 고립. 지나간 기억들이 한꺼번에 나를 때렸다. 

모든 희망을 잃고 나는 목놓아 울었다.   빛 안 드는 좁은 가방 안에 나의 절규와 어느새 따라붙은 그것만 가득했다. 마음과 몸의 고통에 발버둥칠 때 그것은 최고로 기뻐하며 파르륵 떨었다.

 “나비야.”  

언니 목소리가 들리고 가방이 열렸다.

내 그림자에 붙어 날 따라오는 그것을 달고 나는 몹시 달렸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바람 뒤로 사그라진다. 


우리를 위해 찾은 은신처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안전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나무판자로 제법 단단하게 막혀있었고 내려가는 길엔 가파르게 쓰레기가 쌓여있었다. 이거면 요새로는 충분하지.  

잠자리엔 폭신하게 톱밥이 깔려있다. 그것을 잘 누르고 다져 아이를 낳을 자리를 잡았다. 
따뜻하고 폭신해 안성맞춤이었고, 새로운 톱밥이 벽에 붙은 환풍구가 열릴 때마다 계속 쏟아져 나왔다.  
톱밥이 쏟아 질 때마다 그것도 일렁거렸고 나도 꼬리를 휘적거렸다. 

풀 마른 곳에서 사는 건 제법 힘든 일이었다. 바싹 마른 쥐를 놓쳤을 때, 갑자기 커다란 자동차 바퀴가 굴러올 때, 낯선 사람이 나에게 욕설을 뱉으며 돌을 던질 때, 구정물을 마시고 토악질 할 때, 쓰레기를 파먹으며 굶주림에 치를 떨 때마다 그림자 속 그것은 춤을 춰댔고 나는 나의 불행과 그것에게 꼿꼿이 꼬리를 들어올려 보였다.  

이걸 끌고 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가족들이 불행 앞에 말라가는 모습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나는 크고 작은 불행에 침잠하지 않는 법을 알고있다. 
비결을 알려 주자면 하수구 속 쥐를 낚아 챌 수 있는 날렵함과 매대의 오징어를 낚아챌 수 있는 담대함, 그리고 취객에게 소세지와 참치를 상납받을 수 있는 꼿꼿한 꼬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환경이 바뀌어도 맛있는 걸 찾아 먹다보면 그것들이 날 찾아 온다는 말이지. 
바로 내가 잘났다는 말이다. 햄헴. 


 달이 눈을 꼭 감은 밤에 드디어 때가 왔다. 바싹 마른 몸에 고통이 밀려온다. 그것은 그때까지도 날 떠나지 않고 있다. 
난 그저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통증을 다스렸다. 

내 첫 아이. 
힘들게 낳은 아기는 양막에 싸여서 세상에 나왔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다란 나무처럼 마구 흔든다. 

아이를 싸고 있는 막을 찢고 첫울음아 터져라 아기를 핥아댔다. 

아가. 어서 일어나서 젖을 물어 봐. 
세상은 재밌는거야.  
우리는 산으로 집으로 돌아 갈거야. 
거기엔 우릴 기다리는 엄마 아빠가 있단다. 
언니도 발바리도 황구도 있지. 
산은 자유롭고 나무 위는 안전해.  
해가 뜨면 나뭇잎 사이로 숨어있는 모든 것들이 재미있고 달이 뜨면 움직이는 별을 같이 따라다니자. 
네가 걸음마를 시작하면 모든 걸 가르쳐 줄게.  
이가 나기 시작하면 난 너에게 치킨과 생선구이의 맛을 알려줄거야. 
따뜻한 쥐를 잡아 머리를 깨물면 아삭아삭 좋은 소리가 난단다. 

미동없는 아이를 핥으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 눈물이 크게 맺혀 떨어지고 그것이 내 등허리를 뒤덮었을 때, 
첫울음이 터졌다. 

첫아기가 첫울음을 삐약삐약 터트리며 내 품으로 파고 들자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빛 한줄기 없는 지하가 나와 아이의 소리로 가득 찼다. 
골골거리며 삐앵삐앵 우는 아이를 핥으며 젖을 먹이는 사이 나머지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 숨을 터트렸다. 


어느새 그것은 사라지고 어디에도 없었다. 
입구의 나무판자 틈으로 햇빛이 쪼개져 들어온다. 
새로운 아침, 오랫동안 아픔과 굶주림과 외로움에 대해 투쟁해 온 공간 안에 지금은 오직 우리만이 서로를 끌어안고 뒹굴며 행복해했다.

 “나비야~~~!” 

어디선가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두운 지하 굴을 빠져 나오며 허탈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 기분으로 언니를 불렀다. 이제 집에 갈 때야.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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