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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공포 08 <소설 6월10일>
게시물ID : panic_985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빛나는길
추천 : 2
조회수 : 49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5/25 08: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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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8. 남대문 시장 시위를 모의하다
 
 
 

최지혜의 아버지가 안방에 걸려있는 새해 달력에서 ‘2000이라는 올해 년도를 보고 있다. 그걸 보면서 최지혜 아버지가 년도를 역순으로 웅얼거린다.
“2000, 1999, 1998, 1997, 1996, 1995......”
최지혜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에 최지혜의 어머니가
지금 뭐하는거에요?”
하고 묻는데도 아버지는 계속 숫자만 이어간다.
“1988, 1987, 1986”
그러다가 1986에서 말을 멈춘다. 아버지 입에서 ‘1986’이라는 숫자가 튀어 나오자 어머니 표정이 굳어버린다. 최지혜가 실종된 년도다. 1986년 겨울에 출근한다며 집을 나간 자기 딸이 1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지난 14년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라진 딸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어디에서도 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대체 내 딸이 하늘로 올라간 거야, 땅으로 꺼진 거야?”
새천년이 시작된다는 2000년 밀레니엄 시대라고 사람들은 들썩이고 있지만 최지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신년 초, 새해 첫날부터 최지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한극장 앞에서 딸의 실종 전단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은 전단을 잘 받지 않는다. 최지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양손에 전단을 들고 힘없이 처벅처벅 걸어간다. 그 둘이 걷다보니 남대문 시장까지 왔다. 시내 중심가 광화문에 있는 미 대사관에서 딸이 사라졌기 때문에 최지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내 중심가 지역에서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
시간은 2000년에서 과거로 돌아간다. 19865월 남대문시장에 이정훈이 서클 동료 박창식과 함께 있다. 서울대학교 입학식이 끝나고 신림사거리 중국집에서 이정훈 가족 옆에 앉아있던 경상도에서 올라온 의학과 학생 박창식이다.
창식아! 복잡한 재래시장만큼 시위대가 도망치기에 너무나 좋은 퇴로는 없어. 한마디로 최적의 시위장소이지. 그렇지만 시장 상인들과 충돌할 수 있다는 게 문제야.”
이정훈의 문제 제기에 박창식이 반문한다.
시장 상인들과 충돌이라니?”
상인들은 손님이 시장에 안 오는 것을 제일 두려워해. 장사를 못 하기 때문이지, 시장 안에서 시위가 발생하면 가게의 물건이 파손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시위대가 전투경찰과 싸우기 전에 상인들과 싸움이 날 수도 있어, 작년 겨울에 상인들이 학생들을 잡아서 경찰에 넘기기도 했잖아. 잘 알지?”
재래시장의 양면성이구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상인들이니깐, 어쩔 수 없지.....그러니깐 창식이 니가 시장 상인들을 설득해낼 수 있는 감동적인 *아지를 해야 돼.”
* 아지(아지테이션 - Agitation) : 선동
 

이정훈의 충고 아닌 충고에 박창식이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전두환이 장기집권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에 민중들도 반응이 있을 거야. 우리 역할이 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거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시위 주동자 창식이가 학생처럼 안 생겨서 시장 상인들 호응이 좋을 거야, 동질감을 느껴서
이정훈의 농담어린 말투에 박창식이 주먹을 굳게 쥔다.
나만 믿어봐! 그러면 정훈아, 퇴로는 어디야?”
남산 공원 쪽으로 도망치면 아주 좋아. 그쪽에는 전투경찰 버스 등이 배치되어 있지 않더라고. 퇴로는 그쪽으로 잡았어.”
남산공원? 거기 한번 가보자. 서울올라오던 날 아버지가 남산에서 케이블카 타자고 했었는데.”
박창식이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이정훈의 팔을 끌어당긴다.
그러고 보니 입학식 날, 중국집에서 니가 아버지한테 했던 얘기를 내가 엿들었어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데?”
이정훈이 박창식의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낸다.
아부지, 의과대학은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데모할 시간이 없어예
이정훈이 자기 말투를 흉내 내자 박창식이 기침까지 해가면서 웃는다.
남의 가족의 소중한 가정사를 옆에서 커닝하다니……. 정훈이 너도 입학식 때 가족들 다 왔어?”
, 시집간 누나까지 왔어.”
~ 시간 참 빠르다. 입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가…….”
박창식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가 이정훈보다 앞서 걸어간다.
오뉴월 햇살에 갓난 아이들이 쭉쭉 자라난다는 날씨에 남산 공원의 녹음이 푸른빛을 짙게 뿜어내고 있다. 광장 한 구석에 김구 선생 동상이 보인다. 그걸 본 박창식이 김구 선생 동상을 향해 손을 흔든다.
김구 선생님! 제가 왔어요.”
투사 창식이가 김구 선생님한테 인사까지 하네
한번은 꼭 오고 싶었던 남산에 오니 괜히 기분이 들뜬다
창식아, 의대 공부 계속했으면 정말로 외과 했을 거야?”
, 수술 잘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
체 게바라도 의사였잖아. 한국의 체 게바라가 되면 되겠네.”
고맙다. 정훈아 니 덕분에 윤봉길 의사 같은 의사도 되고…….”
둘이 대화하면서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금방 걸어왔다.
케이블카 한번 타볼까?”
박창식의 제안에 이정훈이 쉽게 동의한다. 창식이가 이번 남대문시장 시위로 구속이 되면 언제 교도소에서 나올까 싶어서 그런거다.
서울 처음 왔을 때 케이블카 타야지, 타야지 했는데 창식이 동 뜨는 기념으로 오늘에야 타보네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팔각정까지 올라가는데 서울 시내가 다 내려다보인다. 소풍 나온 유치원생처럼 이정훈과 박창식이 즐거워한다. 케이블카가 팔각정에 도착하고 박창식이 화장실을 다녀올 동안 벤치에 앉아서 이정훈이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있다. 잠시 후 나타난 박창식이 이정훈이 그린 그림을 보고 놀란다.
우와! 김구 선생님이 아니라 박창식 선생님이네.”
이정훈이 김구 동상에 박창식 얼굴을 끼어넣은 그림이다.
나중에 우리 정훈이는 남산 팔각정에서 초상화 그려주고 먹고 살아도 되겠다. 그나저나 벌써 내 동상까지 만들어주다니…… 나보고 빨리 죽으라는 얘기냐?”
죽기는 왜 죽어, 다들 오래 살아 좋은 세상 봐야지…….”
둘이 팔각정에 앉아 솜사탕까지 한 개씩 사서 녹여 먹고 있다. 달콤하다. 대학 입학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느긋한 봄날이다.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다. 그걸 애정 어린 눈빛으로 보고 있는 이정훈을 박창식이 툭 건드린다.
뭘 유심히 보고 있어?”
고향에 있는 조카 생각이 나서
나도 3살짜리 조카가 있는데 얼마나 귀여운 줄 몰라, 정훈아, 봄볕이 요렇게 따듯한 줄 정말 몰랐다.”
나도 사실 여기 올라왔을 때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 그나저나 어머니 수술은 잘 됐어?”
엄마는.... 말기 암이라 어려울 거 같아, 아들이 의대생이라고 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박창식이 자기 눈에 물기가 어리자 눈에 힘을 꽈악 준다.
우리가 어머니 잘 돌봐 드릴게, 지혜가 *빵잽이들 옥바라지 전문이잖아.”
 

* 빵잽이 : 감옥에 간 대학생 수감자
 

정말 고맙다……
이정훈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박창식이 어머니 생각에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괜히 어머니 얘기로 마음 혼란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니야, 가족 문제는 운동하면서 어차피 해결해야 할 문제잖아. 그만 내려가자.”
남산공원 올라갈 때도 앞장서서 걷던 박창식이 내려갈 때도 앞장서서 걷는다. 그 뒤를 따라오던 이정훈이 쭈뼛쭈뼛거린다. 그런 낌새를 느낀 박창식이 걸음을 멈춘다.
왜 그래?”
그게 말이야, 내려갈 케이블카 요금이 없는데…….”
별게 다 걱정이다. 걸어가면 되잖아
넉살 좋은 박창식이 이정훈과 어깨동무를 한다. 둘이 초등학생 친구처럼 씩씩하게 걸어 내려간다.
 

 * ‘대머리단어는 1980년대 파쇼정권의 전두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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