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컴플렉스 이야기 (미스테리 스릴러 느낌 소설)
게시물ID : panic_985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dbs4389
추천 : 13
조회수 : 1676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8/05/21 21:02:25




1.

군 제대 후 학교에 다니던 때의 일이다. 용민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니 학교 근처 닭갈비 집으로 빨리 오라는 내용이었다.

'날 보고 싶어 한다고? 누가?' 

용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중학교 친구들 중 한명이다. 나와 다른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한 해 재수해서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니고 있다. 적당히 술에 취해 웃음을 흘기는 분위기가 여자와 같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스쳐갔다. 통화를 끊고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닭갈비 집에 들어갔을 때 용민이가 구석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맞은 편에는 처음 보는 여자 2명이 앉아 있었다.

"야, 빨리 빨리 안다니냐. 혜정이 하고 민재가 너 빨리 부르라고 난리였어."

"응?"

얘네들이 누구길래 하고 유심히 보는 순간, 아는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니네들이었구나. 와. 못알아봤다."

"야, 진짜 오랜만. 크킄."

"정석이는 옛날이랑 똑같네."

누구에게나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하는 친구가 한 두명쯤 있을 것이다. 내게는 용민이가 그런 친구였다. 혜정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앉은 자리도 멀었고 친분도 거의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용민이와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 번 같이 만났다. 독실한 크리스쳔이었고, 지금은 선교사가 되려고 여기저기서 관련 활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예전에도 술자리를 빼지 않더니 지금도 여전한가보다. 하얀 얼굴에 얇은 금속제 안경테를 쓰고 있었는데 왠지 수녀복이 잘 어울일 것 같은 그런 이미지였다. 

민재는 약간 노는 애 같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뭔가 허술한(?) 느낌이 드는 그런 타입이다. 혜정이와 민재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고, 용민이와 민재는 우리 지역 고등학교 컴퓨터 동아리 연합에서 만난 사이였다. 내가 민재를 기억하는 건 우리 집에 와본 적이 있는 딱 2명의 여자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민재가 빈 잔에 소주를 채워서 건네주었다.

"야야, 한잔해."

"지집애들 이거, 고딩 때는 다소곳하더니 아줌마 다 됐네 크킄."

용민이는 이 분위기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사실 혜정이와 민재는 나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코흘리개 시절 동네 친구들을 만나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반가웠다. 닭갈비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테이블은 소주병으로 채워지고 약간은 편하면서도 약간은 설레는 여자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우리만 알 수 있는 우리 동네 이야기, 우리 또래 이야기, 우리가 관심 있던 이야기에 심취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전화를 받지 못했으면 엄청 아쉬울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석이 너 예전에 엄청 재수 없었는데 많이 귀여워졌네. 킄킄"

"응?"

이건 뭔 얘기야. 표정이 어두운 아이였다거나 무서운 성격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어봤지만 재수 없었다는 평은 처음 들어봤다. 민재는 예전부터 뭔가 생각없이 솔직한데가 있어서 나를 당황시키곤 했다.

"나? 다른 사람하고 착각한 거 아냐?"

"너 예전에 기억 안나?"

무슨 기억이 안나? 민재와는 얽힌 기억이라고 해봐야 별게 없어서 기억하고 말고 할게 없었다. 민재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1년 때 용민이가 알바로 있던 PC방에서였다. 당시 나는 학교 적응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용민이가 일하던 PC방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 PC방은 동네 친구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우리가 이 PC방에서 주구장창 죽때릴 수 있었던 것은 굉장히 특이한 사장님 덕분이었다. 사장님 전용 좌석으로 가서 "안녕하세요, 용민이 친구임다." 라고 신고를 하면 "어 그래, 놀다 가." 하고는 자기 하던 일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러면 용민이가 사장님 계정으로 무료 요금제 자리를 켜줬다. 내가 살던 아파트 근처의 그리 크지 않은 PC방이었는데 하루에 손님이 40~50명 남짓이나 될까 항상 빈자리가 넘쳤기 때문에 사장님의 선심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더 신기한 것은 이 PC방이 밤 11시까지만 영업을 하고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다. 오후 영업에도 채산성이 안맞는게 눈에 보였는데 야간 영업은 오죽했으랴. 사장님이 커피숍도 하나 가지고 있고 편의점 몇개 운영하고 있어서 PC방은 '본인이 하려고 차렸다'고 용민이가 귀띔해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스개소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인사를 하러가면서 사장님이 뭘 하고 있나 유심히 살펴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아프리카TV 처럼 개인 방송이 활성화 되지 않은 시기였는데 방송 같은 걸 하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헤드셋을 끼고 멘트를 하거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용민이의 말에 따르면 방송을 통해서 중,고등학생 여자애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원조 교제 같은거?" 라고 했더니 "그런건 아닌거 같고 자기 방송 듣는 애들 모아서 드라이브도 시켜주고 맛있는거도 사주고 뭐 그런 재미로 사나봐." 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세상에는 신기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던 때였다.

용민이가 나름 마당발인데다 놀기 좋은 공간까지 확보했으니 온갖 종류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카운터 근처 자리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들이 주로 자리를 잡았고 제일 구석자리는 용민이의 고등학교 동아리 친구들이 주로 모이곤 했다. 엄연히 노는 영역이 나눠져 있었지만 가끔은 4:4로 스타를 하거나 스페셜 포스 클랜전을 하기도 해서 서로 안면은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 쪽은 남자시키들 밖에 없었는데 저쪽은 고등학교 컴퓨터 동아리 연합에서 만난 애들이라 여자애들과 같이 어울려 놀았다. 나는 항상 그게 부러웠다. 

용민이의 경영 정상화 노력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던지 PC방은 예전보다 손님이 약간 늘었다. 사실 용민이의 노력보다도 주간 알바로 민재가 영입되었기 때문에 라는게 좀 더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민재가 알바를 시작하기 전부터 같이 맥주를 마시거나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이질적인 친구 집단이 섞인 자리다 보니 진지하게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민재는 언제나 상냥하게 인사해주었고 나는 민재의 그런 점이 좋았다. 천성적으로 사람에 대해 경계심이 별로 없는 캐릭터 같았다. 사장님이나 손님들과도 금새 친해져서 일상적인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 손님들의 대부분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초등학생 꼬맹이들이었다. 민재는 어린애들을 정말 좋아했다. 학교에 나가기 싫어서 오전부터 PC방에 죽때리고 있는 날에는 수업을 마치고 몰려오는 초딩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재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애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메이플 스토리 같은 게임을 하는 것 같았는데 초딩 녀석들도 알바 누나가 마음에 드는지 경쟁적으로 아이템을 바치곤 했다. 민재와 애들이 일렬로 늘어 앉아서 게임에 집중해 있는 모습을 모니터 사이로 힐끔힐끔 훔쳐보곤 했는데,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엄청 귀엽고 뭔가 마음이 따듯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영장이 날아왔다. 그걸로 민재와의 기억은 끝이었다.

"왜? 왜? 무슨일인데?"

혜정이가 민재를 재촉했다.

"예전에 나 재수할 때 있었잔아. 점수 안나와서 막 고민하고 있는데 '6개월 정도 돌리면 350은 찍지 안아?' 쟤가 이랬어."

뭐야... 아무것도 아니잔아. 그리고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야, 내가 언제 그랬어."

"너 그때 그랬어. 기억 못하나보네."

"너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야. 나 안그랬어."

"너 진짜 그랬어. 나 그때 엄청 상처 받았다고. 힝~"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열을 내는 것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 난 그런 기억이 없었다. 용민이는 뭘 이런 걸로 싸우냐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나이 먹어가지고 뭐하냐. 애들도 아니고. 한잔 해. 한잔 해."

그때로 돌아가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라고 생각해보면, 어쩌면,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혜정이와 민재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했고 용민이는 민재가 그런 거에 약간 컴플렉스가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최근에는 수능에 응시도 하지 않고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서 몇 년 살다가 왔다는 이야길 했다. 겉모습만 봐도 공부와는 거리가 멀게 생겼고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결국 우리는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자리를 파하고 말았다.




2.

재현이 형을 처음 만난 것은 내 자취방에서였다. 용민이와 친하게 지내는 두살 위의 같은 과 선배다. 용민이가 처음 소개를 시켜준다고 방에 데리고 왔는데 첫 만남부터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보자마자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하이파이브를 하고 와락 껴안더니 자연스럽게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걸 찾았다. 

"야, 형이 점심을 못먹어 가지고. 머 먹을거 좀 없냐."

둥글둥글하면서 덩치도 좀 있는, 뭔가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외모였다. 첫 만남에 무례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격식차리지 않고 편하게 대해줘서 차라리 좋았다. 잠깐 날 껴안았을 때 뭔가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보통 이런 냄새는 부자들한테서 나는건데.

학교 생활이 걱정이 되었지만 재현이 형과 용민이 덕분에 꽤나 즐거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법대 안에서 재현이 형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재현이 형 주위에는 기묘한 자기장 같은 것이 있어서 쇠붙이가 끌리듯 사람들이 끌렸다. 혈액 속의 철분까지 끌려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현이 형은 아무런 노력없이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야구장에 같이 간 적이 있었는데 응원 단장보다 응원이 더 웃겼다. 술에 취한 아저씨들의 호응에 힘입어 응원 단장을 내리고 무대에 올라 춤을 추면서 응원을 주도하기도 했다. 난 그때 진심으로 저 형 맥주에 약이라도 탄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 학교에서도 생활 자체가 한편의 꽁트를 보는 느낌이었다. 엄청 뚱뚱한 여자 후배에게 "나랑 팔씨름 할래?" 이런 걸 뜬금없이 물어보는 식이었다. 근데 그런 행동이 그 후배를 약올리려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진지한 태도로 물어본다는 것이 개그의 포인트였다. 사람들이 왜 화내는지 왜 웃는지 본인은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 중,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보낸 탓에 일종의 문화 차이 같은게 아닐까 생각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현이 형을 미워하거나 앙심을 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건 아마도 재현이 형의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재현이 형은 외모든, 나이든, 성적이든, 재산 상태든 그 사람이 가진 외적인 가치에 휘둘려 그 사람을 대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그 사람의 본질을 빠르게 이해하고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재주가 있었다. 교수를 대할 때나 후배를 대할 때나, 미녀를 대할 때나 못난이를 대할 때나 한결 같았다. 가끔 학회에서 저학년 학생들을 모아 놓고 훈계를 하는 고학번 선배들이 있었는데 재현이 형은 항상 약자들을 옹호해주었다. 

한번은 학과에서 운영하는 고시원 입실 시험에서 내가 순위에 들었음에도 신청이 늦었다는 이유로 입실하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복학 첫 학기라서 어찌해야할지 몰라 그냥 입실을 포기하려했는데 재현이 형이 나서서 도와 주었다. 고시원을 관리하는 대학원생 조교에게 이번 시험 성적 순위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조교가 불분명한 핑계를 대며 한사코 거부하자 담당 교수까지 끌고와 확인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기와 친한 후배를 넣기 위해 조교가 순위를 조작 했음이 밝혀졌다. 덕분에 나는 고시원에 입실 할 수 있었고 그 조교는 사퇴를 해야 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재현이 형을 친 형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재현이 형에게 더 관심이 끌렸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무성한 소문이었다. 아버지가 중소기업 사장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혹자는 고위직 공무원이라고 했다. 어느 술자리에서는 절대 이야기 하지 말라며 "재현이 형 아버지 조폭이래" 이러는 친구도 있었다. 무엇하나 신뢰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언젠간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재현이 형과 용민이를 포함해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렇게 학교 생활에 무리없이 적응해갔다. 

수업이 끝난 한가한 오후, 자물쇠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복도에서 사물함을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요~맨. 뭐해?"

"아, 재현이 형. 자물쇠 비번 까먹었어요. 아씨, 줄 톱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잠깐 이쪽으로 비켜봐. 나 이런거 잘 열거든."

열쇠 기술자도 아니고 별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어? 형 방금 어떻게 하신거에요?"

"이런거 잘 한다고 했잔아 임마."

"워, 신기하네. 저도 좀 알려주세요."

"너 할 줄 몰라? 별거 없어. 열림 버튼 누르고 자세히 보면 흔들흔들 움직이는 번호키가 있거든. 그거 하나씩 눌러보면 돼."

"아, 그렇게 하는 거구나. 나도 연습해야지. 킄킄."

"자식. 오늘 현지하고 우리 동기들 술 한잔 하는데 너도 낄래? 너 윗 학번들 잘 모르잔아. 이 기회에 인사 하고 지내."

"그럴까요? 그럼 어디로 가면 돼요?"

"좀 있다 내 자취방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먼저 가서 준비 좀 해야 하거든. 지금 짐 챙겨서 주차장으로 내려와."

"알겠습니다 형님. 충성!"

"짜식. 좀 있다 보자."

사물함에 오늘 봤던 책을 집어 넣고 자물쇠를 잠궜다. 재현이 형이 알려준 방법대로 열림 버튼을 살살 눌러보았다. 아무리 눌러보아도 흔들리는 번호키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렇게 하는게 아닌가. 어떻게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다시 물어봐야겠구만.

약간 일찍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다른 차는 안보이고 독일제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길에 태워가려나 보다 하고 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현이 형이 저쪽에서 버튼을 삑 누르자 그 차에 불이 깜빡하고 들어왔다. 뭐야? 재현이 형 거였어? 언뜻봐도 학생이 끌고 다니기엔 무리인데? 재현이 형이 차 문을 열고 이리로 오라고 손짓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어느 아파트였다. 자취방이래매? 재현이 형의 지시에 따라 차에 실린 술과 안주를 양손에 바리바리 들고 입구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재현이 형이 말했다. 

"야 위로 올라가서 왼쪽 문이야. 비밀번호 2501."

재현이 형은 박스를 들고 있어서 내가 잽싸게 뛰어가 문을 열었다. 2.5.0.1 이라. 재현이 형도 숨은 오덕이었구만. 킄킄. 문을 열어 보니 방 2개가 딸린 깔끔한 아파트였다. 식탁 위에는 상자에서 꺼낸 양주 몇 종류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사온 술과 안주를 냉장고에 넣고 과일을 씻어서 먹기 좋게 내어 놓았다. 대충 술 마실 준비가 끝났을 때 쯤 삑삑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재현이 형 여자 친구인 현지 누나와 재현이 형 동기 형들이 같이 들어왔다.

"어, 현지 일찍왔네?"

"응, 근데... 누구?"

현지 누나는 이야기만 들었고 보는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XX학번 권정석임다. 재현이 형 후배에요."

"아, 니가 정석이구나. 너 용민이 친구래매."

"네, 맞아요."

"그래, 반갑다 얘. 하던거 그냥 두고 거실 가서 쉬고 있어. 오늘은 재현이가 다 알아서 할거야."

"네, 뭐 다 했어요."

단정한 흰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화려한듯 하면서도 깨끗한 그런 이미지였다. 생긴걸로만 따진다면 현지 누나가 아까워 보였지만 재현이 형은 매력 있으니까. 집도 꽤 잘사는 것 같고... 성격도 좋고, 돈도 있고, 여자 친구도 엄청 예쁘고 은근히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네. 부럽다ㅠ

우리는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술과 함께 먹었다. 형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버스가 끊길만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형, 저 내일 오전 수업 있어가지구요..."

"그래, 재현아 나도 이제 일어나련다."

형들이 슬슬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 정석아 걍 자고 가."

재현이 형이 말했다.

"그래두 돼요?"

"그래, 나도 오전 수업 있으니까 같이 가자."

"그래, 정석아 자고 가든지 알아서 하고, 우린 간다."    

현지 누나와 형들은 짧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술 남은 거 이것만 먹고 잘까?"

"그럴까요."

재현이 형이 남은 술을 잔에 부어줬다.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요."

"쟤네들 엄청 웃기지? 킄킄. 그래서 형이 오라고 한거야."

"킄킄. 현지 누나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어요. 법대 미녀 삼총사 인정합니다."

"음대, 미대쪽 가면 졸라 많아. 너 교양은 그쪽 수업 들어."

"킄킄. 형보면 진짜 너무 신기해요. 현지 누나 어떻게 만난거에요? 형이 먼저 고백하신 거에요?"

"킄킄. 궁금하냐."

"아 네. 저도 여자 만나고 싶어요ㅠ"

재현이 형이 술잔을 들었다. 나도 따라 잔을 비웠다. 술기운도 약간 오르고 둘만 남으니 문득 예전에 들었던 소문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번 생각이 떠오르자 입이 간질간질 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형,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뭐?"

"저..." 

약간 뜸을 들이는데 순간적으로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서 마음이 흔들려버렸다.

"저...형... 공각기동대 팬이시죠?"

"아, 그거. 너도 공각 좋아하는구나. 난 그냥 다 2501 이야. 은행 번호도 2501이구."

"히히. 근데 번호 그렇게 막 알려줘도 돼요?"

"음...알려준다고 뭐 어떻게 되겠어."

재현이 형의 라이프 스타일에 꼭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난 말야...여기저기 다 뺏겨서 더 뺏길게 없어. 이제 내 집에는 더 가져갈게 없어."

"........"

재현이 형 입에서 나온 말 치곤 뜻밖의 말이었다. 재현이 형은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형수가 마지막 식사를 마쳤을 때 이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생각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약간 묘한 기분이 들어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말을 이어갔다.

"형 그래도 집 비우는 시간 많으니 가끔씩 비밀번호 바꾸세요."

"알았어 이 자식아."

재현이 형은 웃었다. 우리는 같이 술자리를 정리했다. 재현이 형이 화장실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나 먼저 씻을게."

"네, 그러세요."

재현이 형이 웃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갈 때 나는 약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등과 어깨에 미국 갱들이나 할법한 엄청난 크기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3.

그 날 이후로 나는 몇 주간  정신 없이 학교 생활에 몰두했다. 대학 들어와서 처음으로 공부같은 공부를 시작하는 처지라 해야 할게 많았다. 수업을 챙겨 들으며 바쁘게 지냈다. 어느날 법대 로비를 지나가다가 용민이를 만났다.

"올 용만이. 머하냐."

"어, 야 주말에 시간 있어?"

"요즘 진도 따라가느라 정신 없어ㅠ."

"진짜? 나 주말에 민재랑 영화 보기로 했는데..."

그럼 진작 날 불렀어야지 이 자식아!

"너 전에 민재랑 인사했잔아. 민재도 너 오면 좋아할 걸."

"진짜 가두 돼?"

"그래 임마."

"음...알았어, 알았어. 어디로 가면 돼?"

"민재 집 근처에 XX시네마 알지? 거기로 와."

"오케이, 씨유 레이러."

민재는 언제나처럼 싹싹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서 앞열 밖에 자리가 없었다. 화면이 너무 가까워서 영화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났다. 영화를 보고 나온 후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술을 한잔 하기로 했다. 시간이 늦어버려서 마땅히 괜찮은 술집이 안보였다.

"야, 그냥 우리집 가서 마실래?"

"그럴까? 야 어쩔래?"

"응? 난 좋지...뭐..."

용민이와 민재는 거의 부랄 친구나 다름 없는 사이라 그런 제안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나는 여자애 집에 가보는게 첨이라 뭔가 기분이 묘했다. 민재 집은 영화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건물 1층에 편의점이 있어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사서 올라갔다. 들어가보니 방 두개와 부엌이 딸린 오피스텔이었다. 여기저기 옷가지들이 널려 있어서 급히 정리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나는 공간이었다. 여자애들 방은 이런 느낌이구나. 꽤나 흥미로운 체험이었다.

우리는 거실에서 술을 마시며 영화에 대해 뒷담화를 까기 시작했다. 그날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했지만 감상할만한 가치도 없는 망작이었다. 나는 나름대로의 평을 늘어놓았다.

"나 영화 첫 대사만 딱 듣고 결말 알아버렸잔아."

"뭐야, 거짓말 치지마."

"진짜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스릴러였는데, 뉴스 캐스터가 나와서 "이번 달은 태양풍이 평소보다 강해지는 관계로 전자기기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순간부터 김이 팍 새버렸다.

"이런 영화는 스릴러가 아냐. 진짜 스릴러는 히치콕 이후로 죽었어."

나는 어느 영화 잡지에서 본 멘트를 그대로 긁어와서 붙여넣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좀 있어보일 것 같았다.

"히치콕? 감독이야?"

민재가 약간 맹한건 알았지만 히치콕을 모를 줄은 예상 못했다.

"응, 감독인데 다른 걸로도 유명하지만 맥거핀이란 기법을 만들고 그걸 완벽하게 써먹은 감독으로 알려져있어."

"그게 뭐야?"

"쉽게 말하면, 이런 거야. 여기 오른손 봐봐."

난 주먹을 쥐고 오른쪽 방향으로 손을 뻗어갔다. 민재의 시선이 따라오자 손을 펴서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왼손에서 과자를 꺼내 입에 쏙 넣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쪽으로 끌어 놓고 진짜 중요한 단서는 다른 쪽에 숨겨두는거지."

"음...뭔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재밌다. 킄킄"

용민이는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더니 소파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잠을 청했다. 민재는 쿠션을 가져와서 용민이 머리에 끼워 주었다.

"근데 너 혼자 사는거야?"

"응."

"부모님이 걱정 안하셔?"

"응..."

민재 표정이 어두워 지는게 괜한 이야길 꺼낸 것 같았다. 아 눈치 없는 자식, 왜 이런 이야길 해가지고...

"나 전에...니네 아버지 봤었어. 버스에서." 

"응? 우리 아버지?"

뜬금 없는 아버지 이야기에 정신이 혼미했다.

"베이지 색 버버리 코트 입고 계시든데 멋지시드라. 난 무슨 모짜르트신줄 알았어."

"아하하, 진짜?"

"포스가 너무 강해서 인사 못드렸어. 킄킄."

아, 그놈의 버버리 코트. 엄마가 10년도 더 전에 아버지에게 선물해 준 코트다. 아무리 오래됐어도 절대 버리는 일이 없다. 나는 인간을 종종 친가형 인간과 외가형 인간으로 분류하곤 한다. 친가형 인간과 외가형 인간이란 단어는 내가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친가형 인간의 특징은 이렇다. 우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하며 계획을 세우고 철저히 실천한다. 필요 없는 물건은 절대 사지 않고 한번 가진 물건은 딱히 필요가 없더라도 버리지 않는다. 나름의 원칙이 있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원칙을 지키려 노력한다.

외가형 인간은 아침에 눈이 떠질 때 일어나 아침을 먹지 않고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지금부터 바쁘게 준비해서 지각을 하느니 그날은 땡땡이를 치고 다음날부터 잘하자고 다짐한다. 돈은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만족감을 얻는데 쓰는 것이라 믿기 때문에 가끔은 있는 물건을 또 사기도 하고 인생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도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 원칙이란 건 원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그때 내 기분에 맞게 행동하는게 최고의 원칙이라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친가형 인간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다. 출장을 가지 않는 날은 하루도 빠짐 없이 운동을 다니고 예식장에 갔다와서도 밥과 국을 다시 차려서 드렸다. 20년 동안 63kg에서 +-1kg이상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셨다. 소유물 중에서 그 베이지 색 코트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검정색 가죽 가방, 은사님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은 거의 20년이 다 되가는대도 버리지 않으셨다. 한번은 손잡이까지 떨어진 가방을 품에 안고 다니는 것을 보고 엄마가 깔끔한 새 가죽 가방을 사오셨다. 아버지는 아직 쓸 수 있는데 왜 새 걸 사왔냐고 어머니에게 쿠사리를 먹였다. 그리고는 계속 검은색 가죽 가방을 품에 안고 다니셨다. 엄마는 엄청 황당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패턴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농촌에서 자라서 혼자 도시로 나와 독립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농번기가 되면 큰집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식구가 오든 손님이 오든 큰아버지는 언제나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소 여물을 주고 밭에 나가서 간단히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우리와 어울리셨다. 큰집 식구들은 생김새나 성향이나 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았다. 손발이 크고 각이 진 얼굴에 머리는 자연스럽게 컬이 들어간 곱슬이었다. 큰엄마와 사촌 형들은 항상 나에게 "정석이는 외탁했네. 엄마랑 똑 닮았어." 하고 말했다. 엄마랑 나랑 닮은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런 것으를 차별한 적도 없었다. 큰집 식구들은 항상 나를 이뻐해주었다. 그러나 친가 쪽 식구들과 같이 있을 때면 나만 피부색이 다른 인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사실 겉모습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였다. 나는 외삼촌들을 보면서 그걸 알게 되었다. 외삼촌들은 뭔가 테니스 의류가 잘 어울리게 생겼다. 둥글둥글하고 적당히 배가 나오고 얼굴엔 언제나 여유있는 미소가 흘렀다. 유행에 밝고 여가를 즐기고 인생을 치열하게 사는법이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진작부터 도시에서 살았고 경제적으로 쫒기는 경험을 해본 적도 없었다. 4남매 중 어머니를 제외하고 지금은 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계신 상태다. 내가 민재와 재현이 형에게 끌렸던 건 아마도 그런 점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민재와 재현이 형은 명백히 외가형 인간이었다.  

"나 그때 너네집 갔을 때 너네 아버지 서재 보고 감동했잔아."

"아 맞다. 너 그때 용민이하고 수호하고 우리집에 온적 있었지? 아 기억난다. 킄킄." 

"그래, 우리 스무살 때였나 그때 쯤이었을거야. 아니면 내가 니네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알겠냐."

"하하. 마져마져. 그러네."

오랜만에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즐거웠다. 민재는 왠지 표정이 슬퍼보였다.

"난 어렸을 때 엄마랑 아빠가 계속 다른 애들이랑 비교하고 그래서 너무 싫었어. 학원 5개 다니게 하고 바이올린 같은거 막 시키고..."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야, 왜 그래..."

여자들은 원래 이렇게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는 건가 어리둥절 하면서도 뭔가 마음이 지릿지릿 했다. 옆에 티슈를 몇 장 뽑아서 건네주었다. 민재는 말 없이 눈물을 닦았다.

"이그, 눈물이 그렇게 많아서 어쩌려고 그러냐..."

나는 민재처럼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너무 좋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조차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눈물이 글썽글썽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 엄청 귀여웠다. '으아, 꽉 껴안아주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그냥... 나는 아는 거 많고 책 많이 읽고 그런 사람 보면 너무 부러워. 흫흫. 이상하지?"

나는 씩 웃고 말았다. 

'애휴, 얘는 귀엽게 생겨가지구... 취향이 특이하네. 우리 아버지 엄청 피곤한 스타일인데.' 

목을 좀 축이려고 캔을 집어 들었는데 거의 빈 캔이었다. 

"다 마셨어? 한 캔 더 마실래? 사올까?"

"넌 그냥 있어라. 내가 갔다 올게."

"그럴래? 아까 편의점 위치 기억나지? 

"응."

"나 좀 씻고 있을게. 들어올 때 벨 누르지 말고. 용민이 자니까. 5292야."

"야, 남자한테 집 비밀번호 막 알려줘도 돼?"

"흫흫. 여자가 남자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건 말야 ..."

순간적으로 민재의 목소리에 극도로 정신이 집중됐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흫흫. 아냐, 빨리 갔다와."

"쩝, 뭐야..."

집을 나와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이구이? 엄청 쉽네. 히히. 자기가 잘 까먹는거 알고 일부러 쉬운걸로 해놨구만. 귀엽다. 크킄. 편의점에서 캔맥주 몇 개와 안주도 몇 개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민재는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혼자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있으니 민재가 헤어 밴드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을 깨끗이 지우고 나니까 꽤 청순하게 생긴 것 같았다. 

"갔다 왔어?"

"응...와... 너 앞으로 이렇게 하고 다녀라. 지금이 더 괜찮네."

"흫흫. 괜찮은거 같아?"

"음...화장 진하게 하면... 피부에 안좋대."

민재는 뭔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 앞에 앉았다.

"너 지금부터 거짓말 하지말고 솔직하게 말해야 돼. 알았지?"

"나 아까부터 계속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지금부터 진짜 솔직하게 말해. 거짓말 하면 술 사온거 다 마시게 할거야. 킄킄."

"나 참...뭔데 이야기 해봐."

민재는 내 눈을 보고 약간 뜸을 들였다.

"너 내가 PC방 알바할 때 뒤에서 계속 훔쳐봤지?"

"응? 뭔소리야.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거짓말 치지마. 그때 같이 겜하던 애들이 다 말해줬어. 뒤에 형이 누나 계속 쳐다본다고. 흫흫."

"아 뭔소리야. 나 그런적 없었어."

이놈의 초딩 시키들이 별 이야길 다 했네. 아 쪽팔리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진짜 그런적 없었어? 솔직히 말해."

가슴은 엄청 많이 그랬었다고 외치고 있는데 주둥아리가 마음대로 움직였다.

"진...진짜. 안그랬어..."

민재는 내 눈을 아래위로 훑어 봤다.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전에도 끝까지 잡아떼더니... 오늘도 그러시겠다. 음, 알았어. 믿어줄게. 흫흫."

우리는 같이 술자리를 정리했다. 민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거실 바닥에 누워서 주둥아리를 쥐어 뜯었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민재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민재는 빙긋 웃더니 내 폰을 가져가서 번호를 찍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을 적는 칸에 '같은 동네 주민'이라고 적어 넣었다. 여자한테 번호 받는게 이렇게 쉬운거였어? 그런 기분이 들었다. 민재는 폰을 돌려주면서 내 정수리 쪽을 휙 쳐다봤다.

"너 키 몇이야?"

"키? 나 139."

"풉, 야 장난치지 말구."

"180 같은 175. 킄킄."

"음...생각보다 작진 않네.흫흫. 예전에 더 작지 않았어?"

"나 군대 갔다왔더니 키 큰거 같다고 하는 사람들 좀 있긴 있었어." 

"그래...암튼 담에 봐. 용민아 너도 잘가구."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그 후로 나는 민재에게 종종 연락해서 같이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곤 했다. 용민이와 함께 만나기도 했고 가끔은 재현이 형이 합류해서 근교에 드라이브를 갔다 오기도 했다. 재현이 형은 워낙 친화력이 좋아서 민재와 금방 친해졌다. 둘다 외국 생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대화가 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재현이 형 집에서 고스톱을 친 적도 있었고 강변에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학교 생활에도 무리없이 적응했고 민재와 어울리는 것도 너무 재미있고 하루하루가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4.

수능이 끝났을 무렵, 나는 그 동안 보지 못한 영화를 걸신들린 듯 보고 있었다. 그 시기에 봤던 영화 중에서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영화와 '뷰티풀 마인드' 두 편이다. 두 영화 모두 엔딩이 엄청 감동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특히 뷰티풀 마인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료 학자들이 양복 윗주머니의 펜을 뽑아 존 내쉬 박사에게 건네는 부분은 머릿 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새벽에 혼자 그 장면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이 박수를 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 또라이 같은 짓이었던 거 같다. 

아버지가 대학 입학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만년필을 갖고 싶다고 했다. 펜에 대한 나의 애착은 굉장히 기묘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물건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는 친가형 인간들과 피부를 맞대고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몸에 벤 습관 같은 것이었다. 초,중,고 10년을 누나가 쓰던 가방을 그대로 물려 받아 메고 다녔다. 가끔 짓궂은 애들이 "그지도 아니고 왜 여자거 메고 다니냐." 하고 시비를 걸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일일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얘네 아빠 대학 교수님이야." 주위 친구들이 이렇게 한마디 던지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갔다. 유행하는 옷이라든가 조던 시리즈 신발 따위 집착하는 사람은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졌었다. 그것보다 좀 더 높은 곳을 보아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거의 유일한 흑역사라고 할 만한 사건은 물건에 대한 집착과 관련이 깊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앞 서점에서 파커 펜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붙잡힌 것이다. 나는 남의 물건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날 매끄럽고 유려한 곡선에 반질반질한 금속제 광택이 나는 그 펜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서점 주인이 약이 바짝 올라 있었던지 용서를 빌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를 해버렸다. 놀란 기색으로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요즘도 가끔 경찰서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악몽을 꾸곤 한다. 

아버지의 지인들은 어린 나에게 이런 이야길 하곤 했었다. "부모님이 훌륭한 분이니 너도 판사 한번 해라. 아니면 장관 어떠냐 장관." 나는 엄마와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게 좋은데, 일찍 일어나 책을 읽거나 시간 맞춰 운동을 하거나 판사를 목표로 삼거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데, 왜 나는 그런 기대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펜에 집착을 하는 걸까. 아버지를 극복 할 수 있는 무기가 오로지 펜이기 때문에, 펜대를 굴리는 인간이라는 아이덴티티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는 별처럼 먼 존재라는 걸 알게 되고 이 싸움이 너무 힘겹게 느껴진다. 만년필은 아직 내가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징표 같은거다. 그래서 나는 새로 산 책에는 굳이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로 이름을 쓴다. 그렇게 이름을 새기고 나면 죽어가는 투쟁심이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오 펜 멋지다. 비싼 거야?"

강의실에서 새로 산 책에 이름을 쓰고 있는데 재현이 형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아, 이거 아버지가 주신거라 가격은 잘 몰라요."

"응, 그래? 지금 애들이랑 농구 한게임 할려고 하는데 너도 할래?"

시간을 보니 한게임 정도 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네, 같이 가요."

농구장에 갔더니 법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팀을 나눠서 농구를 했다. 첫 게임을 끝내고 보니 두번째 게임을 시작하기가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멤버를 교체해서 잠시 구경을 하다가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현이 형이 나에게 시계를 풀어서 잠깐 들고 있으라고 말했다.  잠시 게임을 구경하다가 수업 시간이 다 돼서 농구대 아래 평평한 곳에 시계를 올려놓았다.

"형, 시계 여기 밑에 놓고 가요. 좀 있다 봐요."

눈빛이 마주친 것 같아서 부랴부랴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고 재현이 형을 만났을 때, 내게 시계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농구장에 두고 왔다고 말하자 당황한 기색으로 농구장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재현이 형은 풀숲까지 꼼꼼히 헤집고 다녔다.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같이 찾는 시도라도 하는게 재현이 형이 내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같아서 열심히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시계는 발견되지 않았고 나는 수업이 연달아 있어서 난처해졌다.

"형, 진짜 미안해요. 수업이 있어서요... 분실물 센터에 같은데 가보시는게 낫지 않을까요. 누가 주워다 맡겼을 수도 있고..."

"뭐?"

딱히 화난 표정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평소처럼 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래, 알았어. 일단 수업 들어. 괜찮으니까."

"형, 진짜 미안해요ㅠ 마치고 바로 올게요."

"그래, 좀 있다 보자."

수업에 들어왔지만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 줄 알았으면 재현이 형 도와줄 걸. 수업이 마치자 마자 재현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찾으셨어요?"

"아, 그거, 못 찾았어."

"형, 진짜 미안해요. 형 지금 어디세요?"

"괜찮아. 로비에 있는데 이리로 올래?"

"네, 바로 갈게요."

재현이 형은 법대 로비 한쪽에서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형, 미안해요. 비싼거 같던데. 어떡해요?"

"어쩔 수 없지 뭐. 비싼 건 아냐." 

"대신에 제가 오늘 저녁 쏠게요. 뭐 드시고 싶은거 먹어요."

"됐어 임마, 안그래두 돼. 그러지 말고... 오늘 형이랑 술이나 한잔 할래?"

"네, 알겠습니다 형님. 오늘 술값은 제가 쏘겠습니다."

"새끼, 돈도 없는게. 킄킄. 가자."

우리는 차를 타고 재현이 형이 사는 아파트로 왔다. 마트에서 간단히 먹을 걸 사는데 말릴 틈도 없이 재현이 형이 계산을 해버렸다. 집으로 들어와 거실 바닥에 안주를 깔고 마트에서 사온 오렌지 주스와 보드카를 섞어 마셨다. 재현이 형이 '스크루 드라이버' 라는 칵테일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칵테일이란게 이렇게 쉽게 만들어지는거였구나. 별거 없네 라고 생각하면서 홀짝홀짝 마셨는데 십자 드라이버로 쑤시는 것처럼 술기운이 금방 치고 올라왔다. 재현이 형은 시계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는지 평소와 다름 없이 일상적인 이야기나 법대 선배들 이야기를 해주었다.

"근데 넌 여자 친구 안사겨?"

"아, 형 안사귀는게 아니라 못사귀는 거에요ㅠ 난 그런말 하는 사람들 진짜 짜증나요. 왜 안사귀냐고. 킄킄."

"아, 자식. 킄킄. 전에 보니까 민재 걔 귀엽던데. 넌 어때?"

"아, 민재요. 아하하.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음과 함께 남은 술을 비워버렸다.

"형 같은 사람 보면 너무 부러워요. 항상 여유 있고 솔직하고 주위에 아는 사람도 많고 여자 친구도 엄청 예쁘고. 저는 진짜 아둥바둥 살고 있거든요. 몇 년 놀았더니 수업 따라가기도 벅차요."

재현이 형은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촛점이 흐릿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다.

"너, 나에 관해서 소문 같은거 들은거 없어?"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곤란한 질문을 받으니 뇌가 일시적으로 판단 정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아뇨. 무슨 소문이요?"

재현이 형은 내 가슴팍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드카를 빈 잔에 부어서 주스도 섞지 않고 잔을 비웠다. 

"나도 알고 있어. 법대에서 이상한 소문 도는거. 처음엔 그럴듯한 소문이 돌더니 요즘엔 황당한 이야기도 들린다고 하더라고."

"네..."

"나 예전에 미국에서 몇 년 살다 왔어. 중학교 때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 그 바람에 집안이 완전 풍비박산이 됐어. 돈 빌려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돈 빌려준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장례식까지 찾아와서 난리를 피더라고. 채권자들이 돈 내놓으라고 집안에 드러눕고 살림 살이도 다 가져가고 진짜 힘들었어."  

난 뜻밖의 이야기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형 많이 힘드셨겠어요."

"난 어려서 힘든지도 잘 몰랐어. 엄마가 고생하셨지. 결국 몇 년 후에 재혼 하셨어. 엄마랑 결혼하신 분, 나도 자주 본 건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는데 무슨 사업 같은거 하는 모양이더라고. 유학도 보내주고 암튼 돈이 엄청 많은가봐. 나 대학 들어올 때 엄마가 이 집하고 차하고 사줬는데 아마 그 사람 돈이겠지, 엄마가 뭔 돈이 있겠어."

나는 왠지 보드카 병으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띵한 기분이 들었다.

"용민이한테 들었는데 너 아버지께서 대학에 계신다며? 난 너처럼 반듯한 가정에서, 멋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애들 보면 질투가 나. 나도 아버지 살아계셨으면 엄마를 뺏기는 일도 없었을텐데, 계속 이런 생각이 들거든."

뭔가 위로가 되는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저도 뭐 그렇게 반듯하게 자란 케이스는 아니에요. 사고도 많이 쳤거든요. 아버지도 엄청 피곤한 스타일이라 어렸을 때 힘든 점도 많았구요."

재현이 형은 약간 허무한 느낌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빈 잔에 보드카를 절반 쯤 채우고 잔을 비워버렸다.

"정석아. 중요한 건 간수를 잘 해야 돼. 인간은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동물이거든."

"네..."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날따라 재현이 형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편한 느낌도 아니었는데 화가 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 재현이 형의 본질이 '단순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복잡하고 모호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시계...아버지 유품이었어."

나는 더이상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5.


몇일 후에 난 아버지에게 받은 만년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재현이 형과 같이 듣는 수업이었는데 잠시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탈탈 털었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10년, 20년 간직할 물건이라 아깝기도 했고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던거라 마음 속에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며칠 내내 기분이 우울하고 기운이 없었다. 

'인간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동물이라고...'

수업이 없는 오후에 약간 멍한 기분으로 법대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멀리 용민이가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이 정석아. 뭐하냐."

"어, 그냥..."

"요즘 뭔일 있냐. 칠렐레팔렐레 하던 놈이 축 쳐져 가지곤."

"아냐. 넌 고시원 가는길?"

"응, 근데 너 며칠 전에 민재랑 만났어?"

"아니, 최근엔 거의 통화 못했는데. 왜?"

"그저껜가 정문 쪽에서 민재랑 재현이 형이랑 우연히 마주쳤었거든. 나도 일행이 있어서 인사만 하고 지나갔는데 너랑 같이 본 줄 알았지."

"응, 난 없었어 그때."

"그랬구나. 기운 좀 내 임마. 민재한테 연락도 자주 좀 하고. 너 혹시 만년필 잃어버린 거 때매 그러냐."

"아냐."

"그만 잊어버리고 새걸로 하나 사. 어쩌겠냐"

"알써 임마. 그만 꺼져."

"자식. 킄킄. 갈게. 요즘 만년필 쓰는게 유행인가, 아까 수업 시간에 보니까 재현이 형도 비싸보이는 만년필 쓰고 있던데..."

용민이는 내 어깨를 한번 짚고는 법대 쪽으로 걸어갔다. 용민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다음 수업시간에 들어갔을때 재현이 형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재현이 형의 손으로 끌려가버렸다. 

"응, 이거? 너 만년필 쓰는거 보니까 멋져 보여서 나도 하나 샀어. 디자인 깔끔하지?"

"네..."

자리를 잡고 재현이 형의 만년필을 힐끔 봤는데 아버지에게 받은 만년필과는 전혀 다른 모델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집중이 잘 안됐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더니 바쁜 생활을 하면서 만년필에 관한 건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날씨가 쾌청해서 기분이 좋은 오후였는데 민재에게 불쑥 전화가 왔다. 지금 기다리고 있으니까 자기가 있는 곳으로 빨리 오라고 했다. 오라면 가야지. 최대한 단정해 보이는 옷으로 갈아 입고 민재가 메시지로 보내준 주소로 향했다. 나오는 길에 날씨가 갑자기 흐려져서 우산을 챙기려고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민재가 있는 곳은 3층 짜리 건물을 통으로 쓰는 분위기 좋은 와인바였다.

"야, 여기야 여기."

"응."

손을 흔드는 민재 옆에 웬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는데 뜻밖에 재현이 형이었다.

"어, 왔어."

"예, 형. 왠일이세요."

"민재랑 술한잔 하는데 너 보고 싶데서."

재현이 형은 언제나처럼 푸근하게 미소를 보였다. 둘은 와인을 한병쯤 나눠마신 모양이었다. 이미 술이 약간 취한듯 보였다.

"야, 재현 오빠 진짜 너무 웃겨. 킄킄."

"재현이 형 재미있지?"

"어, 나 미치는줄 알았어. 킄킄."

나는 민재 맞은 편에 앉았다. 점원이 내게도 글라스를 가져다 줬다. 둘은 미국 유학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짜증나게 하는 애들 이야기나 파티를 한 이야기, 카지노에 가서 돈을 왕창 딴 이야기,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렌트를 해서 다녀온 이야기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관심있게 듣고 있었는데 내가 낄 수가 없는 주제였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영어로 대화를 하기도 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같은 테이블에 있었지만 두 공간이 분리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재현이 형과 민재는 성향도 비슷하고 대화 코드도 잘 맞는 것 같았다. 민재의 표정이 평소보다 즐거워 보여서 괜시리 신경이 쓰였다. 

창 밖을 보니 예상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3층 창가 쪽 좌석이라 전망이 시원했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에 손을 올리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도시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풍경과 잔잔한 음악, 진한 와인은 멋진 조합이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우울한 날에는 웬지 쓸데없이 멋진 풍경이나 맛있는 술이 마음을 더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민재는 내가 대화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나를 보고 말했다.

"야, 오늘따라 왜 멍하게 있어?"

"응? 아냐. 재현이 형 이야기 듣고 있으니까 시간 가는지 모르겠다."

"먼 산만 보구선. 흫흫.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민재가 화장실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약간 취해보이기도 했지만, 오늘 따라 뭔가 민재와 재현이 형 느낌이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재현이 형은 내게 와인을 권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미국에 있었을 때... 나 고2 때 한국 들어온거 너도 알지?"

"네. 그때 형이 이야기 하셨잔아요."

"왜 고등학교까지 안 마치고 들어온 줄 알아?"

"왜요?"

"그때 같은 학교 다니던 놈들 중에 백인 쓰레기 같은 놈이 하나 있었거든. 인종차별 무지막지하게 하고 약한 애들 괴롭히고 그런 새끼말야."

그때 민재가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이야길 그렇게 재미있게 해요. 나도 껴줘요."

"응, 나 고등학교 때 이야기. 같은 학교에 백인 양아치 새끼가 하나 있었어."

"하루는 그 새끼가 나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데 자기 차를 끌고 쫒아와서 지랄을 해대는거야. 처음에는 계속 무시했는데 부모님 욕까지하고 계속 그러니까 확 짜증이 나더라고. 그래서 나도 막 욕하면서 맞받아쳤지. 잠시 지나니까 안 보이길래 가버린 줄 알았더니 나 길 건널때 그새끼가 차로 날 쳐버렸어."

"진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생각보다 세게 박은 건 아니어서 몇 군데 까진 거 말고 큰 상처는 없었어 다행히."

"어머...오빠 진짜 큰일 날뻔 했어요. 어쩜 좋아."

재현이 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재현이 형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재현이 형은 즐거운듯 웃으며 나와 민재를 차례로 쳐다봤다. 민재가 토끼 눈을 뜨고 물었다.

"어떻게 했어요?"

"죽여버렸어."

"아, 뭐야. 흫흐"

"킄킄. 웃기지."

난 대화 맥락을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둘은 뭐가 재미있는지 마주보고 킥킥 웃고 있었다. 

"정석아,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말야..."

"네..."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있게 돼."

"......."

나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민재도 술기운 때문인지 오늘따라 더 느슨해 보였다. 

"정석이 너 전에 나보고 현지 어떻게 꼬셨는지 물어봤지."

"네..."

"알려줄게 잘 봐봐."

그렇게 말하고는 민재 양 어깨를 잡고 자기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민재 가슴팍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신을 집중해서 가슴팍을 노려보는거야. 그렇게 계속 보다보면 볼 수가 있게 돼. 비밀번호를."

검지 손가락을 들어서 민재 가슴 앞에서 번호를 누르는 시늉을 했다. 뭔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뚜. 뚜. 뚜. 뚜. 이렇게 누르는 거야. "

"아, 뭐에요 오빠. 흫흫."

민재는 재현이 형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면 금고가 철컥 열리면서 그 안에 있는 진심을 토해내게 되는거지."

"아하하. 그럼 오빠. 내 비밀번호도 맞춰봐요. 흫흫."

"야, 니건 너무 쉬워. 1분도 안걸려."

"뭐에요 그럼. 말해 봐요, 빨리."

재현이 형은 흐릿한 눈으로 팔짱을 끼고 민재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음...방금 보였어. 킄킄. 난 알았어. 근데 말 안해줄래. 킄킄."

"아, 뭐야. 또 뻥치고 있어. 흫흫."

평소답지 않은 민재의 모습이 걱정이 되었고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형 오늘 민재 많이 취한거 같은데 그만 일어나요. 늦었어요. 야 민재야.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게."

"응? 나 안취했는데. 왜 벌써가. 좀 더 놀다가자. 오늘 재미있는데."

난 이미 핸드폰과 지갑을 챙기고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여기까지 하자. 나도 오늘 피곤하네." 

재현이 형도 일어날 준비를 했다. 재현이 형은 카운터 쪽으로 가서 계산을 했다. 우리는 건물 밖으로 같이 나왔다. 

"민재야 조심해서 들어가고 담에 봐."

"잉, 오늘 재밌는데...알았어요. 담에 봐요."

"형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전 민재 데려다 주고 들어갈게요."

"그래. 알았어. 가."

나는 민재를 가볍게 부축해 주었다. 

"야, 정석아..."

뒤를 돌아보자 재현이 형이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전에 니 사물함 열어줬던거...기억나?"

"네..."

"그거 우연으로 생각하는거 아니지? 킄킄. 조심해서 들어가라."

"........."

비가 와서 날씨가 쌀쌀해진 탓인지 재현이 형의 처음보는 미소 탓인지 모르겠지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민재를 먼저 밀어넣고 같이 탔다. 그리고 민재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주소를 기사님에게 말했다.

"야 너 오늘 왜이렇게 많이 마셨어. 술도 잘 못마시는 게."

"아냐 나 오늘 별로 안마셨어. 흫흫."

"딱 봐도 많이 마셨구만, 뭘."

"술은 많이 안마셨어. 흫흐. 그거 말고 아까 그거 먹었어."

민재가 웃는 표정이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뭘 먹었는데?"

"재현 오빠가...봉투에서 알약 같은 걸 하나 주더라고. 흫흫. 그거 먹었어."

"뭐? 너 약을 먹었다고? 너 미친거 아냐?"

"야, 왜그래. 목소리 좀 낮춰. 기사님도 있는데..."

나는 갑자기 미친듯이 화가 났다.

"너 진짜 어쩔려고 그러냐. 큰일나 진짜."

"뭐 어때. 하나만 먹는건데."

"어휴, 진짜 너 뭔 생각으로 사냐. 생각이란게 있긴 한거야?"

민재는 도끼눈을 뜨고 날 바라봤다.

"왜그러냐, 한번 한걸 갖고..."

난 왠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한국말도 잘 못하는게 영어나 쓰고 말야. 미친거 아냐 진짜?"

민재의 눈을 쳐다봤을때 나도 모르게 선을 넘어버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 그게 아니고...너 걱정돼서..."

"나 갈꺼야."

민재는 말릴 틈도 없이 신호대기중인 택시에서 문을 열고 내려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기사님에게 길 가쪽에 세워달라고 말하고 택시비를 계산했다. 따라 내렸을 때 민재는 다른 택시를 타고 출발 해버렸다. 아, 진짜 미치겠네.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민재는 받지 않았다. 쌀쌀한 새벽에 도로가에 서서, '같은 동네 주민' 이라고 입력된 핸드폰을 우두망찰 바라보고 있었다.  




6.


나는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 경찰 아저씨가 뭔가를 기록하는 검정색 서류철을 들고 내 앞에 섰다.

"학교 어디야?"

"........"

"학교 어디냐고 임마."

"xx중학교요."

"몇 학년?"

"1학년이요."

"아버지 직업?"

"........."

"아버지 직업 뭐냐고, 빨리빨리 대답 안할래?"

"xx대학 교수요."

경찰 아저씨는 쓰던 펜을 멈추고 서류철을 덮더니 내 머리를 세게 두번 팡팡 내리쳤다.

"이 새끼가...진짜 나쁜놈이네. 어린 놈의 새끼가..."

난 너무 슬프고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채 경찰서 돌바닥의 기묘한 문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헐레벌떡 경찰서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버버리 코트를 입은 한 남자였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경찰서 돌바닥이 무너지면서 무한한 암흑 세계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심이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달달 떨었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돌바닥에 길게 늘어진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정석아?"

그 소리는 저승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슬프고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석아? 여기서 뭐해. 고개 좀 들어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소중한 건 있을 때 잘 지키라 그랬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재현이 형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자취방이었다. 아 시발, 꿈이었구나. 하... 꿈을 꿔도 이런 꿈을... 아침부터 기분이 몹시 찝찝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핸드폰을 확인해봤다. 몇일째 민재와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대충 때우고 가방을 챙겨서 학교로 나왔다.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에 필요한 책들을 꺼내는데 책 사이에 만년필이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만년필을 빼들고 유심히 살펴봤는데 아버지께 선물 받은 그 만년필이 확실했다. 나는 무슨 환상 소설을 읽은 것처럼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나는 수업을 듣지 않고 나와 버렸다.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재현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봤으나 재현이 형도 받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버스를 타고 민재 집으로 갔다. 민재 집 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벨을 두세번 눌렀는대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려 봤지만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것 처럼 도어락 커버를 열어젖혔다.  5.2.9.2 버튼을 눌렀다. 삐비빅. 문은 열리지 않았다.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찾아왔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나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흰색 독일제 세단을 봤다. 재현이 형 차와 같은 종류다. 기묘한 의구심이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천천히 퍼졌다. 동그라미가 네개 박혔다고 다 재현이 형 차는 아니잔아. 세상에 모든 흰색 독일제 차량이 재현이 형 차는 아니잔아. 스스로 되뇌어 봤지만 심장이 멈출 수 없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급하게 올라 갔다. 민재 집 문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으로 버튼을 하나씩 눌렀다. 하나하나 누를 때 마다 삑삑삑 소리가 정적에 잠긴 복도에 울려퍼졌다. 2,5,0,1......띠로링~ 하는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문 고리를 잡은채 망연히 서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끝----------------------------------------------------------


세번째 소설을 완성했습니다ㅠ 주말에 모 영화를 보고 번뜩 영감을 받아서 급하게 한번 써봤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글을 쓸수록 제대로 방향이 맞게 가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ㅠ 제3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인 평을 좀 남겨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