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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그리고 성불.. 허망
게시물ID : panic_986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늘은이거로
추천 : 6
조회수 : 136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6/08 17: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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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지옥에 대한 설명은 끝. 다음에는 천국(극락)에 대해 설명해 줄게


이미 내가 어제 지옥과 천국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설명하였어. 여기서는 종교 신명계에서 만들어 놓았다는 천국이나 극락의 실상을 공개하고자 해. 실제로 기독교 신명계에서도 나름대로의 천국이라는 신계를 만들어 놓았지만 4천에 이룩된 천국을 어찌 진정한 천국이라 할 수 있을까! 고로 동양의 선도(仙道)나 불도에서 제시하는 극락에 대해 논하고자 해. 먼저 참고로 고대 소설인《삼자원종기(三子願從記)》에 나오는 선경을 묘사한 구절을 약간 개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어
 
-동문을 열고 보라 하여 감사가 자세히 보니, 얼음 녹은 춘수(春水)가 사방의 연못을 채우는 가운데 백화는 만발하고 초목은 다투어 싹을 틔우고, 쌍쌍의 앵무새와 공작새는 수양버들에서 노닐고, 드문 드문 보이는 농부님네들은 곳곳에서 밭과 논을 갈고, 피리부는 아이들은 무리지어 신록 속을 헤메는 구나!
또 남문을 열고 보니, 구름이 봉우리를 감싼 가운데 수목은 무성하고 계곡물은 넘쳐나고, 김 매는 농부의 이마엔 구슬 땀이 맺혀있고, 피서하는 행인들은 숲그늘을 찾아가고, 물장구 치며 뛰노는 아이들과 한가로이 부채질 하며 바둑두는 노인네들. 휘어진 포도덩굴과 얽거진 다래덩굴, 그 사이를 오가며 요란 떠는 매미, 고단한 어옹(漁翁)들은 물가에 누워 단잠을 청하나니, 하절(夏節)의 분주함이여!
또 서문을 열고 보니, 가을 달빛이 소슬이 휘날리고 단풍이 찬란하여 봉우리마다 영롱쿠나. 국화는 향기로워 골짜기마다 황홀하며 전답이 풍성하여 황금의 물결을 이루고, 하늘은 높았는데 기러기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맑은 물결에 뛰노는 고기는 더욱 보기 좋으니, 추절(秋節)의 풍요함이 이와 같구나!
또 북문을 열고 보니, 동녘의 빛을 따라 눈부신 평온이 펼쳐지는데, 낙엽된 초목 위에 백설이 휘날리고, 털옷 입은 행인들은 어디를 가는지. 창공을 휘젖는 연들과 얼음판을 가르는 쇳날 달린 나무판, 그 속의 까르르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 가끔씩 불어오는 차가운 한기(寒氣)에 흩어지는 눈보라와 층층 쌓인 백설위에 의젖한 송백이여. 참으로 동절(冬景)이 거룩도 하여라!
 
이상은 선도의 시각에서 본 극락(선경)의 모습이야. 한마디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하겠어. 힌두교에서는 신들의 식탁에서 불사하는 술과 행복해지는 소마라는 영약을 먹는 곳으로 극락을 묘사하였고, 이슬람교는 녹음이 짚고 샘물이 넘쳐 흐르는 꽃동산에 향수의 비가 내리며 황금의 요를 깔고 사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지. 불교는 황금과 수정과 진주와 금강석으로 만든 나무가 무성하고, 향기로운 안개가 감돌며 번뇌망상이 사라지어 오로지 즐거움만 만끽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지. 기독교 역시 유리나 순금으로 만들어진 성 속에 갖은 보석과 진주로 장식한 열두 대문이 있고, 그 곳에는 영원히지지 않는 꽃과 젖과 꿀과 포도주가 흐르는 냇물이 있고, 천사들이 즐겁게 노니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런데 과연 천국은 실존하는 것이며, 그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천국(극락)을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정토, 무량수불토, 무량청정토, 서방정토라고 하는데 오직 즐거움만이 있는 곳이라 하지. 《아미타경》에 의하면,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설법하고 있는 곳이며 서방으로 기천만 기십만의 국토를 지나서 있고, 여기에 태어나는 사람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오직 즐거움만이 있다고 하지.
 
그렇다면 과연 천국(극락)이 서방에 실존하고 있는 것일까?
극락을 서방정토라 하는 것은 인도 사람들이 동쪽을 향해 서서 앞쪽을 과거 뒤쪽을 미래라 여겼기에, 극락은 내세에 왕생할 세계인바 서방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야. 그러나 극락에 특정 방위가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이는 고대인의 사고방식에 불과한 것이야.
 

불교의 극락은 실존하기는 하나 이는 서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5천 에서 9천에 이르는 선계(仙界)에서 아미타불이 위주가 되어 불교신들과 아울러 형성된, 그야말로 자비와 기쁨이 넘치는 신계(神界)의 낙토인 것이지. 그런데 오직 불교신들만 거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다른 도통신들도 자유로이 내왕할 수 있어. 이는 마치 살고 있는 지방이 각각 달라도 서로 충분히 왕래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그러나 나라가 틀린, 다시 말해 5천이 안되는 4천이나 3천의 신계에서는 왕래가 불가능해.
 

아미타불께서는 내 이름만 불러도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지만,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생전에 아미타불을 찾거나 임종시에 자손이 천도제를 지내면 사자(死者)는 극락왕생할 것이야. 그러나 아무리 아미타불을 열심히 찾고 천도제를 지낸다고 해서 극락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니야.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영적진화를 이루어 선계에 가려 할 필요가 없이 그저 아미타불만 찾으면 될 것이지. 또한 3천에 떠도는 원귀도 자손이 천도제만 지내주면 극락으로 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생전에 아미타불을 열심히 찾았거나, 사후에 자손이 49천도제를 지내준 귀신이나 신명을 보면, 맺힌 한이 순화되어 신계에서 어느 정도 잘 적응하는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이것에 의해 극락으로 진입하는 사례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어. 아미타불만 찾으면 무조건 극락간다는 사고는 기독교에서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구복적 신앙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맹신을 요구하는 극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야. 무소불능의 능력이 있는 아미타불이라 하여도 영적 진화가 되지 않은 귀신이나 신명을 임의로 5천 이상의 극락세계로 인도할 수는 결코 없어. 가령, 3천의 귀신을 끌어다 5천에 놓으면 어떨까? 무겁고 탁하고 칙칙하여 귀신일진데 밝고 가볍고 청정한 5천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만일 극락천도를 굳이 하려 한다면 원혼을 깨우치게 하여 영적 성장을 이룬 후에라야 가능한 것이야. 그런즉 불교를 믿는다고, 아미타불을 찾는다고 모두 극락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문제는 오직 자기 자신의 심성을 순화하고 정신을 얼마만큼 계발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도박과 같이 어느 특정 신을 믿고 어느 특정 종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극락과 지옥으로 갈리게 되는 것이 아니야.
 

한가지 더 일러두건대, 아미타불께서 하시는 일은 극락천도가 아니라 성불(成佛)을 만드는데 있어. 기이하게 여길지 모르나 아미타불은 귀신이나 신명을 극락으로 인도할 능력은 없으나 성불을 이루게 할 능력은 충분하시지. 즉, 아미타불께서 원혼의 손을 감싸고 9천을 향하여 엄청난 속도로 승천하게 되면, 그 가운데 원혼은 법열에 휩싸이게 되고 7, 8천을 지날 때 견성을 하게 되. 곧이어 9천에 이르면서 잠재의식까지 소멸되며 그대로 10천의 열반에 녹아들게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모든 귀신이나 신명, 하다 못해 낮은 선계의 도통신들까지 모두 성불을 시키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이 생길 거야. 그런데 5천 이상의 선신(仙神)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야. 실제로 내 사범님의 스승께서 신통력이 제일이라는 나반존자와 대면하시다가 이제 성불하시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면서 ‘아미타불’을 찾으신 일이 있었어. 이 때 나반존자는 신통력으로 스승의 입을 붙어 떨어지지 않게 하면서 팔방에 방어진을 치고 구궁을 펼치며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일이 있었지. 지존의 선신인 나반존자께서 어찌 성불하시라는 말에 이토록 놀라서 혼비백산할 수 있었단 말일까?
 
여기서 성불의 실체를 알아야 할 것이야.
저급령이 3천을 떠돌다가 정기가 흩어질 때 존재 유지의 방편으로 윤회를 하게 되는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이내 흩어져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돼. 정기가 흩어지면서 의식이 흐릿흐릿해지며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밀려오게 되는데, 이대로 해체되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 그런데 막상 해체되는 순간 영사(永死)가 아닌 오히려 견성을 하고 이내 성불하게 되는 기이한 일이 발생하지. 이것은 1천의 원시령에서 9천의 보살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으로, 해체의 순간 가아(假我)는 소멸되어 영원히 죽게 되지만 본성에 내재한 불성은 영원토록 존재하게 돼. 다시 말해, 신이 해체되는 순간 생전에 견성 성불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겪으며 가아(假我)가 모두 소멸되고 진아(眞我)인 절대성만 남게 되지. 이것은 곧 영사(永死)와 영생(永生)이 동일한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성불은 곧 영사(永死)에서 오는 것이며 영사(永死) 또한 성불에서 오는 것이야.
 

다시 말해, 개체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나라고 믿고 있던 가아(假我)가 완전히 소멸되어야 성불할 수 있는 것이며, 성불이 된다는 것은 나라는 개체가 영사(永死)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고로, 성불은 영생과 영사 이위일체(二位一體)의 성질을 지닌 것이야. 선계의 도통신들이 성불을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야. 가령, 나반존자는 견성을 하여 이치는 통하였는바, 윤회의 큰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며, 고통과 한에 절어 있는 중생이나 귀신의 불행한 삶도 존재하지 않지. 황홀하기 그지없는 선경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며 그 존재 가치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이야. 그런데 만일 성불이 된다면 ‘나’라는 개체 의식이 완전히 소멸되어 나반존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그렇다고 새로이 존재하는 또 다른 개체가 생성되는 것도 아니지. 그저 만물의 근원인 태일(太一) 그 자체가 되어 그냥 존재할 뿐이야. 어떤 느낌도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저 그렇게 영원히 존재할 뿐이지.
 
이것은 영원히 존재하는바 영생이 틀림없지만, 환유(幻有)이기는 하나 현재의 개체를 기준으로 보면 영사(永死)가 아닐 수 없지. 행과 불행의 척도에서 불행한 쪽에 있는 귀신이나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행도 불행도 없는 성불은 곧 동경의 대상이 될 것이야. 그렇지만 현재 행복과 가치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 신인, 도인, 선신(仙神)들에게는, 성불은 곧 현재의 기쁨과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선신들은 하나같이 현재의 개체를 유지하며 영존 하고자 하지 성불을 결코 이루려 하지 않아. 이에 반해, 9천의 기화선이나 보살님들은 이러한 개체로서의 한계를 넘어 무심한 가운데 있으며, 중생에 대한 한 가닥 자비의 끈(願)이 남아 아직 성불되지 않고 9천에 머물고 있는 것이야.
 

5천 정도에 진입한 수련의 초통의 수준에서는 성불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으며, 6천 이상의 차원에 진입한 중통의 단계가 되면 반대로 성불을 몹시 꺼리게 돼. 그러다가 7천의 상통 경지를 넘어 8~9천의 차원에 이르면 성불을 꺼리는 것도 아니고 추구하는 것도 아닌 초월적 지경에 이르게 되지. 그러므로 5~7천, 8천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선신들은 성불을 마치 죽는 것과 같이 두려워하지. 수련자들 사이에 흔히 인사말로 ‘성불하십시요’하는데 선계에서는 자칫하면 인사가 아닌 욕이 될 수도 있는 것이야. 나도 성불은 꺼려하거든
 

여하튼 여기에 바로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의 차이가 있는 것이야. 선도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는 절대 중위의 열반보다는 좋은 것만 있는 선계에 있는 것이 보다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불도는 선도의 이런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보다 초월적인 10천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
 

각설하고, 아미타불이 사자(死者)를 성불시킬 때 아무 귀신이나 성불 시키는 것이 아니야. 높지도 낮지도 않은 4천의 신명이 멋모르고 성불을 원한다고 하여 아미타불의 법력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다시 인간으로 윤회하기 힘들 정도로 퇴화되거나 해체의 위기에 놓여 고통에 절어 있는 원귀에 한해서 성불을 시키는 것이야. 이것이 바로 불교신 또한 개체 유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실례로, 선도와 불도가 일맥상통함을 보여주는 것이지.
해체 위기에 놓인 귀신은 가만히 나두어도 성불이 될 것인데 구태여 아미타불의 법력을 입을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어. 그러나 성불이 되는 것 자체는 같지만 그 과정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즉, 저절로 해체되는 순간에는 엄청난 두려움과 허탈함 속에서 개체 의식이 처절한 최후를 맞게 돼. 하지만 아미타불의 법력을 입게 되면 그 순간부터 황홀한 법열에 휩싸이며 개체가 소멸되는바, 실로 부처님께서 성불하실 때와 같은 무궁한 환희를 느끼며 성불하는 것이지. 한 개체가 최후를 맞이함에 있어서 결과는 같더라도 어느 방향으로 성불하느냐는 존재가 아직 소멸되지 않은 한 그 가치 차이가 충분히 있는 것이지.
 

여하튼 천국이나 극락이란 피안의 저 너머에 있는 무지개가 아니야. 아집의 굴레를 벗고 우리 의식으로 확장될 때, 선신(仙神)이 되어 해체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때, 그래서 나와 세상에 가치로운 존재가 되어 존재 의미를 만끽할 때, 천국이나 극락은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고 있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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