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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제9지옥 - 모욕의 지옥 ( '책 이게 뭐라고' )
게시물ID : panic_978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복날은간다
추천 : 84
조회수 : 13162회
댓글수 : 48개
등록시간 : 2018/01/25 04: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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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지옥은 살인자, 제2지옥은 절도범, 제3지옥은 사기꾼... 제9지옥에는 다른 사람들을 모욕한 사람들이 온다. 

영화감독 김남우가 깨어난 곳이 바로 제9지옥이었다. 
그곳은 아주 어두운 공간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남우는 자신처럼 깨어나고 있는 다른 세 명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들의 얼굴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친하게 알고 지내진 않았지만, 얼굴은 아는 유명인들이었다.

월드컵 국민 영웅 골키퍼 최무정.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유명한 방송 진행자인 장 작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존경하던 스님인 신수 스님.

서로를 돌아보는 넷의 생각은 비슷했다. '저 사람도 지옥에 떨어졌단 말인가?' 특히 스님을 향한 시선이 가장 길었다.
이 어둠 속에서 누구 하나가 입이라도 열기 전, 허공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곳은 모욕의 지옥이다. 너희는 생전에 다른 사람들을 모욕한 벌로 이곳에 떨어졌다. ]

어떤 절대자의 음성처럼 느껴지는 그 말은 위압적이었다. 넷은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를 돌아보며 '아' 깨달았다. 모두 독설로 유명한 사람들이란 공통점을 찾은 것이다.
영화감독 김남우는 원래 거침없이 말하기로 유명했고, 축구 선수 최무정은 은퇴 후에도 특유의 뼈 있는 막말로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이 많았다. 장 작가는 필터 없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방송가에 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고, 신수 스님은 인권운동과 동물보호에 관해선 욕쟁이 스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거친 독설을 내뱉는 스님이었다. 

넷은 자신들이 왜 지옥에 떨어지게 됐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이 어둠뿐인 모욕의 지옥에서 어떤 벌을 받게 될지는 감이 안 왔다. 혹시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지옥인가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 이곳의 너희는 아직 완전한 지옥에 들어선 건 아니다. 완전한 지옥이란 이런 곳이지. ]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허공중으로 여러 광경이 펼쳐졌는데, 넷은 곧바로 헛숨을 들이켰다. 찢어지는 비명이 난무하는 그곳에는 사람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뜯기고, 갈리고, 불타고, 먹히고 있었다. 보는 것 만으로도 온몸이 떨릴 정도로 끔찍하고 무서운 지옥도였다.

네 사람이 충분히 겁에 질린 걸 확인했는지, 광경이 사라지고 다시 목소리가 말했다.

[ 너희에게 이 지옥을 탈출할 기회를 주겠다. ]

넷은 절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사람들을 모욕하여 지옥에 떨어진 너희가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많은 사람에게 모욕당해야만 한다. 너희에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너희 인생에 있어 가장 영광의 순간으로 보내 줄 테니, 그 순간을 모욕의 순간으로 바꾸고 와라. 가장 많은 모욕을 당한 사람을 탈출시켜 주겠다. ]

네 사람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제안이었다.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생전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당연히 망설여지는 일이었지만, 아까 보았던 끔찍한 지옥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넷의 얼굴이 고민으로 굳었지만, 최무정은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 그럼 너부터 보내주겠다. ]

" 아! "

갑자기 최무정의 몸에서 빛이 나는가 싶더니, 번쩍하며 공간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공간에 어떤 영상이 펼쳐졌다. 바로 최무정의 영광의 순간이었다.

함성이 가득한 축구 경기장 골대 앞에서 정신을 차린 최무정은, 자신이 영광의 순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자신이 뛰었던 월드컵의 승부차기 현장이었다.
최무정의 슈퍼세이브로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하게 된 그 경기. 온 국민이 찬사를 쏟아냈던 그의 인생 최고 영광의 순간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최무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영광의 순간을 모욕의 순간으로 바꿔야 한다고?
모욕의 지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 사람의 얼굴도 굳었다. 최무정은 과연 어떻게 할까? 

김남우는 고개를 저었다. 최무정이 저 순간을 바꿀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저 순간이 없었다면 최무정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김남우는 이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살면서 쌓아 올린 명예를 포기할 수 있느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다. 그렇다면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인생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다.
김남우가 생각하기에, 이미 죽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성공적인 살아생전을 보냈다고 자부했다. 교과서에도 이름이 실릴 정도로 존경받는 영화감독이었으니까. 어차피 이미 이승의 삶은 끝났는데, 아무리 지옥이 무섭다 해도 그것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한데, 다음 순간 김남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상 속 승부차기의 순간, 상대 키커가 공을 차자마자 최무정이 꼴사납게 머리를 감싸 안고 제자리에 주저앉는 게 아닌가? 마치 날아오는 공이 무섭다는 듯한 모양새로 말이다.
경기장에 어안이 벙벙한 정적이 돌다가, 엄청난 야유와 고함이 터졌다. 온갖 욕설이 최무정을 향했다.
최무정의 영광의 순간이 완벽하게 망가져 버렸다. 이 사건으로 그가 평생 어떤 모욕을 당할지는 누구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펼쳐지던 영상은 곧 사라졌고, 최무정도 다시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혼란했다. 그 사건으로 바뀌어버린 자신의 살아생전을 급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유명하지 않지만, 월드컵 얘기가 나올 때마다 모욕당하는 삶. 그것이 그의 새로운 살아생전 이었다.

김남우는 최무정의 얼굴을 보며 묻고 싶었다.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느냐고.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이, 목소리는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 그럼 다음은 너다. ]

" 아 "

이번엔 장 작가의 몸에서 빛이 나는가 싶더니, 번쩍하며 공간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공간 너머로 어떤 영상이 펼쳐졌다. 장 작가의 모습이었다.

장 작가의 영광은 순간은, 그의 대표작이 천만 부를 돌파한 기념으로 열렸던 뉴욕의 사인회 현장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팬들과 취재진이 가득했던 바로 그 현장 말이다. 해외 유명 스타들까지 사인을 받으러 줄을 섰던 모습이 얼마나 화제였던가?

하지만 지금, 영광을 순간을 깨달은 장 작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앞서 최무정의 선택도 보았고, 지옥의 끔찍했던 광경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지금 자신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

장 작가는 사인을 기다리는 긴 줄을 한번 둘러보았다. 모두가 선망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눈빛이 흔들리던 그는 곧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펜을 집어 들어, 첫 번째 사인을 시작했다.

[ 이 뚱뚱한 년아! 내 책 볼 시간에 나가서 살이나 빼라! ]

장 작가는 혀가 바싹 말랐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의 사인을 이어나갔다.

[ 씨벌놈! 졸라 못생겼네! 수준 떨어지니까 제발 어디 가서 내 팬이라고 말하지 마라! ]
[ 이런 싸구려 선물 제발 갖고 오지 마라! 버리기도 귀찮다 쌍년아! ]
[ 너한테서 썩은 냄새 나 이 개자식아! 입 좀 다물어라! ]
[ 말을 왜 더듬냐? 너같은 찐따는 사인받으려면 책을 10권씩은 사라 꼭! ]

장 작가는 온갖 욕설로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인이 이상하다는 것을 점점 깨달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크게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까지 나오고, 가드들이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켜야만 하는 대혼란이 펼쳐졌다.

장 작가는 욕설 사인으로 영광의 순간을 망쳐놓은 것이었다.

원래라면 장 작가의 세계적인 위상을 알렸을 이날의 순간은, 그를 쓰레기 작가로 몰락시키는 순간이 되고 말았다. 이후에 그가 사람들에게 받았을 모욕이 어땠을지는 몰라도, 모욕의 지옥으로 다시 돌아온 그의 표정은 괴로움이 가득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본 김남우의 얼굴은 혼란스러웠다. 

왜지? 어차피 이미 죽은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목표는 살아생전의 명예가 아닌가? 장 작가는 명예를 모르는가? 살아생전에 남긴 업적이, 평생 쌓아온 그 명성이 망가져도 상관 없단 말인가?
김남우는 최무정과 장 작가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신수 스님은 어떨까? 
김남우가 돌아본 스님의 표정은 무척 담담했다. 어쩌면 스님은 시종일관 똑같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럼 다음은 너다. ]

" 음! "

목소리가 들려오고, 김남우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생생한 관중을 느꼈다. 
영화감독 김남우의 최고 영광의 순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트로피를 든 김남우의 눈이 흔들렸다. 살아있는 수많은 낯선 사람이 그의 수상소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남우는 지옥에서 잠시 빌려준 이 순간을 느끼며, 깨달은 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 아아 "

김남우는 사람들을 향해,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내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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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복날은간다 입니다.
이 이야기는 < 요조 장강명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 에 제가 출연했을 당시,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보자는 코너에서 잠깐 나왔던 설정을 끝까지 써본 겁니다. 원래 방송에서 굉장히 좋은 반전 결말이 나왔었는데, 그거를 제가 써먹을 순 없으니 이런 밋밋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아으..

요조 장강명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많이 들어주세요! (제 발음이 이렇게 엉망진창일 줄은 몰랐지만요 ㅎㅎ;) 
http://www.podbbang.com/ch/11897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동안 최소한 사흘에 한 번씩은 오유에 단편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ㅎㅎ;

그런데 너무 감사한 제안이 왔습니다. 웹소설 플랫폼에서 단편 연재의 기회를 주겠다고 해서, 다음 주 계약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만약 계약이 성사된다면, 그 플랫폼에서 단편을 연재하게 될 테니 지금과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 같습니다. 당장 삼일에 한 번씩 오유에 올리던 단편은 어떻게 될지...죄송합니다. 
갑자기 저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정말 감사한데, 그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던 게 모두 재밌게 봐주신 여러분 덕분이란 걸 압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유를 배신하는 듯이 플랫폼 연재로 간다는 게 좀...마음이 무겁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단편을 업로드 할 수 없다는 건 확실하겠네요. 죄송합니다.
출처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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