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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샤워 중 사라지는 시간
게시물ID : panic_946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른이의꿈
추천 : 13
조회수 : 308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7/08/08 06: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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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 샤워를 하면서 사라진 시간이다.


물로 머리를 적시고 샤워기를 잠근다.

샴푸를 짜내어 머리에 묻히고 머리칼을 비비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샤워기의 물을 틀기 위해 수도꼭지에 손이 닿는 순간.

정신줄을 놓고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물을 트는 대신 손을 머리로 옮겨 더듬는다.

샴푸 거품이 풍성하다.

하지만 머리를 어떻게 감았는지 기억이 없다.

매일 샤워를 할 때 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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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김현정 대리에게 함께 영화를 보자는 문자를 받았다.

나보다 두 살 위인 김현정 대리는 홍보실에서 일한다.

홍보실에서 회사 광고를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팀 사업이 광고의 주요 내용으로 나가는 모양이다.

팀의 막내인 내가 홍보팀에서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일을 맡았고, 지난주는 일주일 내내 김현정 대리와 함께 일했다.

금요일 퇴근 직전 급하게 자료를 보내달라는 부탁에 툴툴거리며 보내줬는데, 고맙다고 영화표를 준비 했단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함께 영화보자는 문자를 확인한 순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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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김현정 대리와 영화를 보러 나가기 전에 사워를 하는데 들뜬 마음에 노래가 절로 나왔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어느 순간 음률이 끊겼고, 이 때 처음으로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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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대리와 영화를 보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에게 빠르게 가까워졌다.

헤어짐이 아쉬운 저녁, 나는 그녀에게 나의 원룸에서 자고 가라는 제안을 했고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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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과 사랑을 나누고 함께 잠든 밤 생생한 꿈을 꿨다.

꿈 속의 나는 병원에 있었다.

지금의 내가 아니었지만 분명 나였다.

그냥 일반 병원이 아닌 죽음을 준비하는 시설의 작은 병실에 누워 있었다.

온 몸에 고통이 밀려왔고, 이내 간호사가 들어와 링거에 진통제를 넣어주었다.

정신이 또렸해지며 남은 시간이 불과 몇 분도 안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의 몸은 마지막 남은 기운을 모아 나의 오감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래 마지막 1 분은 그냥 이렇게 느껴보자.’

코 끝에 느껴지는 호흡 하나 하나.

담요에서 올라오는 섬유 유연제 냄새.

창 블라인드의 흔들리는 나무가지의 그림자.

가습기가 만들어 내는 낮은 기계음.

내 앙상한 손을 잡고 있는 한 남자의 체온.

나는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인사로 무슨 말을 해줄까?'

내가 입을 벌리자 그는 가까이 다가왔다.

“오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머리 좀 쓰다듬어줘.”

그는 말없이 모자를 벗겼고, 머리털 한 올 없는 머리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제 나 가야할 시간인 것 같아.”

나의 두 눈에 마른 눈물이 흘렀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은 멈추었다.

그는 눈물을 삼키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오빠, 약속 하나만 해줘.”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꼭 좋은 사람 만나고… 나 만큼 사랑해줘.”

그는 대답 대신 나의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두 팔을 모아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면서 눈이 감겼다.

그의 머리결의 곱슬거리는 느낌이 손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귀를 찌르는 심전도 기계의 경고음,

의사를 호출하는 간호사의 급한 목소리,

그리고 나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의 흐느낌이

마치 라디오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한참을 이어졌다.

흐느끼던 그의 목소리는 잠이 깨고도 한참을 뇌리에 남았다.

그는 나를 지연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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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떴다.

현정은 손을 옮겨 나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울어?”

차분한 기분이 여운처럼 이어졌다.

나는 한참을 현정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꿈에 어떤 사람이 죽었어.”

“누가 죽었는데?”

“음—내가 죽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자신이 죽는 꿈은 길몽이래.”

그녀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꿈 속 남자의 손이 머리의 맨 살을 스치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자기는 머리결이 너무 좋아. 욕실에 린스도 없던데, 쓰는 샴푸 내가 가져가서 써야겠다.”

현정의 말에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이 혹시 샴푸의 화학 성분, 뭐 그런 것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혹시 어제 머리 감으면서 별일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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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꼬치 캐묻는 현정에게 나는 샤워 중 기억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럼 어제 저녁에 샤워할 때도 그랬어?”

“응.”

“와—신기하다.”

“하—나는 좀 심각해. 병원에 가볼까 생각 중이야.”

“미안—그런데 그런 병이 있어?”

“글쎄—없지 않을까?”

“음—너 머리 감을 동안 내가 한 번 봐줄까?”

현정과 함께 샤워를 한다는 생각에 심각했던 기분은 사라졌고 나는 야릇한 미소와 함께 얼굴을 붉혔다.

“어머—미쳤어. 난 옷 입고 봐주기만 하는 거야.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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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이 볼 수 있게 샤워 커튼을 반 쯤 열어놓았다.

알몸으로 샤워를 하려니 옆에서 보고 있는 현정이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내가 불편해 하는 걸 눈치 챘는지 현정이 말했다.

“어젯밤엔 한 마리 굶주린 야수 같더니 왜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 하고 그래?”

“샤워 끝나면 또 덥쳐줄테니 기다리라고. 어흥!”

현정의 웃음소리와 함께 물을 틀고 샤워를 시작했다.

머리를 물에 적시고 샴푸를 짜서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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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속옷을 입은 채 뚜껑이 덮힌 변기에 앉아 있었다.

현정은 욕실 문 밖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내가 변기에서 몸을 일으키자 현정은 뒷걸음 치며 말했다.

“이..일어나지마.”

나는 다시 변기 뚜껑 위에 앉았다.

“누나…”

현정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나 갈께. 앞으로 이런 장난 하지마.”

그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급히 옷가지와 가방을 챙겼다.

나는 다시 일어서며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누나. 잠깐만.”

“일어나지마. 제발. 나 무서우니까. 나 나갈 때까지 그냥 거기에 있어줘.”

나는 그녀의 말 대로 변기에 다시 앉았다.

머리에서 바르다 만 샴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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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후 현정에게 그렇게 나와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장난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중인격이나 해리성정체장애 의사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만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자고 했다.

나는 심각하게 떨리는 현정의 목소리에 차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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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회사에서 현정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날 머리를 감던 나는 욕실에서 현정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현정에게 욕실에서 나가달라 했고, 몸을 닦지도 않고 급히 옷을 입더란다.

그리고는 변기에 앉아서 횡설수설 하며 이상한 이야기를 했단다.

암투병으로 죽은 아내에게 왔다고.

머리가 다시 자라면 머리를 반드시 감겨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수많은 약속을 했는데 지킨게 하나도 없다고.

그리고 나에게 ‘지연’이라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다고.

그렇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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