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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히말라야에서
게시물ID : panic_976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깨동e
추천 : 31
조회수 : 24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1/12 01:42:15
설맹이 왔다. 선발대는 이미 앞서 나간지 오래이고, 나만 이렇게 혼자남아 내 남은 시간의 고통이 덜 하기만, 그리고 그 시간이 짧기만 바랄뿐이다. 

내 몸은 여기 남아 산이 되면, 또 다른 이방인의 이정표가 되어 주겠지. 히말라야의 밤은 이르다. 그리고 매섭다. 점점 잠이 쏟아진다.

*

"형씨, 눈좀 떠보시오."

"여기가 어디오?"

"형씨, 운 좋은줄 아시오. 아이젠에 문제가 생겨 지체되다 형씨를 찾았소. 꼼짝없이 동태 되겠기에.. 허허. 잔말말고 한잔 하시오."

히말라야 눈을 녹여 끓인 따듯한 커피한잔에 몸도 마음도 녹는거 같다. 설맹이온 눈은 모래를 갖다 넣어놓은듯 쓰리고 눈물이 줄줄 흐른다.

"나 때문에 내일 등반이 지체 되는건 아닌지 그저 미안하오."

"걱정 마시오. 내일은 내일의 하산이 있는거 아니겠소? 뭣 한다고 이 험한 산길을 오르셨소."

*

2017년 설

"아빠! 힘내세요~ 나은이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나은이가 있어요~"

오랜만의 긴 연휴이기도 했고, 예쁜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거 같던 딸과 함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보, 졸리면. 우리 여기 근처에서 하룻밤  묵었다 가요."

오랫동안 집을 비워놓는다는것에 대한 불안감도 그러했지만, 얼마남지 않은 귀경길에 그리 큰 일이 있겠나 싶어 무리한 운행이 이렇게나 큰 사고로 이어질줄이야.

[속보] 영동고속도로 18중 연쇄 추돌 사고, 사망 14명, 중상 8명

하루 아침에 가족이 해체 되었다. 그리고 나만 남았다.

*

"거 산쟁이들 치고 사연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니 한 젓가락 하시오. 눈에 아다리 오셨소? 고글없이 눈밭에 파묻혀있는거 보고, 이 양반 분명 아다리구나 생각했는데, 운좋은 줄 아시오. 좀 불편하더라도 이거 끼고 나랑 같이 내일 쉬엄쉬엄 내려가봅시다. 아이젠이 박살나서, 나도 더 이상 등반은 무리요."

얼큰하고 뜨끈한 라면 국물과 면발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서야 허기가 미친듯 몰려오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라면을 흡입하고 나니, 꽁꽁 얼어있던 손발에 피가도는 느낌이 난다.

"고맙소. 내 생명의 은인으로."

"산쟁이들끼리 그런게 어딨소. 서로 돕고 상부상조 하는거지."

그는 도박으로 전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찾기위해 산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죽을 결심으로  오르고 또 오르다보면 뭔가 결판이 날거 같아 시작한 산행에 재미를 붙였단다.

"거,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잠자리에 듭시다. 비좁긴해도 바깥에서 동태되는거 보단 낫지 않겟소?

*

다음날 아침. 동쪽에서 뽀얗게 올라오는 햇살에 눈이 띄인다. 어느정도 회복된 덕에, 눈 상태는 어제보다 한결 가볍다.

"일어나셨소?"

등지고 모로 누워있는 그를 손으로 한번 툭 건들어본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느낌이 왠지 이상하다.

"일어나보시오. 아침이요"

마치 나무토막을 흔드는듯한 느낌에 등에서 부터, 꼬리뼈까지 열기가 훅하니 훑고 지나간다.

*

그는 산에 일부가 된지 오래 되어보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제 날 여기까지 끌고온 건, 대화했던, 따듯한 라면과 커피를 건네던 그사람은 누구였을까.

산기슭 어딘가에 묻혀 동사하기만을 기다리던 나를 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난 눈이 시리도록 부신 끝이 안보이는 설원을 한없이 걷고 또 걷고 있다.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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