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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글곰 奇談 - 일곱번째 기이한 이야기 : 기다림
게시물ID : panic_980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라라J(가입:2016-01-31 방문:1001)
추천 : 35
조회수 : 3099회
댓글수 : 24개
등록시간 : 2018/03/05 13: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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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談 - 일곱번째 기이한 이야기 : 기다림 
 
 
 

그 때는 오토바이 한 대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준비도 대충대충 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도 없었구나 싶군. 

아무튼 1학기 종강하자마자 침낭이랑 옷가지를 대강 쑤셔 넣은 가방 하나만 오토바이에 싣고 출발했지. 

100cc짜린데 출발하기 이틀 전에 샀어. 

물론 중고였지.  대학교 신입생 주제에 새 거 살 돈이 있었겠나? 

그나마도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겨우 살 수 있었지. 

다행히도 마음에 쏙 드는 매물이 싸게 나와서 다행이었어.

서울 빠져나가서 국도를 탔네. 

기름 꽉 채우고 핸들 당기니 잘 나갔지. 

만날 꽉꽉 막히는 서울 시내만 돌아다니다 국도 타니까 이야, 탄성이 절로 나오더군. 

하지만 제한속도는 지켰네. 하이바도 썼고. 쓸데없이 사고를 당하긴 싫었거든.

그렇게 한참 달리다 배고프면 근처 읍내에 들려서 밥 사 먹고, 

그러다 근처에 문화재 표시 같은 거 보이면 거기 들려서 구경도 하고, 

경치 좋은 곳 나오면 오토바이 세우고 노닥거리기도 하고, 

밤이 되면 어디 여관방을 찾아 들어가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적당한 나무 아래 침낭 깔고 노숙하기도 하고. 

여름이었으니까. 


그러다 아침이 되면 또 달리고 그랬지. 

목적지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어. 

무조건 남쪽으로 가다가, 바다가 나오면 다시 돌아오는 게 목표였거든. 

목포로 가든 부산으로 가든 간에 어디든 상관없었던 거네. 

아무튼 낮에 해가 떠 있는 방향으로 달리면 그쪽이 남쪽일 테니까, 

지도 같은 거 없어도 아무 문제도 없었지. 

그러니까 그 날까지는 말이야. 

출발하고 나서 사흘째였나. 가다 보니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어. 

시간은 대강 오후 일곱 시쯤? 해가 슬슬 저물어가고 있을 무렵이었으니까. 

알겠지만 산에서는 해가 일찍 지니까 걱정이 됐지. 가로등 따위는 없는 길이었거든.

다른 차는 한 대도 안 지나가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개통되는 바람에 다들 그쪽으로 다니게 되어서 내가 갔던 길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나 원 참. 나도 어지간히 정신줄을 놓고 다녔던 모양이지. 

멀쩡하고 편한 길 놔두고 그런 길로 들어섰으니 말이야.

아무튼 이거 언제쯤이면 도시에 도착해서 밥 먹고 잘 수 있나 싶기도 하고, 

기름이 슬슬 떨어져 가기에 주유소가 언제쯤 나오나 걱정도 되고 할 무렵이었네. 

언덕을 넘어 구불구불한 내리막 커브를 도는데 갑자기 사람이 보이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일이잖은가? 

차 한 대도 안 다니는 그런 산길에다, 더군다나 근처에는 사람 사는 곳도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해는 저물어 가서 조금만 있으면 어두컴컴해질 때에, 연갈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그런데 그때는 왜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몰라. 

어쩌면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반가웠던 걸지도 모르지. 

난 당연하다는 듯 오토바이를 세우고 말을 걸었네. 


  ‘조금 있으면 밤인데 이렇게 계셔도 괜찮아요?’


반대쪽을 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더군.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생각나네. 

엄청나게 예쁜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하얗고 눈이 커서 미인이라고 할 만한 여자였어. 

생머리가 어깨 부근까지 내려왔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 원피스를 입고 웃옷을 마치 외투처럼 걸치고 있었어. 

신발은 앞이 둥근 갈색 구두였고.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느낌이었어.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왠지 쓸쓸하게 들리는 말투였어. 나는 다시 물었지. 


  ‘누구를 기다리는데요?’
 
  ‘남자친구요. 그런데 안 오네요.’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실망스럽더라고. 

내가 뭐 한번 어떻게 해 보려고 말을 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 좀 그렇지 않은가. 


  ‘남자친구분이 어디 가셨나 봐요? 여자친구를 이런 데 놓아두고요.’
 
  ‘좀 싸웠거든요. 저쪽으로 가 버렸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리막 방향을 가리켰어. 그쯤 되니 상황이 짐작되더군. 

그 구불구불한 도로를 걸어 올라왔을 리는 없을 테고, 더군다나 그 여자는 구두를 신고 있었네. 

아마도 남자가 모는 차를 타고 가던 길에 말다툼이 있었고, 

홧김에 여자가 내리자 화가 난 남자도 그냥 가 버린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여자는 남자친구를 기다리고만 있는 거지.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곳에 자기 여자친구를 버려두고 떠난 놈이 있다고 생각하니 

열이 확 뻗치더라고. 그런 한심한 놈도 애인이 있는데 나는 왜 없을까 싶기도 했고. 


  ‘남자친구가 간 지 오래 됐나요?’
 
  ‘한참 기다렸는데 아직 안 오네요.


에라. 그 남자친구라는 놈 면상이라도 보면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더군. 

남자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그런 개념을 밥 말아먹은 놈이 어디 있나? 생각해 보게. 

그 험한 산길에,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남자친구라는 놈은 여자친구를 버려 놓고 어딘가 가 버린 거야. 

나 원 참. 그래서 내가 그랬지. 


  ‘조금 있으면 밤이 될 건데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어요? 제가 가까운 읍내나 뭐 그런 데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타실래요?’
 
  ‘저를요?’


망설이는 것 같더라고. 세월이 하도 수상하니 내가 의심스러웠는지도 모르지. 


  ‘저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여기 계시면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그녀는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잠시 기다렸네. 

그 사이에도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주변이 어두컴컴해지고 있었어. 

아무래도 이 아가씨를 여기 놓아두면 안 되겠다 싶었지. 

그 때 한참 망설이던 그 아가씨가 그러는 거야. 


  ‘혹시 남자친구가 돌아왔다가 제가 없으면 걱정할까봐......’


그 한심한 남자에게는 너무 아까운 여자더군.


  ‘어차피 길이 쭉 이어져 있으니까 남자친구분이 돌아오면 오는 길에 저희랑 만나게 되잖아요. 그러니 괜찮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설득하니 결국 알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뒤에 태웠지. 

하이바는 그 아가씨 씌워 주고, 날이 어두워져서 라이트 켜고 출발했지. 

핸들 당기니까 아가씨가 내 허리를 붙들면서 등 뒤에 붙는데 이야.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난 그때까지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봤었네. 

그런데 말하자면 그게 바로 스킨십 아니겠나. 스킨십. 

얼마나 좋던지 원. 몸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더군.  

그런데 가도 가도 길이 계속 이어지는 거야. 

내가 산을 넘어 내려가던 중이었으니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평지에 도착해야 정상이잖은가? 

그런데 아무리 내리막길을 내려가도 계속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거야. 

시계가 없어서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참을 갔는데도 길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네. 

게다가 아까 말했지?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었다고. 

그쯤 되니까 막 근심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뒤에 탄 아가씨가 걱정할까봐 뭐라 말도 못 하겠고 원.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달렸어. 

그러다 보니 기름이 다 떨어져서 바늘이 빨간 곳까지 내려가더라고. 

이거 큰 일 났다 싶었지. 

하다못해 다른 차라도 지나가면 얻어 타기라도 할 텐데 다른 차라곤 하나도 안 보이고. 

그 때 뒤에서 아가씨가 그러더라고.


  ‘저어, 잠시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나도 오토바이를 오래 몰았더니 허리가 아파오던 중이었는데, 아마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훨씬 더 힘이 들었을 거야. 

난 얌전히 오토바이를 길가에 새웠지. 

아가씨가 내 허리에 두른 손을 떼고 내리는데 그 상황에서도 그건 좀 아쉽더라고. 

뭐 그 때는 젊었으니까. 


  ‘한참을 온 것 같은데 아직 산 속이네요.’


그 아가씨가 말했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어.


  ‘예. 게다가 사실은...... 기름도 다 떨어져 가네요.’
 
  ‘그래요? 큰일이네요.’


하지만 왜인지 딱히 걱정스러운 말투는 아니더군. 

그렇게 가볍게 대꾸하니까 나도 마음이 편하졌지. 

그래서 가방을 뒤져 물이랑 비상식량을 꺼냈어. 비상식량이라고 해 봐야 초코파이 정도였지만. 


  ‘이거라도 좀 드실래요?’
 
  ‘네. 고맙습니다.’


마침 길섶이 수풀이어서 앉을 만했지. 

오토바이 머리를 그쪽으로 돌려서 라이트를 비추고,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 바닥에 깔았어. 

그리고 거기 앉아서 둘이 초코파이를 먹었지. 

그 때 먹은 초코파이 맛이 지금도 기억나네. 

군대에서 화장실에 숨어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어. 

그렇게 다 먹고 났는데 갑자기 라이트가 픽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컴컴해져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 

요즘 도시에서는 밤이 되어도 여기저기 불빛이 있어서 그다지 어둡지 않지. 

하지만 그건 그런 어설픈 어둠이 아니었어. 진짜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대고 흔들어도 모를 정도였지. 

난 깜짝 놀라서 이걸 어떡해야 하나 하고 있었지. 

그 때 다행히도 라이트에 다시 불이 들어왔어. 

안도의 한숨이라는 게 뭔지 알겠더군. 

정말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거야. 


  “휴우. 다행이네요. 깜짝 놀라셨죠?”


그리고 옆을 보았는데 이런. 그 아가씨가 없지 않겠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더라고. 

라이트가 꺼진 게 기껏해야 한 삼사 초쯤 되었을까. 

겨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것도 그 어두운 곳에서 대체 어딜 갈 수 있었겠나? 

하지만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거야. 정말 당황스럽더군. 

아무리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안 보이는 거야. 


  “저어, 저기요?”


혹시나 싶어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어. 

원래 아가씨가 앉아 있던 곳을 보니 조금 전에 먹은 초코파이의 봉지만 덜렁 떨어져 있더라고. 

허 참.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지. 

그 날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해 봐야 별 소용없겠지. 

결국 그 아가씨는 찾지 못했고, 나는 침낭을 풀어서 눈을 붙였어.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도 여전히 그녀는 보이지 않았지. 

주변을 찾아봤지만 흔적조차 없었고. 혹시나 돌아올까 싶어서 한참을 기다려 봤지만 오지 않더라고. 

결국 점심때쯤 되어서야 기름 다 떨어진 오토바이를 끌고 터덜터덜 내리막을 내려왔지. 

전날 밤에는 한참을 가도 나오지 않던 마을이었는데, 

호수를 끼고 내리막을 걸어 내려가 조금 더 가니 금방 나오더라고. 

오토바이를 끌고 걸었는데도 고작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으니까 정말 가까웠던 거지. 

하지만 그곳에도 그 아가씨는 없었어. 

물론 그녀를 그곳에다 버리고 갔다는 그 한심한 남자친구 놈도 찾지 못했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지금도 궁금해.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네. 







해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난처한 일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벌써 이십일 년 전의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뢰인인 중년 남자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자네에게 의뢰하는 게 아닌가. 쉬운 일이면 내가 했겠지.”
 
  “하지만 사람을 찾는 건 제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같은 일을 사립탐정에게도 의뢰했어. 

 만일 그 아가씨가 사람이었다면 그쪽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거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를 찾는 것이라면 자네 일 아닌가?”
 
 
  ‘우리나라에도 사립탐정 같은 게 있었나.’



해원은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의뢰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허튼 소리는 아닐 터였다. 
 
그는 하릴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방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했고 방음이 잘 되어 있는지 외부의 소음은 거의 차단되어 있었다. 

다만 귀를 기울이면 어렴풋하게 환기용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중으로 된 큼지막한 창문 너머로는 잘 조성된 공원이 내려다보였다. 

중년 남자가 누워있는 환자용 침대와 그 팔에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액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이곳이 병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는 남자가 입고 있는 환자복도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고급스러워 보였다.

해원이 의뢰를 받은 것은 어제였다. 

차분한 목소리의 젊은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회장님’이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쌀과 김치만 축내고 있던 해원은 당연히 응낙했다. 

하지만 약속을 잡으며 그는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의뢰인을 만날 곳은 모 대학병원의 7층에 있는 VIP 병실이었다. 


  “회장님은 몸이 좀 편찮으십니다.”


젊은 남자가 말했다. 


“자세한 걸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최근에 수술을 받으신 후 회복 중이십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병원으로 와 주십사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아니, 저는 아무 곳이나 괜찮습니다.” 

  “그럼 자택의 주소를 말씀해 주시지요. 내일 저희가 차량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차...... 말씀입니까?”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원은 당황해하면서도 자신의 허름한 아파트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침, 약속시간을 정확하게 한 시간 앞두고 휴대전화가 울렸다. 

집 아래 대기하고 있다는 차량 기사의 전화였다. 

현관을 열고 나간 해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덩치가 너무 커서 주차공간을 한꺼번에 둘이나 잡아먹고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차량 밖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기사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더니 오른손으로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뒷자리는 발을 쭉 뻗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음료가 들어 있는 미니바와 함께 크리스탈 잔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목이 마르시면 편안히 드셔도 괜찮습니다.” 
 
  “아, 예.”


해원은 다소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뭔가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벤츠가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동안 해원은 뒷좌석에 앉아 어색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VIP용 1인 병실에 들어가 본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해원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VIP 병실이 일반 병실에서 크기만 키운 것이었다면, 

실제로 본 것은 병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호텔 스위트룸에 가까운 방이었다. 

바닥에는 깔끔한 대리석 타일이 깔려 있었고 한쪽에는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가, 반대쪽에는 식탁처럼 넓은 벽걸이 TV가 배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일정 간격으로 그림 액자가 걸려 있었다. 

큼지막한 창문 옆에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서 상체를 반쯤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던 중년 남자가 해원을 돌아보았다.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눈빛에는 힘이 있었고 목소리는 환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굵은 저음이었다.


  “어서 오시오. 내가 이런 처지라 일어나지 못하는 걸 양해해주면 좋겠군.”


해원은 목례한 후 침대 옆의 목제 의자에 앉았다. 

누가 미리 준비해 놓았는지 의자 옆의 낮은 탁자에는 간식거리와 함께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중년 남자가 손짓했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드시게.”
 
  “고생이랄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어쩐지 얼굴만 마주보고 있는데도 기가 눌리는 느낌이라, 해원은 일부러 가슴을 펴면서 대답했다. 

커피는 향이 좋았다. 해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남자는 바로 말을 시작했다. 


  “석길대 만신께 신세를 종종 지고 있네. 이 문제 때문에 혹시 도와주실 수 있는가 여쭈어 봤더니 자네를 추천해 주시더군.”

  “아. 그래서 제게 연락을 주셨군요.”


그렇잖아도 이렇게 대단해 보이는 ‘회장님’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의아하던 해원이었다. 

하지만 회장의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의문이 해결되었다. 

석길대 큰무당은 워낙 영험한지라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정재계의 유명한 인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도 참, 날 추천하셨으면 미리 귀띔이나 해 주실 일이지.’


물론 해원도 그런 과묵하고 일방적인 큰무당의 성격에는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 

그래도 가끔씩은 바리와 비교해 보며 모녀의 성격이 왜 이렇게도 다를까 궁금해 하곤 하는 해원이었다.

회장은 잠시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산길 도로에서 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네. 벌써 이십일 년 전의 일이지. 

 부탁할 일이란 그 사람을 찾는 거네. 

 그런데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만신께 의논드렸던 것이고.”
 

  “이십일 년 전입니까?”


해원이 반복하며 되물었다. 

까마득한 예전,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난 그 때 대학생이었네. 입학하고 나서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이지.”


회장은 덤덤한 말투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귀신이란 어떤 이유 때문에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에 남아 있는 영(靈)들입니다. "


한참을 고민하던 해원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없어진다면 대부분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됩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설령 귀신이라 해도 지금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인가?”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영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이승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회장이 반문했다. 


  “거의 없다는 건, 가끔은 그런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군. 아닌가?”
 
  “일단 그렇긴 합니다만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해원이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회장은 오히려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다는 거군. 그럼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 의뢰비는 듬뿍 내겠네.”


해원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회장의 기색을 살폈다. 



  “......하나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 뭔가?”
 
  “그토록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왜 지금 와서 찾으려 하시는 겁니까?”


회장은 미소 짓더니 자신의 가슴과 배 사이를 툭툭 쳐 보였다. 


  “지난주에 바로 여기를 수술했네. 간암이었지. 간을 절반 이상 잘라냈어.”
 
  “큰 수술이었겠군요.”
 
  “그래. 사실은 지금도 아파 죽을 지경이네.여기 이 진통제 덕분에 간신히 살아있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회장은 침대 곁에 걸려 있는 작은 플라스틱 통을 가리켰다. 

통에서 뻗어 나온 고무줄이 바늘을 통해 회장의 왼손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정정해 보이십니다.”
 
 
해원이 솔직하게 말했다. 회장이 웃었다. 


  “하하. 나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지위까지 올라왔네. 

  그 동안 배운 것이라면 남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내 뒤통수를 후려칠 사람들이 적어도 일개 중대는 있으니 말일세.”
 

  “그렇습니까. 저는 상상하기 어려운 세계군요.”
 

  “아마 그럴 걸세. 아무튼 지금은 다행히도 다른 부분에 전이가 안 되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걸 거꾸로 말하면 어떤 뜻이겠나?”


해원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솔직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전이될 가능성도 있다......는 뜻입니까?”

  “맞았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더 이상 살아있기 어렵겠지.”
 
 
회장은 담담한 말투였다. 
 

  “그래서 생각했네. 내가 죽기 전에 꼭 알고 싶다고. 

 그 때 내가 만난 아가씨가 대체 누구였는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귀신이었는지. 

 그 남자친구라던 작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는 그 때 왜 그런 곳에 있었는 지를 말일세.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단지 궁금할 뿐이야. 어떤가, 대답이 되었나?”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회장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해원도 마주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회장의 손은 의외로 수척하여 피부 아래의 뼈가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내 비서에게 연락하게. 어제 연락받았을 테니 전화번호는 알고 있을 테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면 적극적으로 자네를 도우라고 이야기해 두겠네.”  
 

  “예. 그럼 중간보고도 그쪽을 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럴 필요가 없네. 이게 내 직통전화이니 경과에 대해서는 이쪽으로 연락 주게.”

 
회장은 침대 곁의 협탁 서랍에서 자신의 명함과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내 명함하고 착수금이네. 활동비가 더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연락 주게.”
 

봉투는 매우 얇은 것이 아무래도 현금이 아닌 수표인 모양이었다. 

얼마일까 하는 궁금함이 소록소록 피어올랐지만 회장의 앞에서 봉투를 열어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꺼운 해원은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명함과 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간직한 후 회장에게 작별을 고했다. 

해원이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회장이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잘 부탁하네.”
 

병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가 깍듯한 태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기사의 정수리에 보이는 희끗한 머리카락 때문에 해원은 마주 고개를 숙이면서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공손히 거절했다. 

 
  “아닙니다. 도중에 들를 데가 있어서요.”
 
  “말씀하시면 그쪽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나온 김에 마트에 들려 장을 볼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부끄러운 해원이었다. 

그 거창한 차를 타고 마트 주차장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내린다는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다행히 기사는 더 권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차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비서를 통해 연락을 주십시오. 
 
회장님께서 본인처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예. 그러겠습니다.”


기사는 말없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구십 도 가까이 접어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해원은 무척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바리가 살짝 놀리는 투로 말했다.
 

  “흐응. 이렇게 깍듯 깍듯한 사람이 또 있네요.”

  “뭔 소리야. 나는 그 정도는 아냐.”
 
  “정말요?”
 
  “......”
 

해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바리는 한참을 킥킥거렸다. 
 

  “엄마가 웬일로 일거리를 가져다주었네요.”

  “감사드려야지.”

 
아마 큰무당 본인이 처리하기는 번거로웠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의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일거리를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것도 평소보다 훨씬 큰 사례가 기다리고 있는 건수였다. 

물론 의뢰를 해결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한한 경험이네, 저런 부자를 만난 건.”
 
  “부자여서 부러워요?”
 
  “응? 아니.”


절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간과 손등에 꽂고 있던 진통제, 

그리고 본인 스스로 인정한 허세를 생각하면 부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안쓰러운 심정이었다. 

해원으로서는 차라리 아프면 아프다고 울 수라도 있는 삶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바리도 동감을 표했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저 나이면 회장님치고는 젊은 거 아니에요?”
 

  “이제 사십대 초반이니 많이 젊은 거지. 어제 좀 찾아봤는데 그쪽 업계에서 진짜 유명한 사람이야. 

  말 그대로 자수성가했는데 우리나라 부자 순위에서 백 위 안에 든다더라. 

 하지만 그 나이에 그 자리까지 갔다면 스트레스도 엄청나게 받았겠지?” 
 

  “그래서 암에 걸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남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회장의 굵은 목소리가 여전히 해원의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해원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기껏해야 근근이 먹고 사는 처지의 자신이 그런 부자를 동정해도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은 회장이 안쓰러웠다. 

바리가 잠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동감이에요.”
 
  “그래. 뭐, 아무튼 장이나 보러 가자. 오랜만에 의뢰가 들어왔으니 일단 냉장고부터 좀 채워놔야겠어.”

 
바리가 동의했다.
 
 
  “맞아요. 요 며칠 콘프레이크만 먹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아까 착수금 받지 않았어요? 그걸로 장부터 보면 되겠네요.”
 
  “아. 잊고 있었네. 수표 같던데......”

 
해원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숫자를 확인한 후 훅 숨을 들이켰다. 바리가 궁금한 듯 채근했다. 
 

  “얼마예요? 얼마?”
 
  “......안되겠다. 이걸로는 장을 못 보겠어. 거스름돈을 못 받겠네.”
 
  “그 정도예요?”
 
  “......중고차나 한 대 사러 갈까.” 
 
  
커피숍 문이 열리더니 후줄근하게 차려입은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해원은 앉은 채 손을 흔들어 그를 불렀다. 

곧 해원을 발견한 원순이 성큼성큼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아 이 자식 진짜. 어려운 일만 시킨다니까.”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기도 전에 욕설부터 먼저 날아왔다. 
 

  “커피 산다니까.”
 
  “커피 정도로 될 게 아냐. 하도 옛날 일이라서 먼지 한 뭉텅이씩 먹어 가며 이틀이나 자료실에 처박혀 있었다고.”
 
  “알았어. 그럼 밥 살게.”
 
  “소고기다. 한우로.”
 

원순이 다짐하며 십여 장쯤 되는 출력물 더미를 내밀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옛날 자료라서 내가 따로 요약한 거야.”
 

해원이 요청한 것은 의뢰인이 그 여자를 만났을 때를 전후하여 그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이력이었다. 

회장이 사고를 당한 건 아니었지만, 만일 그 여자가 사람이 아닌 영이었다면 

설령 그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교통사고 다발지역에는 사망한 사람들의 영이 주변을 맴돌곤 하는데,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다시 사고를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순의 자료를 확인한 해원은 자신의 생각이 맞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를 전후하여 이런저런 사고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사고는 주로 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새벽에 걸쳐 발생했는데 사망사고도 두 건이나 있었고 중상이 네 건이었다. 

사고는 주로 도로를 이탈하여 나무를 들이받거나 가드레일 너머로 추락하는 형태였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자잘한 것까지 합치면 사고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거기 터널이 개설된 건 네가 말한 날에서 이 년 전이야.”

 
잠시 목을 축인 원순이 설명을 시작했다.
 

  “터널이 뚫린 이후로 그 산길 도로의 교통량은 대폭 줄어들었어. 

 사실 유지비를 생각하면 그 도로를 아예 폐쇄해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멀쩡한 길을 왜 없애느냐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냥 두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차가 안 다니니까 사고도 없었지. 그런데 여길 봐봐.”

 
원순은 날짜가 늘어선 목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터널 개통 후 일 년하고도 넉 달 만에 이 도로에서 사고가 났어. 

 그 날에서 팔 개월 전이었지. 사망사고였어. 

 내리막을 내려가던 차가 반대편 가드레일을 뚫고 호수로 추락한 거야.”


  “사망자는?”


  “한 명. 운전자 혼자 타고 있었어. 서울 모 대학의 조교수였는데 나이는 사십대 초반. 

 추락의 충격으로 기절 후 익사했지. 사고 원인은 졸음운전으로 추정되었어. 

 뭐 말 그대로 추정일 뿐이지만 사고가 난 게 한밤중이었으니까. 

 아내의 말에 따르면 지방에 종종 출장을 갔었던 모양이야.” 


  “사망사고가 하나 더 있었다며?”

  “응. 그러니까 어디 보자...... 이 사고에서 오 개월 후네.”
 

회장이 여자를 만나기 석 달 전이었다.  
 

 “승용차가 길 가의 나무를 정면으로 들이받았어. 

젊은 남자 셋이서 어디 놀러가다 변을 당했더군. 셋 다 대학생이야. 

굵은 나무가 절반쯤 꺾일 정도로 세게 들이받았는데 아무도 안전벨트를 안 하고 있었다는군. 

운전자와 조수석에 있던 친구는 즉사했고 뒷자리에 타고 있던 학생은 중상. 

요즘처럼 안전벨트 착용이 강조되던 시절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뭐랄까, 기록을 보면 조금 특이한 점이 있어.”


  “뭔데?”


  “다친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어두운 밤에 차가 내리막을 달리면서 꽤 과속을 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사람이 앞에 나타났다는군. 

  그 사람을 피하려고 운전자가 급히 핸들을 꺾다가 옆의 나무를 들이받았다는 이야기지.”


  “사람? 어떤 사람?”

 
해원은 미간을 좁혔다. 


  “경황이 없어서 자기도 자세히는 못 봤지만, 여자 같았다고 증언했어. 

 하지만 거기는 사람이 걸어 다닐만한 길이 아니야. 조사해 봤지만 역시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여자가 바로 회장이 만난 여자일까? 하지만 근거는 없었다. 


  “다른 사고는?”


  “어디 보자...... 첫 번째 사고 이후로 꾸준하게 사고가 발생했어. 

 삼 년 동안 열한 건이나 발생했으니 석 달에 한 번 꼴인가.

 서울시내 한복판 도로라면 몰라도, 그곳의 교통량을 고려해 볼 때 상당히 많은 셈이지. 

 패턴은 다 비슷비슷해. 구불구불한 길에서 미끄러져 어딘가를 들이받는 식이지. 

 그런데 기록을 보면 운전 도중 사람을 봤다는 증언이 종종 나와. 네 번이나.”  
 

  “그래. 대강 알 것 같다.”


해원이 말했다. 하지만 원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남았어.”
 
  “뭔데?”
 
  “네가 부탁한 걸 조사하다 부가적으로 발견한 거야.”
 
  “뻐기는 걸 보아하니 뭔가 그럴듯한 걸 찾은 모양이네. 대체 뭔데?”

  “한우에 플러스 참치 회까지.”

  “......콜.”
 
  “좋아.”

 
원순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못 뜸을 들이더니 젠체하며 입을 열었다. 
 

  “이 도로는 칠 년 전에 결국 폐쇄되었어. 유지비를 더 이상 들이지 않기로 한 거지.”
 
  “그래서?”

  “그런데 그 이후로도 계속 신고가 들어오고 있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원순은 잘난 체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길인데도 서너 달에 한 번 꼴로 차들이 들어가서 사고를 낸다고. 최근까지.”
 

해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가 영이라면, 

그리고 강하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면 그 사념이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단순히 원한 때문에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사망사고의 빈도가 낮았다. 

게다가 회장의 경우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 경우라면 그 대상은 회장에게도 이야기했다시피 십중팔구 자신의 남자친구일 것이다. 
 

  “원순아, 고생 많았는데 하나만 더 확인해 주라.”
 
  “응? 좋아. 뭐 까짓 거, 한우에다 참치 회인데 그쯤이야 괜찮겠지. 뭔데?”
 
  “지금까지 그곳에서 난 사고가 혹시 모두 같은 방향에서 발생한 게 아닌지 확인해 줘.”


원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방향? 무슨 말이야?”
 

  “거기가 아마 언덕 너머로 내리막길이 쭉 이어질 거야. 

 사고가 난 게 그 내리막 방향, 그러니까 상행 말고 하행 쪽에서만 발생한 게 아닌지 확인 좀 부탁할게.”


  “알았어. 이따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살펴보지 뭐.”

 
원순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더니 커피 잔을 놓고 일어섰다. 

 
  “자, 오늘도 야근이다. 또 야근이야. 그렇잖아도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거기다 툭하면 전화해서 이상한 걸 부탁하는 친구 놈 때문에 말이야. 

 다 내가 부덕한 탓이지 뭐. 그럼 난 간다. 바리한테도 안부 전해 줘.”
 

마치 기관총처럼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원순의 뒷모습을 보며 해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미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또 빚을 졌네요.”

 
속삭임에 해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튿날 저녁에 원순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짓고 있던 해원이 급히 전화를 받았다. 

원순은 인사말 따윈 생략한 채 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야, 정말이네. 사고는 다 하행선에서 발생했어. 반대쪽에서는 한 건도 없어.”
 
  “언덕 넘은 후 내리막길에서 말이지?” 
 
  “맞아. 사고발생지역이 다 그쪽에 몰려 있어. 이걸 왜 몰랐지?”
 
  “사고가 드문드문 일어났으니까, 다 모아놓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나 보지. 가장 최근의 사고는 언제였어?”
 

  “한 달 전이야. 밤 열한 시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도로 옆의 수로에 처박혔어. 

차는 폐차될 지경이었지만 에어백이 터져서 운전자는 타박상 정도야. 졸음운전이라고 하더군.”



해원은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회장은 오르막을 넘어선 후 내리막길에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내리막 방향으로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많은 사고들이 모두 같은 방향에서, 그리고 회장이 여자를 만난 인근에서 발생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지만 애당초 그 사실들이 모두 우연일 리는 없다는 것을 해원은 확신했다.

그는 통화 내용을 바리에게 알려주었다.  
 

  “그 언니가 사고의 원인인 모양이죠?”

  “응. 적어도 그 아가씨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건 확실한 것 같아.”
 
  “하지만 왜요? 남자친구를 찾으려고요?”
 
  “그럴 가능성이 있지.”
 
  “그렇다면 대단하네요. 이십 년이 넘게 남자친구를 찾고 있다니.”



바리가 감탄하듯 말했다. 

하지만 해원은 원순에게 받은 자료를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해원은 휴대전화를 꺼내 회장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동차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막히는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차가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을 훨씬 넘긴 때였다.

해원은 두 번째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편안한 뒷좌석에 앉아 김밥을 우물거렸다. 

차가 출발하기 전에 기사에게도 권했지만, 기사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거절하더니 뜻밖에도 자신의 도시락을 꺼내 보였다. 

안에는 알록달록 예쁘게 정렬된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집사람이 아침에 챙겨 준 겁니다.” 


해원은 이유 모를 패배감에 휩싸인 채 한 줄에 이천 원짜리 분식점 김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포장이 고르지 않아 가끔씩 차가 덜컹거렸지만, 워낙 좋은 서스펜션 덕분에 해원에게 전해지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이대로 죽 달리면 예정대로 해가 질 무렵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원은 김밥을 죄다 먹어치운 후 다시 원순이 정리한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머릿속에서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그려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의 추측을 증명할 근거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해원이 직접 확인해 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는 태양과 더불어 벤츠는 꾸준히 목적지로 나아갔다. 


도로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막 해가 저문 후였다. 

국도에서 비포장 길을 타고 산으로 꺾은 후 한참을 올라가자 이윽고 옛 도로의 흔적이 나타났다. 

오랫동안 방치된 길은 이곳저곳이 엉망으로 패여 있었고, 주황색 중앙선은 눈에 힘을 바짝 주어야 간신히 보일 지경이었다. 

하기야 어차피 다른 차가 없었으므로 차선은 의미가 없는 터였다. 

시멘트가 갈라진 사이마다 잡초가 길게 올라와서 벤츠는 그야말로 수풀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도중에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 있었다. 

길 한가운데 놓인 누런 철제 구조물에다 큰 글씨로 출입금지라고 쓰인 큼지막한 표지판이 붙어 있었지만, 

구조물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해원이 낑낑대며 힘껏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길 한쪽으로 움직였다. 

길을 막았는데도 차들이 들어왔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길을 막은 것치고는 상당히 어설프네. 공무원들 하는 일이 다 이렇지 뭐.”
 
  “도로교통공사는 공무원들이 아니잖아요?”
 
  “......별 걸 다 알고 있네.”

 
해원은 눈을 흘기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

벤츠는 구조물을 옆으로 돌아 구불구불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반대쪽에서 다른 차라도 나타나면 사고가 나기 딱 좋을 듯했다. 

기사는 상향등을 켜고 주의 깊게 차를 몰았다. 

그 사이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 벤츠는 암흑으로 둘러싸인 채 전조등 불빛에만 의지해 산을 올랐다. 

이십 분쯤 지나 마침내 오르막이 끝나자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속도를 줄여 천천히 내려가 주세요. 제가 신호하면 세워 주시면 됩니다.”
 

언뜻 이해가 안 가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반문 한 마디 없이 천천히 차를 운전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삼사 분쯤 내려갔을 무렵이었다. 바리가 속삭였다. 

 
  “이쯤인 것 같아요.”
 

해원은 급히 기사에게 차를 멈추게 한 후 문을 열고 내렸다. 

길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아래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도로 왼쪽은 가드레일이 쳐진 벼랑이었고 오른쪽에는 수북한 수풀을 사이에 두고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두 줄기 전조등 빛이 비치는 곳을 제외하면 사방이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믐인지 하늘에는 별들 뿐, 달도 보이지 않았다. 


코너가 꺾이는 부분, 전조등 불빛이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곳에 어둑한 그림자가 있었다. 

해원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발밑에서부터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뻗어나갔다. 뒤통수에 와 닿는 전조등 불빛은 뜨거웠다. 

해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품속에 손을 넣어 펜을 만지작거렸다. 

대략 이백 걸음쯤 나아가자 이제는 몇 미터 앞의 수풀 속에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해원에게 등을 돌린 채 내리막길 저 아래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빈약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해원은 그 그림자가 갈색 치마에다 흰색 웃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현듯 바리가 해원의 곁에 있었다. 

해원이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그림자가 천천히 해원을 돌아보았다.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여자였다. 


 --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해원은 무겁게 말을 꺼냈다. 
 
 
  “남자친구 말씀이군요. 하지만 그 사람은 아마......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까?”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해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곧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을 죽인 사람은 그 남자친구지요?”
 
  --맞아요


긴장으로 몸이 굳은 해원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평온한 어투로 즉시 대답했다. 

아연해진 해원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남자를 기다리고 하고 있는 겁니까?”

 
이번에도 그녀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 나는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수풀 속에서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뒤쪽 멀리서는 벤츠의 낮은 엔진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어디선가 풀이 부스럭거렸다. 바리가 뭔가를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냈다. 

 
  “어째서 이십 년이 넘도록...... 아니요. 아닙니다.”

 
해원이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주변의 어둠과 해원의 몸이 만들어낸 그림자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해원은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해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가 모셔오지요. 사흘 후 이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녀가 어렴풋이 웃었다고 해원은 생각했다. 

해원은 주머니에서 작은 스프레이 깡통을 꺼내 발아래에다 붉은 색으로 표시를 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후 낮은 목소리로 바리를 불렀다. 

 
  “가자, 바리야.”

  “......응.”

 
바리가 다시 사라지자 해원은 그녀에게 목례를 한 후 몸을 돌렸다. 

벤츠를 향해 걸어가며 해원은 손을 들어 전조등 불빛을 가렸다. 

어둠 속에 오래 있다가 갑작스레 빛을 보자 눈이 따가웠다. 

이윽고 차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사가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 이제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기사는 기어를 넣은 후 좁은 길에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간신히 차를 돌렸다. 

차가 내려가는 동안 해원은 잠자코 어두운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는 온 길을 따라 내려가 다시 큰 도로로 나갔다. 길이 평탄해지자 기사는 속력을 높였다. 

반대쪽에서 온 차가 소리를 내며 그들을 지나쳐 가자 비로소 해원은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유령을 본 건 처음입니다. 집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겠군요.”

 
기사는 마치 아침에 본 신문 기사를 이야기하는 어투로 말했다. 

바리가 있었으니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 여자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안 놀라셨습니까?
 
  “놀랐습니다.” 
 
  “그렇게 안 보입니다.”


룸미러 너머에서 기사가 싱긋 웃었다. 
 

  “이 나이쯤 되면 놀라더라도 겉으로는 잘 표현하지 않게 됩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사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어쩐지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이었다. 

해원은 시간을 확인한 후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원순은 전화를 금방 받았다.

 
  “어. 왜?”
 
  “실종사건 하나 해결이야. 메모 가능해?”
 
  “어. 잠깐만. 그래. 어딘데?”
 

  “전에 내가 자료 부탁한 도로 있지? 

 서울 쪽에서 그 도로 진입한 후 오르막이 끝나고 조금 내려가다 보면 내가 길가에 스프레이로 표시해 놓은 데가 있어. 

 아마 그 인근 수풀에 시신이 암매장돼 있을 거야. 실종된 건 이십 일 년 전. 사인(死因)은 살인.”
 

  “살인? 이런. 시효 지난 지 한참 되었잖아.”

 
원순이 혀를 찼다. 그러나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살인자도 이미 죽었어. 천벌을 받은 거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알았어. 내일 그쪽으로 팀을 보낼게. 고맙다.”
 
  “고맙긴. 내 일인데.”

 
원순과 통화를 끝낸 해원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의뢰인에게 하는 보고 전화였다. 

신호가 두 번도 울리기 전에 회장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해원입니다.”
 
  “자네군. 어때, 일은 잘 되어 가나?”
 
  “대부분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응? 뭔가?”

  “사흘 후에 외출이 가능하십니까? 와 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회장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간을 떼어낸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을 불러내다니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가 보군. 알았네. 내 주치의랑 한바탕 싸워 보지.”

  “예. 그럼 사흘 후 오후 다섯 시에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기사 분께도 그렇게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럼 그날 보세나.”

 
전화를 끊은 해원은 기사에게 약속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가 서울에 도착하여 집 앞에 해원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회장은 약속대로 외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젊은 비서가 그 옆에 서 있었다. 

해원과 통화는 종종 했지만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회장은 눈을 찡긋해 보였다. 
 

  “주치의가 나를 때려죽이려고 하더군. 자칫하면 병으로 죽기 전에 맞아죽었다는 기사가 신문 1면에 나올 뻔했네. 

 게다가 비서도 내 편이 아니라 의사 편을 들고 말이야.” 


  “편찮으신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와 보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괜찮네. 그럴 이유가 있으니 그렇겠지. 그래, 가는 곳이 어딘가?”
 
  “이십 일 년 전, 회장님께서 그 일을 겪은 곳입니다.”
 
  “그래.”

 
회장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해원은 비서와 힘을 합쳐 회장을 휠체어에 앉히고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후에는 기사까지 합세해 회장을 간신히 뒷좌석에 앉혔다. 

좌석에 앉는 동안 회장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을 뿐, 신음소리 비슷한 것도 내지 않았다. 

휠체어를 트렁크에 싣고 나서 해원은 회장의 옆자리에 탔다. 

비서가 조수석에 앉으려 했으나 회장이 제지했다. 

 
  “자네까지 올 필요는 없어. 여기 이해원 씨와 같이 다녀올 테니 걱정 말게. 자고 오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빨리 다녀오면 아마 열두 시 좀 넘어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원의 대답을 들은 회장이 비서에게 손을 흔들었다.
 

  “들었지? 그럼 다녀올 테니 집 잘 보고 있게. 

 혹시라도 김 박사가 또 잔소리하러 오면 내 대신 좀 들어주고 말이야.” 
 

비서는 마지못해 다시 차에서 내렸다. 

차가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기사가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마치 영화처럼 두꺼운 칸막이가 올라와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를 꽉 막았다. 

 
  “그래. 가는 동안 그 동안의 이야기나 좀 들을 수 있겠나?”
 
  “그렇잖아도 말씀드릴 참이었습니다.”  

 
해원은 회장에게 A4용지를 한 장 내밀었다. 

날짜와 간략한 문장 따위가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맨 아래에는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있었다. 

해원이 그곳을 가리켰다. 


  “이 분이 그 때 회장님께서 만난 분입니다.”
 

회장은 감탄하며 종이를 응시했다.  
 

  “대단하군. 과연 석길대 만신께서 추천한 사람답구만. 

 사립탐정도 어제 네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제출했네만, 그건 잘 모르겠다는 한 줄로 요약 가능하더군. 

 그래, 이 아가씨는 사람이었나, 아니면 귀신이었나?”
 

해원은 적절한 단어를 골라 침착하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그 분을 만나기 여덟 달 전에 그 분은 사망했습니다.”
 

회장은 말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원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경찰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자료를 좀 찾아보았습니다. 

 그 부근에서 사고가 상당히 많이 발생하더군요.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터널이 개통된 후 사람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는 도로인데도 최근까지 계속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회장님이 그 분을 만나기 여덟 달 전부터였습니다. 

그 전에는 몇 년 동안이나 사고가 없었고 말입니다.


 영은 대개 자신이 죽은 장소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회장님이 만난 분이 영이라면 아마도 그 부근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교통사고 이력을 살펴봐도 사망자 중 여자는 없더군요.

 뺑소니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회장님 말씀대로 그곳은 애초에 사람이 걸어 다닐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복장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복장? 그게 왜?”


  “영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바꾸지 않는 한, 대체로 사망 당시의 복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그 분이 갈색 원피스에다 긴팔 웃옷을 입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죠. 

  회장님이 그 분을 만난 건 초여름입니다. 하지만 그 옷차림은 아무래도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지나지게 빈약한 근거입니다. 여름에 갈색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죠. 

  하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이런 하찮은 실마리라도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그 분이 사망한 것이 가을께라고 가정해 보았습니다.”


  “그런가? 그런 건 생각도 못했군.”

 
회장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해원은 날짜 중 맨 위의 것을 가리켰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사고입니다. 날짜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때부터 여덟 달 전. 전년도 가을입니다. 

사십대 초반의 대학교 조교수가 운전하고 있던 차였는데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호수로 추락해서 운전자는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갑자기 사고가 자주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고가 그 분이 그곳에 나타나게 된 계기였다고 추측했습니다.”
 

  “그 아가씨가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말인가?”
 

회장의 물음에 해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사고가 난 곳은 내리막을 거의 다 내려와서 호수가 있는 곳입니다. 

 회장님이 그 분을 만난 곳에서 3km 가까이 떨어져 있지요.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영은 보통 자신이 죽은 장소에 나타납니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분은 자신을 그곳에 버려두고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말씀대로,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그런 외진 곳에 여자친구를 버려두고 가는 남자가 있을까요? 

 있기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죽은 장소는 바로 그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숨겼다고 봐야겠죠. 

 이 세 가지 사실을 합치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회장이 생각하는 동안 해원은 차분히 기다렸다. 이내 회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곳에서 살해당했다는 건가? 남자친구에게?”
 
 
해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회장은 말이 없었다. 해원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회장은 가슴팍을 더듬다가 멍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담배가 없군. 하기야 피우면 안 되겠지만.”
 

  “경찰청 장기실종 담당 팀이 이틀 전에 현장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도로에서 이 미터쯤 떨어진 숲 속에서 삼십 센티미터 가량의 깊이로 묻힌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실종자 명단과 대조해서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워낙 오래 흐른 탓에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올무처럼 된 철사가 목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과학수사 결과가 나와야겠지만 경찰은 일단 교살(絞殺)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수습한 시신은 추후 유족에게 인계될 예정입니다.”
 

  “살인자는? 어떻게 되었지?”
 

회장이 성급하게 묻다 상처가 자극되었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 그 인내심에 내심 혀를 내두르며 해원은 회장을 달래듯 말했다.
 

  “살인자는 이미 벌을 받았습니다.”
 
  “체포된 건가?”
 
  “아니요. 사람의 벌이 아닌 하늘의 벌을 받았습니다.”


해원이 말했다.   
 

  “살인자는 시체 유기 후 산을 내려오다, 운전 실수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호수로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회장이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들이마셨다. 


  “......처음에 사고를 당했다는 그 남자 말인가?”


  “증거는 없습니다. 확인할 방법도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참고할 만한 사실은 있습니다. 

 우선 그 여자 분은 조교수가 재직하던 대학교에, 그것도 바로 그 학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사고 차량의 트렁크에는 삽이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삽은 대학교 조교수가 싣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조교수가 사고를 당한 것은 밤 12시가 넘은 한밤중이었습니다. 

 굳이 그 시간에 그런 외진 곳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도 터널이 뚫려 있어서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산길에 말입니다. 

 길을 착각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사십대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유부남이었습니다.”


회장은 다시 말문을 닫았다.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해원도 회장도 입을 열지 않았다. 

회장은 미니바를 열고 미니어처 병에 담긴 위스키를 꺼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듯 다시 집어넣고 대신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로 흘러내린 물을 소매로 대강 훔친 회장은 다시 해원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왜 그곳에 가고 있는 건가?”

 
평상시와 거의 같은 말투였다. 해원은 손가락을 둘 꼽아 보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더 이상의 사고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 여자분을 위해서입니다.”


  “그 아가씨를 위해서라고?”  


회장이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러나 해원은 거기서 그쳤다. 
 

  “자세한 건 회장님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말인가? 직접?”
 
  “예.”
 
  “알겠네.”


회장은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해원도 가만히 자리에 등을 기대었다. 



산길로 올라가는 도중에 도로 양쪽의 나무를 가로질러 노란 색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다. 

차를 세운 기사가 칸막이를 내리더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해원은 잠자코 미니바의 와인 오프너에 달린 칼을 꺼내더니 

차에서 내려 폴리스라인을 시원스럽게 썩둑썩둑 잘라 버렸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기사가 물었지만 해원은 태연히 웃었다. 
 

  “누가 잘랐는지 알 게 뭡니까. CCTV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 처리하는 게 마음에 드는군. 우리 회사에 입사할 생각 없나?”


그때껏 입을 다물고 있던 회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해원은 손을 내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지금 일이 마음에 드니까요.”

 
차는 잘린 폴리스라인을 깔아뭉개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한참을 올라간 후 오르막이 끝날 무렵에 회장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날 이후 처음 오는 건데도 이 길이 기억나는군. 조금만 더 가면 그 장소가 아닌가?”
 
  “맞습니다. 가까이 간 다음에는 내려서 걸어갈 겁니다. 휠체어를 꺼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회장은 고집을 부렸다. 

 
  “휠체어 따윈 필요 없네. 사실 아까도 비서가 하도 고집을 부려서 별 수 없이 내가 져 준 거야. 난 걸을 수 있어.”
 
  “무리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배를 찢은 거지 발이나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못 걸을 건 또 뭔가?”


끝내 회장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해원은 두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차가 멈추자 회장은 천천히 차 밖으로 다리를 하나씩 꺼냈다. 그리고 힘을 주어 간신히 일어섰다. 

두 다리가 살짝 떨리는 듯했지만 어떻게든 서 있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득의양양한 듯 해원을 보았다. 


  “어때? 걸을 수 있다니까.”


카리스마 넘치던 회장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해원은 쿡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기세와는 달리 회장의 발걸음이 느리고 무거웠다. 

그래서 해원은 걸음걸이를 늦추어야 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천천히 걸어갔다.

 

  “어째서 그 날 이후로 이곳에 한 번도 오지 않으셨습니까?” 
 
  “와야 할 이유라도 있나?”


회장은 앞을 바라본 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해원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글쎄요.”


회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는 데 집중했다.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아 발을 헛디딜 뻔 했지만 용케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의 앞에 갈색 그림자가 떠 있었다. 

회장은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허리를 천천히 폈다. 여자가 조용히 말했다.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뒤에서 비치는 조명 때문에 해원에게 회장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 해원은 생각했다. 

 
  “누구를 기다리는데요?”


그녀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지금 왔네요



해원은 말없이 그들을 지나쳐 천천히 걸어갔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어서 간신히 발밑을 분간할 수 있었다. 

커브를 돌아 내려가자 이윽고 길모퉁이에 가려 차도, 회장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해원은 발걸음을 늦추었다. 바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언니가 일부러 사고를 낸 건 아니에요.”


  “알아. 처음에는 그저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후에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래서 아마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을 거야. 

 단순히 증오 때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애증이라고 하면 적당한 설명이 될까. 

 그런 원념이 아무 관계도 없는 남자들에게 향한 것이겠지. 

 그녀가 직접 사고를 일으킨 건 아니겠지만 그 존재 자체가 사고의 원인이 된 건 사실일 거야. 

 기록을 보면 사고를 당한 차에는 모두 남자만 타고 있었어. 

 하지만 회장을 만난 후로 많은 게 바뀌었지.”
 
 
  “저 아저씨 덕분이죠.”


해원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어쩌면 오지랖이 지나치게 넓다고 할 수도 있을 거야.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를 뒤에 태우고 그녀의 남자친구를 찾아주려 하다니. 

 하지만 아마도 그런 회장의 마음 씀씀이가 비로소 그녀의 고통을 치유해준 게 아닐까 싶어. 

 그 날 이후로 그녀에게 소망이 생겼겠지. 저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그런 소망이 사람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 거군요.”


  “그래. 회장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일념이 사람들을 무의식중에 이곳으로 오게 한 거지. 

 그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귀신을 보고 기절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니, 

 그녀를 보고 놀라서 핸들을 확 꺾다가 사고가 났다 해서 뭐라 할 수는 없잖아? 

 더 이상의 인명사고가 없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어.”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요. 기약 없이, 이십 년이 넘도록......”
 
  “긴 시간이지.”

 
  자신이 바리와 함께 지낸 구 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해원은 대답했다. 

  잠시 후 뒤쪽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평온하면서도 따뜻하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저 언니, 이제 떠나고 있어요.”

 
바리가 말했다.  

 
해원이 돌아갔을 때 회장은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헤어졌을 때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해원이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회장은 못내 아쉬운 듯 간신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비틀거렸지만 해원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회장을 부축했다. 

 
  “이거, 잘난 척 했지만 아무래도 부축을 받는 편이 낫겠군.”
 
  “진작 그러지 그러셨습니까.”


해원이 타박하듯 말하며 회장의 겨드랑이 아래로 어깨를 넣어 몸을 받쳤다. 

그들은 방향을 돌려 자동차 전조등을 향해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 나는 일찍 결혼했네.”

 
회장이 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대학교 이학년 때 일학년 후배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지. 

 배가 불러오고 석 달 만에 급히 결혼했네. 그리고 바로 군대를 다녀와야 했지. 

 아내는 젊은 나이에 혼자 시집살이를 하면서 아들을 키웠네.

 다행히도 아들 녀석은 다정다감한 성격이야.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지. 

 하지만 아내는 결국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네. 

 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거의 십 년 가까이 고생만 도맡아 했어. 

 그 와중에 몸이 축나서 병원에 입원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네.”
 
 
  “그러셨습니까.”


해원은 천천히 대답했다. 


  “이혼한 지 오 년이 넘었네. 이혼합의서를 내밀면서 그러더군. 

 당신은 일에 미쳐서 가족을 단 한 번도 돌보지 않았다고. 사실이었어. 

 나는 반박하지 못했네. 그래서 도장을 찍었지. 찍을 수밖에 없었네.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어.”


회장은 저 깊은 동굴 속에서 밀려나온 것처럼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내를 사랑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 

심지어는 지금도. 그래서 여기 다시 와 볼 수가 없었어.”
 
 
해원은 무어라 말해야 할 수 없었기에 가장 현명한 방법을 선택했다. 

즉 침묵했다. 잠시 후 다시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지? 그 때 모든 걸 다 이야기한 건 아니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회장이 씁쓸한 듯 웃었다. 
 

  “자네,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로 의뭉스럽군.”
 
  “고객의 비밀 준수는 제 직업정신입니다.”
 

해원이 대답했다.  




오토바이 불이 진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그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굳어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손에 뭔가가 와 닿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그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반대편 손이 그의 몸에 닿더니, 이내 천천히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그녀와 함께 천천히 몸을 눕혔다. 

바닥의 풀이 옆구리와 팔꿈치에 짓눌려 쓰러졌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여름밤 공기는 따스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혼자 침낭 안에 들어가 있었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옷을 그러모아 입은 후 인근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전날 밤 그들이 같이 먹은 초코파이의 봉지 두 개만이 바닥에 나란히 떨어져 있었다. 

혹시 그녀가 돌아올까 싶어 한참을 기다렸지만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결국 포기한 그는 기름이 떨어진 오토바이를 끌고 내리막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출처
오유...글곰

http://todayhumor.com/?panic_62795

http://todayhumor.com/?panic_62837

http://todayhumor.com/?panic_62869

http://todayhumor.com/?panic_62923


모든 기담 시리즈는 이쪽으로...

http://www.todayhumor.co.kr/board/list.php?kind=member&mn=9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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