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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정말 미안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게시물ID : panic_976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복날은간다(가입:2011-12-17 방문:773)
추천 : 93
조회수 : 5702회
댓글수 : 41개
등록시간 : 2018/01/10 23: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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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만 하느라 아내에게 신경 쓰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아내보다는 회사가 더 중요했다. 그렇다고 아내의 교통사고가 내 탓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모를 죄책감이 조금은 있었나 보다.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언젠가 한 번, 아내가 보육원에 같이 가자고 했던 적이 있었다. 아내가 죽고 나서 그곳을 찾아가게 된 것은 아마도 내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 사실은 깜짝 놀랐다. 회사 일에 전념해야 할 시간에 이런 낭비라니?
내가 이 내 작은 죄책감을 의식하지 못할지언정, 회사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털어버리는 게 안전했다. 

보육원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건물 뒤편에 있던 '사랑의 틈'이라는 익명의 기부 창구를 발견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기부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기부하는 사람들이야 자기만족으로 하는 거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해보기로 했다. 아내가 생전에 자주 봉사하던 보육원에 기부라도 좀 하면 낫겠지. 그 정도면 아내에게 도리는 한 거다.

일부러 은행까지 들러 백만 원을 기부했다. 딱히 마음이 편해진다거나 하는 걸 느끼진 못했지만, 이제 다시 신경 쓰는 일 없이 회사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뜻밖에도, 다음 날 회사로 그들이 찾아왔다. 보육원의 대표는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 원래는 저희가 무조건 익명을 지켜드립니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CCTV를 뒤져서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
" 아 "

나는 내가 기부한 것 때문이란 것을 파악했고, 귀찮게 괜히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사 일에 전념해야 하는데 말이다.
한데? 그의 다음 말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 자그마치 5억 원이나 기부해주신 분을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만 "
" 아? "

5억 원이라고? 무슨? 당황한 나는 순간,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기부를 하고 나오는 길에 마주쳤던 허름한 복장의 할아버지, 그 노인이었구나! 그 검은 봉지에 현금 5억이 들어있었단 말인가? 헐.
나도 믿을 수 없는 걸, 이 사람들이 생각해낼 리가 없다. 이들은 지금, 설마 그런 허름한 노인이 5억 원을 기부했을 거라곤 생각 못 하고, CCTV만 보고서 나로 착각하고 있는 거다.

" 익명으로 기부하신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솔직히 이런 좋은 일은 크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딱히 보답해드릴 방법이 없어서 참 그렇습니다. 제가 잘 아는 기자분도 계시고 하는데 말입니다. " 

보육원 대표의 말을 듣는 동안,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 허름한 복장의 노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는 아니다. 평생 혼자 모은 전 재산을 죽기 직전에 기부하는 게 뻔했다.
그 큰돈을 기부하면서도 익명으로 했다는 건, 자신이 밝혀지길 바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만약 내가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걸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회사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광고 효과가 엄청날 텐데!

" ... "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 부끄럽지만, 이렇게 찾아와주셨는데 잡아떼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제가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
" 감사합니다! 그럼 보육원에 초청도 하고, 기사도 내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말씀이시죠? "
" 예, 물론이지요. "

나는 사업가의 미소로 빙긋 웃었고,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보육원에서는 그날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기사를 냈다. 현수막도 건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쳤다! 들키면 어떡하지? 그 노인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면 어쩌지?

끔찍하다. 보통 끔찍한 게 아니다. 나는 게다가 아내를 팔기까지 하지 않았나? 죽은 아내가 전념하던 보육원에 사기를 친 남편은 훈훈한 기사보다 훨씬 더 잘 팔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노인이 나타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제발 그 노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오늘내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빌어먹을! 
보육원의 초청으로 찾아가는 길, 우연히 붕어빵 노점을 본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 할아버지였다. 그 노인이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아프긴커녕, 너무나 쌩쌩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알았을까? 기사를 보았을까? 보육원에 가봤을까? 

다행히, 보육원에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5억 영웅이었고, 엄청난 감사를 받으며 초청행사를 끝내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지 못했다. 바로 붕어빵 노점으로 향해 노인을 지켜봐야 했다.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빌어먹을! 괜히 기부 같은 허튼짓을 왜 했을까. 아내를 향한 죄책감은 무슨 개뿔 설레발을.
나를 초조한 심정으로 붕어빵을 파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내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저 노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진실을 밝혀선 안 된다.

.
.
.

지난 며칠간 전전긍긍했다. 거의 매일같이 노인을 찾아가 감시했다. 안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매일 찾아가 노인이 일하는 모습을 온종일 감시하고, 또 노인의 집까지도 미행했다. 그 집의 불이 꺼진 뒤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기부를 한 뒤로, 단 하루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있지도 않은 죄책감을 털어보려고 허튼짓을 했다가 이 꼴이 뭐란 말인가? 나답지 않은 판단 실수다. 나에게 이럴 시간은 없다. 어서 회사 일에 전념해야 했다.

노인은 아직 사실을 알지 못한 듯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끊임없는 장면들을 상상했다.

사실을 안 노인이 괘씸하다며 전면에 나서서 자신의 기부를 증명하는 일.
사실을 안다 해도, 노인은 이미 그런 걸 다 초월한 상태라 끝까지 익명을 지키는 일.
노인이 나섰지만, 허름한 노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일. 
혹, 노인의 수명이 다해서 사실을 밝힐 수 없게 되는 일까지.

억지로 좋은 상황을 떠올려봤자 의미가 없다. 이렇게 계속 회사 일을 내팽개치고 있느니, 행동이 필요했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방법은 세 가지 정도였다.

노인에게 가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무릎 꿇어 부탁하는 방법.
노인이 사실을 고백했을 때, 끝까지 나라고 우기며 노인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방법.
그리고...내 손으로 노인의 수명을 앞당기는 방법.

셋 중 하나를 실행해야만 했다. 아니, 둘 중 하나. 끝까지 나라며 우기는 거짓말은 드러날 확률이 너무 높다. 둘 중 하나를 실행해야만 했다.

" ... "

아니다. 노인한테 솔직히 고백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저 노인이 미쳤다고 '자네가 기부한 것으로 하게'라 말해줄까? 그건 내 바람일 뿐이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지금 내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
.
.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나는 단단히 각오했다. 이 길이 최선이었다.

" 고백할 게 있습니다. "
" 네? 선생님? "

내 선택은 이것이었다.

" 죄송합니다. 오억 원을 기부한 건, 제가 아닙니다. "

보육원에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는 것.

" 제가 기부한 건 백만 원입니다. 저를 오억 원 기부자로 착각하시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습니다. 제가 기부한 건 백만 원입니다. "
" ... "

내 고백을 들은 보육원 대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게 이어질 비난과 멸시, 욕을 기다렸다. 
보육원 대표는 낯선 톤으로 말했다.

" 왜 이러십니까? 선생님 지금 혹시 돈을 되돌려달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
"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기부한 것은 백만원입니다. 오억 원 기부자는 제가 따로 알고 있습니다. 근처에 붕어빵을 파는 노인입니다. "
" 허허 참. "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보육원 대표는 순간, 어딘가로 향했다. 그는 나를 불렀고, 컴퓨터 화면을 보여주었다.

" 이걸 좀 보시죠. 그날 CCTV 영상입니다. "
" ! "

CCTV 영상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나는 그 CCTV가 보육원의 앞길을 찍고 있을 줄 알았는데, 뒤편 '사랑의 틈'을 선명하게 찍고 있었다. 그리고...그곳에는 내가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돈다발을 끊임없이 틈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내 모습이.

" 아...아... "
" 선생님께서 직접 오억 원을 넣어주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좀. "
" 아아아... "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아내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아내에게 미안하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나는 아내를 정말 사랑했구나. 

궁금하다. 그동안 번 모든 돈을 아내를 위해 바친다 해서, 이제 와 아내가 기뻐할까? 아내가 날 용서해줄까?

미안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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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아니라, 책 소개입니다; 이번에 나온 제 책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aladin.kr/p/kUjok <회색인간>
http://aladin.kr/p/VUjKa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http://aladin.kr/p/AUjoJ <13일의 김남우>

그리고 정말 죄송한 부탁을 드리자면; 시간이 남으실 때 제 책에 대한 서평이나 평점을 남겨주시거나, 주변 도서관에 제 책을 신청해주신다면 정말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귀찮지 않게, 시간이 남으실 때요;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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