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단편) 어둠 속 텔레비전
게시물ID : panic_979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연히
추천 : 18
조회수 : 16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2/08 05:20:24
옵션
  • 창작글
 
 
 
 
  눈을 감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만약 보이는 것이 있다면 빛의 잔상 같은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홍련은 다르다. 그녀는 눈을 감으면 깊은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 하나를 볼 수 있다. 그 텔레비전에서는 뉴스나 예능, 가요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오직 한 소년의 모습만 소리 없이 흘러나올 뿐이다.
 

 

  그 소년이 실존하는 인물인지, 아니면 홍련의 망상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는 알 길이 없다. 홍련은 안과와 정신과를 수십 번도 더 오갔지만 텔레비전은 여전히 홍련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어느덧 7년째였다. 홍련의 남편은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이유가 홍련 때문이라는 것을 산부인과 의사에게 들은 뒤, 미련 없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둘이서라도 행복하게 살길 바랐던 홍련은 그렇게 무심히 버림받았다.
 

 

  혼자가 된 홍련은 먹거나 자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 안에 놓인 텔레비전 속 소년을 바라보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홍련은 소년이 태어나던 날을 기억한다. 어미의 자궁을 비집고 나와 세상과 마주하던 날, 소년은 아주 크게 울었으리라. 어미의 따듯한 품을 벗어나 차디찬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며 느꼈을 불안함, 홍련은 그 두려운 마음을 달래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홍련에게는 영영 불가능한 일이었다.
 

 

  7살이 된 소년은 주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 그림들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도저히 미취학 아동의 그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장아장 겨우 걸음을 떼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홍련은 새삼 아이의 재능이 대견했다.
 

 

 

 ‘저 아이가 내 아이였다면...’
 

 

 

  홍련은 저런 영특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된다면 남편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이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소년에게도 소년의 부모에게도 그건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만나기만 하는 건?’
 

 

  생각이 들자 홍련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소년을 찾아 남편에게 자신이 미친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홍련은 노트와 펜을 들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텔레비전 속 상황을 세세히 적어나갔다.
 

 

  첫째, 소년의 부모는 적지 않은 나이에 소년을 낳았다. 오후에 소년이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부부는 집에 없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기 위해 맞벌이를 선택했을 것이다. 둘째, 대신 한 여인이 매일 소년과 함께 있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늘어지게 한숨 자다가 소년이 배고픈 기색을 내비치면 대충 밥을 차려주고 그 뒤로는 종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셋째, 소년은 부모가 오기 전까지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다 부모가 오면 격식을 갖춰 여인과 작별인사를 한다. 적어도 여인이 소년의 가족은 아니라는 뜻이다. 소년이 어린 탓에 행동반경이 좁아 생각보다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다. 홍련은 펜 뚜껑을 닫고 홀로 고심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홍련은 소년의 유치원 가방을 보고 소년이 하늘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국에 하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치원이 몇 개나 있을까?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를 소년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나 홍련은 고민했다. 그러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소년을 볼 때면 안타까워서 한숨이 절로 나는 홍련이었다.
 

 

 

 ‘만약 내 아이라면 저렇게 혼자 내버려 두진 않을 텐데...’
 

 

 

  홍련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하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치원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늘사랑 유치원, 새 하늘 유치원, 푸른 하늘 유치원 등등... 생각보다 '하늘'이라는 단어만으로 이름을 지은 유치원의 수는 적었다. 홍련은 열세 곳을 추려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전화만으로 소년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유치원 선생들은 홍련을 경계했고 또 소년에게는 특징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련은 하는 수 없이 열세 곳의 유치원들을 모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열 번째로 경기도 김포에 위치한 하늘 유치원을 찾았을 때, 홍련은 기적처럼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소년은 텔레비전 속 모습 그대로였다. 홍련은 멀리서 소년이 등원하는 것을 바라보다 유치원을 떠나려는 여인에게 접근했다. 홍련은 여인에게 1000만 원을 건네주며 자신이 소년을 돌볼 수 있게 도와 달라 부탁했다. 홍련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그러는 것이라며 내내 사정하자 여인이 마지못해 돈을 받아들었다. 여인이 아이를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썼을 테지만, 홍련의 눈에 여인은 그저 아이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았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홍련은 소년과 처음 마주한 날 자신이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헷갈렸다. 소년은 홍련을 수줍은 얼굴로 바라보았고 홍련은 그런 소년이 사랑스러웠다. 매일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소년의 이름은 청홍이었다. 청홍은 아직 말을 하지 못했다. 홍련이 언어치료를 제안했으나 부부는 청홍이가 스스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몇 달 동안 변함없이 홍련은 청홍이를 제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매 끼니때마다 영양을 골고루 갖춘 식단을 준비했고, 청홍이의 옷에 얼룩이 묻으면 바로바로 벗겨 빨아주었다. 홍련은 종이컵을 쌓거나, 손바닥에 물감을 바르고 놀거나, 풍선에 표정을 그려 넣는 등 다양한 놀이로 청홍이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이런 홍련의 노력 덕분에 청홍은 여인에게 보살핌을 받을 때와는 달리 무척 활달해졌다. 그림만 그리던 방에서 벗어나 밖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이런 청홍이의 변화를 알아챈 부부는 진심으로 홍련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누구도 남의 자식을 이런 식으로 챙겨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홍련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홍련은 전남편에게 청홍이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녀는 부부에게 허락을 맡고 청홍이와 소풍 길을 나섰다. 청홍은 자신의 스케치북을 끌어안은 채 창밖을 구경했다. 홍련은 이대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전남편과 청홍이가 함께라면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홍련은 막연히 생각했다.
 

 

 

  “청홍아, 아줌마는 청홍이가 태어났을 때, 처음 목을 가눴을 때, 걷기 시작했을 때, 분유랑 이유식 끊고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 생일 파티, 재롱잔치 할 때... 늘 지켜보고 있었어. 청홍이가 아줌마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아줌마는 이렇게 청홍이랑 매일 신나게 놀아줄 수 있는데... 아줌마랑 멀리 갈까?”
 

 

 

  홍련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연신 깜빡였다. 홍련이 뒷자리에 앉은 청홍이를 흘끗 돌아보자 청홍이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홍이의 미소를 보고 홍련이 다시 운전에 집중하려는 때 무언가 차 앞으로 튀어나왔다. 홍련은 뒤늦게 핸들을 틀었으나 차는 무언가를 치고 도로 옆에 우뚝 솟은 나무를 들이받았다.
 

 

 

  홍련은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깜빡이를 켜고 뒤를 돌아보자 청홍이가 의식을 잃은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기에 홍련은 황급히 차에서 내려 자신이 무엇을 친 것인지 확인했다.
 

 

 

  ‘제발 사람만 아니어라.... 사람만 아니어라....’
 

 

 

 

 

 

  “....”
 

 

 

 

 

 

  홍련은 도로 위에 맥없이 늘어진 흰 개 한 마리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개를 도로 가에 옮겨놓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사고가 났는데 아이가 의식을 잃었어요. 빨리 와주세요.’
 

 

 

  차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라 주변은 고요했다. 홍련은 다시 차로 돌아가 청홍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뒷자리 문을 열었다.
 

 

 

  그런데....
 

 

 

  청홍이 말고도 세 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 아이들은 정신을 잃은 청홍이 앞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난 사주야!”
 

  “난 육주야!”
 

  “, 난 팔주거든? 너희가 양보해!”
 

 

 

  아무리 내가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도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양보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저 애들이 개 주인인가?’
 

 

 

  홍련은 도저히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심란한 마음으로 119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안 와....’
 

 

 

  그녀가 다시 119를 찍어 통화버튼을 누르는데,
 

 

 

 

 

  쿵!
 

 

 

  그만 2차 사고가 나고 말았다.
 

 

 

 

 

 

 

 

 

 

 

 

  홍련은 깨어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청홍인 큰 부상 없이 병실 침대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지? 삼각대 먼저 설치했어야 했는데....’
 

 

 

  홍련은 발등과 옆구리로 쏟아지는 통증에 신음했다. 아무래도 청홍이를 감싸면서 다친 것 같았다.
 

 

 

  “일어나셨어요?”
 

 

 

  홍련은 뜻밖의 음성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청홍이가 말을 하다니, 홍련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보이지 않던 개 한 마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흰색 진돗개... 홍련이 차로 친 개와 몹시 비슷했다. 진돗개가 깔고 앉은 스케치북으로 홍련의 시선이 옮겨붙었다.
 

 

 

  “저 개가 제 스케치북을 깔고 잠들어 버렸어요. 무서운데 대신 꺼내주시면 안돼요?”
 

 

 

  그녀는 진돗개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스케치북을 빼 들었다. 분명 청홍이의 스케치북이었다. 홍련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스케치북의 앞장을 펼쳤다.
 

 

 

  스케치북에는 한 여자가 다리를 벌린 채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홍련은 황급히 스케치북을 덮어버렸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을 홍련은 막을 수가 없었다.
 

 

 

 

 

 

 

 

 

 

 

 

 

 

 

  “너 또 수술했어?”
 

  “조용히 좀 해....”
 

  “피임이라도 잘 하라니까...!”
 

 

 

  홍련은 친구의 말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임약은 부정출혈에 두통까지 와서 도저히 못 먹겠고, 남자들도 콘돔은 싫다는데 어떡해... 그리구 콘돔은 느낌도 잘 안 나.”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왜 또 분위기를 잡아~ 그냥 주사 좀 맞고 며칠 약 먹으면 돼.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별거 아냐. 의사들도 괜찮다는데 왜 네가 그래?”
 

  “어휴.... 벌써 세 번째야. 정신 차려 이년아. 너 당분간 클럽에는 발도 들이지 마!”
 

 

 

 

 

  홍련은 친구와 대화를 나눈 날 밤 괴이한 꿈을 꾸었다. 한 늙은 여자가 손아귀에 푸른빛을 쥐고서 홍련에게 말하길,
 

 

  “이 아이가 네 팔자에 남은 마지막 아이다. 네가 잘 낳아서 키우겠다고 약속하면 네게 이 아이를 점지해주고, 그러지 않겠다면 아이가 절실한 부부에게 대신 점지해주겠다. 대신 후자를 선택하면 너는 눈을 뜨나 감으나 평생 이 아이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린 홍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단순히 개꿈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삼신 할매의 마지막 경고였던 것이다.
 

 

 

 

 

 

 

 

 

 

 

 

 

 

  ‘그래....3번 낙태했지.
 

  4....
 

  6....
 

  8....
 

 
 
 그럼 차 안에서 떠들던 아이들이 내가 낙태한 아이들의 영혼이라는 말이야...? 말도 안돼....'
 

 

 

 

  홍련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네모반듯한 텔레비전에 흰 개의 모습이 담겼다. 그녀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 청홍이 아니지?”
 

 

 

  홍련이 청홍에게 묻자 청홍의 얼굴에 만연했던 미소가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아이.... 들켰네?”
 

 

 

  “청홍일 돌려줘!”
 

 

 

 

  홍련이 소리치자 청홍이 조금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엄만 날 미워하는구나? 사주랑 육주가 그랬어. 우릴 미워하니까 그 차가운 쇠붙이로 몸을 가르고 역겨운 약을 먹인 거라고 말야
 

 

 

 

..... 사주랑 육주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되돌아갈 수 없어요.”
 

 

 

홍 련은 청홍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다.
 

 

 

  “청홍이 돌려줘!!!!! 청홍이 돌려달라고!!!!”
 

 

 

  청홍은 자신의 목을 감아쥔 홍련의 손을 마구 할퀴었다. 그가 숨을 쉬지 못하여 허공으로 발길질을 해대는데 때마침 병실로 들어온 청홍의 아비가 홍련을 발로 걷어찼다.
 

 

 

  “이런 미,친년! 간호사!!!! 간호사!!!!”
 

 

 

  비명을 듣고 병실로 들어선 간호사들이 일제히 홍련의 사지를 붙들고, 잠에서 깨어난 진돗개가 그녀를 향해 맹렬히 짖어댔다.
 

 

 

  “그 애는 청홍이가 아니야!!! 청홍인 저 개라구!!!”
 

 

 

  청홍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홍련의 눈빛을 피해 아비에게 안겼다.
 

 

 

  “아빠아.....!!”
 

    

 

  그리고 비참하게 끌려 나가는 홍련을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바라만 보았다.
 
  이제 그녀는 생명을 경시한 대가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