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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한국말을 하는 이유 (2/2)
게시물ID : panic_977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른이의꿈
추천 : 58
조회수 : 3865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8/01/15 05: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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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은 이야기는 여기에: [단편] 한국말을 하는 이유 (1/2)
그럼 두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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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캐나다로 출국이어서 나는 노인의 집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읍내의 모텔에서 묵는다고 말을 꺼냈다가 노인에게 혼쭐이 났다.

그리고 오후에는 홀로 백마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알버타의 겨울 바람만큼 매서운 칼바람이 쉼없이 불어왔다.

추운 날씨에 노인의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위령비에서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4살 때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집에 큰 불이 났고, 화마는 엄마와 엄마의 물건, 그리고 엄마의 기억까지 모두 삼켜버렸다.

엄마 체취도, 엄마 얼굴도, 심지어는 엄마의 장례식까지 온전하게 기억에 남은게 없다.

그나마 몇가지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 중 하나가 엄마 이름 그리고 그 이름에 얽힌 사연이다.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중 이곳 Battle of White Horse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얼마 후 엄마가 태어났고, 외할머니는 엄마의 이름을 이곳 지명을 따서 Whitehorse로 지었다고 한다.

나는 한나절 내내 찬바람을 맞으며 백마고지 전투 위령비 주변을 서성였다.

날이 저물고 나서야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노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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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늦지 않게 출발하기 위해 미리 짐을 준비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대부분이 옷이라 특별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노인은 내 옷가지를 모아 빨래를 해 널어놓았으니 내일 아침이면 마를 것이라 했다.

아차 싶었다.

건조대에 걸린 얇은 외투의 안주머니를 확인했다.

물어 젖어 눅눅해진 여권이 나왔다.

나는 여권을 펼치고 들러붙은 페이지를 한장한장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다행히 사진과 개인정보가 있는 첫페이지는 코팅이 되어있어 멀쩡해 보였다.

노인은 연신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괜찮을 거라며 노인을 안심시켰다.

노인은 하나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그랬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며 무척 속상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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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나는 출발하기 전 서울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 전화를 했다.

원래는 새 여권으로 재발급 받아야 하는데,

여권 상태가 양호한 듯 하고 비행기가 오늘 출발하니 우선 인천공항으로 가라고 했다.

제 3국을 경유하지 않아서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는데만 문제가 없으면 괜찮을 거라 했다.

하지만 여권 훼손 정도에 따라 토론토 공항에서 캐나다 입국이 조금 늦어질 수는 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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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티켓 발권과 출국심사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문제는 토론토 공항에 도착해서 터졌다.

여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며 나는 별도의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3시간을 기다려 이민국 직원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여권이 훼손되어서 신원확인이 필요했다.  

이민국 직원은 여권, 운전면허증, 의료보험카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분증을 가져갔다.

한참동안 컴퓨터로 확인을 하다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신원확인이 안된다 했다.

과거에 내가 이름을 바꾼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여권 발급 받을 때 출생증명서 (birth certificate) 때문에 애먹은 생각이 나서 말했다.

“(이름을 바꾼적은 없는데, 제 출생증명서에는 성이 McNeil이 아니고 MacNeil로 적혀있어요.)”

“(성을 나중에 바꾼 건가요?)”

“(바꾼 건 아니고, 아버지 말로는... 출생신고 사무소 서기가 실수로 잘못 받아 적었다고 들었어요. 출생증명서가 나온 후에는 고칠 수 없었고요.)”

이민국 직원은 컴퓨터로 다시 확인을 했고, 이내 입국심사 도장을 찍어줬다.

직원은 이민국 시스템 상에 나의 성이 MacNeil로 되어있다 했다.

그래서 McNeil로 개명신청을 먼저 한 후에 여권을 재발급 받으라고 알려줬다.

입국심사는 끝났지만 내가 직접 경찰을 만나 확인할 사항이 있다 했다.

나는 무슨일인지 물었고 이민국 직원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했다.

경찰에게 직접 들으라며 나를 공항 내 경찰 사무실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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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사무실에서 2시간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경찰관에게 이민국 직원이 준 서류를 건넬 수 있었다.

경찰관은 나에게 미국 여권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국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미국 여권이 있느냐고 답했고,

나는 경찰관에게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미국에서 태아난 미국 시민권자란다.

캐나다에서 태어났어도 속인주의 원칙에 따라 나에게 미국 시민권이 있다 했다.

“(하하. 아마도 이민국에서 신원확인이 잘못된 것 같네요. 저희 부모님은 알버타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어머니 이름이 Whitehorse MacNeil, 아버지 이름이 David MacNeil 아닌가요?)”

“(맞긴 한데…)”

“(Whitehorse MacNeil이 16년 전에 당신 실종신고를 냈어요. 올해까지 매년 실종신고 갱신을 해왔고요.)”

경찰관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당신이 Whitehorse MacNeil을 만날 의사가 있는지 묻는거에요.)"

죽은 줄 알았던 엄마가 매년 나의 실종신고를 해왔다는 말에 머리 속이 멍해졌다.

경찰관은 종이 한장을 내밀었고 여전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Whiltehorse MacNeil과 만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이 서류에 표시하고 서명해서 제출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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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간단한 서류를 벌벌 떨면서 작성했고 서명한 서류를 경찰관에게 건넸다.

나는 경찰관에게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칸에 내가 제대로 표시를 했느냐고 물었고,

그가 ‘Yes, you did.’라고 말한 것까지 나는 기억한다.

그 다음은 내가 어떻게 경찰 사무실을 나왔고 어떻게 공항에서 기숙사까지 왔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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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경찰로부터 엄마의 주소와 연락처를 받았다.

엄마는 미국 텍사스 달라스 공항에서 토론토로 오는 중이라 했다.

나는 공항으로 나갔다.

도착장 게이트 앞에 Whitehorse라고 적은 종이를 들고 기다렸다.

한사람 한사람 지나치고 시간이 지날수록 손에 땀이 흘러 종이를 들고 있기 힘들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혹시 엄마가 이름을 못 보고 지나친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 한 중년 여성이 내가 들고 있던 종이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나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Brian?”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두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I am so sorry… so sorry… I am sorry, Brian.”

나는 온몸에 힘이 풀려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Mom’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머리도 마음도 모두 고장이 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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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가족의 성은 MacNeil이 맞다 했다.

엄마는 아빠와 미국 텍사스 한 도시에서 만났단다.

둘이 결혼을 할 즈음 아빠는 캐나다로 건너가 살자고 엄마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엄마가 이유를 물으면 아빠는 캐나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는 게 꿈이라 했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고, 알버타의 작은 시골마을에 정착했다.

결혼 후 아빠는 엄마가 외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점점 싫어했다 한다.

엄마 역시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어서 집에서만 지내는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친정 부모님과 가끔씩 전화하는 것 마져도 아빠가 싫어해서 많이 서운했다고.

그래도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에 아빠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단다.

반면에 아빠는 마을 사람들 한명 한명 무척 친하게 어울렸다고 한다.

아빠가 마을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알고 지내서 엄마 역시 굳이 친구를 만들 필요성을 못느꼈다고.

하지만 나의 첫돌이 지나고, 엄마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낄 즈음...

아빠의 폭력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할 친구 하나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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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에게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거라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맞으며 자랐다.

아빠가 술을 마신 날은 심하게 맞곤 했다.

나는 어릴적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맞으며 자라는 줄 알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친구들의 집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학교 선생님에게 아빠의 폭력에 대해 알렸다.

마을 구성원 전부가 친척 같은 아주 작은 마을.

아빠의 가까운 친구의 아내였던 선생님은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나만 아버지 험담을 하고 다니는 질나쁜 아이 취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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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빠의 폭력 견디며 그렇게 2년을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엄마는 걸어서 집과 마을을 탈출했다고.

일주일 후 외할아버지와 함께 나를 데리러 왔을때 아빠는 이미 나를 데리고 마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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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 이름에 대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은 외할아버지가 아니고 외할아버지의 큰형, 그러니까 엄마의 큰아버지였다.

그분의 유해는 전쟁이 끝나고 15년이 지나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분의 유해가 돌아온 해 외할머니는 엄마를 임신했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남자 아이면 Louis,

여자 아이면 Whiltehorse로 아기의 이름을 준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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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만나고 두달여가 지난 오늘...

나는 엄마와 함께 텍사스의 달라스-포트워스 국립묘지를 찾았다.

나는 그분 묘소의 작은 비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Louis Strassmann (1930-1952) Came Back Home in 1968.’

나를 기다리던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주머니에서 노인에게 받은 십자가 목걸이를 꺼냈다.

나는 목걸이를 비석 아래 내려놓고 속삭였다.

“Thanks for bringing my mom back.”


— 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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